+ 찬미 예수님
어느덧 봄기운이 움트는것 같습니다.
미묘한 공기의 변화, 혹은 바람속에 숨겨있는듯한 풀내음, 새벽이슬의 내음
그러한 것들 때문이 아니라
제가 몸이 무거워 져서 봄이 오는것 아는것 같습니다.
이렇게 젊은데 2월 말에 벌써 춘곤증이라니... ^____^;
...
그렇습니다.
세상은 객관적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 이처럼 주관적으로 먼저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관적이라는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객관적인 표지를 요청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춘이 지났으니 봄이다.>
....
자매님께서 글을 정성들여 작성하시면서 여러 마음이 작용했을것 같습니다.
이런글을 올려야 겠다... 올려야 하나? 표현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마음 하나 하나가 쉽지 않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숙고할수록 마음이 자라니, 그 모든 마음의 변화들이 좋은 은총의 시간이셨기 바랍니다.
아울러 저에게도 좋은 목소리와 조용한 모습이 있는것으로 받아주셔서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또한 자매님의 글을 읽고나서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매님의 마음이 전해졌기에 그러했다 생각합니다.
아침식사때 어르신들께서 저를 조금 걱정하셨지만, 자매님의 좋은 글로 저도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괜히 놀랬습니다. -_-;)
우선, 제 강론중에 마음이 아프셨다 하니 대단히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마 그 내용들을 자신의 이야기이다... 하고 겸손하게 받아들이신 결과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어찌 되었든 자매님의 아픔은 자신의 상처를 아는 큰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나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더더군다나 그것을 고칠 생각도, 말 그대로 <통회>할 생각도 없는것이 대부분이랍니다.
좋은 기회를 주셨으니, 그 은총을 받아들이셨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은총은 성체성사의 은총입니다.
성체성사의 내밀한 핵심은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성변화>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참여하는 저희 역시 <성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이 아파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얻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고 산고를 겪어야 하는 어머니처럼 말입니다.
더 깊은 신앙을 얻기 위한 산고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매일 성경을 열기가 두렵습니다.
그 모든 부족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들이 바로 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아픕니다.
처음에는 제 잘못에 찔려서 아프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정확히 집어내시는 예수님이 야속해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지금에는 주님 마음이 아파서 저 역시 아픕니다.
자매님의 아픔은 어떤 아픔인지 잘 살펴보신다면, 신앙에 큰 진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부분은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따듯한 격려와 은총 역시 존재하지만
그것은 <절반>이라 생각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정의로운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사랑에 입각한 정의>입니다.
가끔 지나친 온정주의가 이것을 뒤섞어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심판>이 없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판>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꼭 걸어가야만 하는 정화와 아픔의 길입니다.
이 두가지가 적절하게 아우러지면 참 좋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난해한 일이겠습니까?
다행이 우리 노원 성당에는 참 너그러우신 미카엘 신부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니 저같이 박하고 모진 신부도 숨쉴수 있는것 같습니다.
또한 평신도의 위치는 <세속성>에서 드러납니다.
<세속>에 속해있으면서 <바로 그 세상>을 복음화 시키는 의무가
우리 귀중한 <평신도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요즘 사는것 정말 힘들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에 <짐 하나를 더 얹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물론 그것은 가벼운 짐이요 달가운 멍에 입니다. 은총도 함께 하기에 그러합니다.
마태오 복음 11장에 보면 <짐>과 <멍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이 <짐>이 <세상의 고통>이 아니라 <율법>을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변치 않는 사실 - 주님의 <멍에>는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가 편하다 이야기 하십니다.
십자가만 바라보면 그 무게에 짓눌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가 억지로 지워진 것으로 생각하여 회피하게 됩니다.
신앙 생활 내내 십자가만 피해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사건 이후의 <부활>신앙을 바라보십시요.
희망은 바로 그 부활신앙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고통 가운에 희망이 있는 것이지
고통을 희망으로 치환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고통은 겪는 것이고, 희망은 가지는 것입니다.
고통을 버리고 희망을 겪는게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모든일이 불만으로 됩니다.
성자의 십자가에 더불어 주어진 성부의 숨겨진 은총을 찾아보십시요.
성모, 베로니카, 예루살렘 여인들, 키레네 사람 시몬, 찢어진 성전 휘장, 백부장의 고백,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그 분들을 만나지 않으실 작정입니까?
십자가 위에서 <목마르다 이야기 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십시요.
저는 사람이 부족하여 모질고 박해서 격려 같은것 잘 못해드립니다.
대신 주님 말씀은 얼마든지 전해드립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JH 16,33>
매번 교우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 마다
모자란 제가 하는일이 있습니다.
고린토 전서 13장 다시 묵상하기...
숙제하고 자매님의 이름으로 주님께 한시간 봉헌토록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사제적 사랑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별 외로...
혹시 자매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부분이 <강론>이 아니라 <공지사항>부분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강론>과 <공지사항>은 전혀 다른 부분입니다.
저도 죄와 허물이 매우 많은 사람입니다. 이점 잘 알고 있습니다만...
가톨릭 교회의 신자들이라면
다음과 같은 사항은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이 아니니만큼 자신의 아집과 독선을 꺾어야 합니다.
결국 공지사항때 박하게 야단치는것은 이에 속하거나 준하는 것들입니다.
1. 주일미사 참례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는것
2. 모고해와 모영성체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것
3. 유아세례를 거부하는것
4. 이혼과 조당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것
5. 즉, 가톨릭 신자의 여섯가지 의무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것
이 글을 읽으시는 교우 여러분!
이해심이 많으신 미카엘 신부님께서
이러한것들을 <기쁘게> 잘 지키려면 <성체신심>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셨고
이번 사순 특강 주제도 바로 그것으로 잡으셨습니다.
혹,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나
깊지 않은 신심때문에 그러한 부족한 부분들이 발생한 것이라면
좋은 신부님의 좋으신 말씀들을 준비해 놓았으니
많은 참여를 통해
큰 깨우침 얻고, 깊은 신앙안에서 신앙인의 의무가 사도 바오로의 말씀따라
<복음을 전하는 특권>임을 깨달음 얻어 힘찬 신앙생활 하게 되시길 바랍니다.
사순특강때 함께 공부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