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 아빠 크산티아스가 말했다. "개가 나보다 낫다. 왜냐하면 개도 사랑을 지녔지만 나와는 달리 판단을 내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빠 사르마타스가 말했다. "나는 스스로가 죄를 범했음을 알고 참회한다면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짓지 않고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더 낫다고 본다." 겸손과 관상은 영성생활에서 서로 분간할 수 없는 쌍둥이에 해당한다. 한쪽 없이 다른 한쪽만 존재할 수 없다. 우선 우리 자신이 위대하다는 근거 없는 신화를 뒤로 하고 하느님의 광대무변하신 위용을 진실로 알게 되면 인생의 나머지도(우리 자신까지 포함해서) 올바로 이해하게 된다. 달에 착륙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우주 속에서 실로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영향력과 관련해서 소중하게 떠받들고 있는 온갖 개념들을 재고하기 시작했다. 겸손은 곧장 관상으로 이끌어주기 마련이다. 겸손은 내가 경외심을 지니고 세상을 마주하면서 세상이 주는 선물을 받아들이고 세상이 주는 교훈에서 배움을 얻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겸손해진다는 것은 작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겸손과 굴욕은 동일하지 않다. 굴욕은 인간으로서의 나를 모욕한다. 겸손은 먼지이자 축복이라는, 실로 하느님의 축복이면서도 또한 먼지라는, 우주 속에서 나의 올바른 자리를 인정하는 능력이다. 베네딕도 수도규칙은 수도승들이 시편작가와 함께 '저는 인간이 아닌 구더기입니다.'를 기도로 바치도록 타이르고 있다. 이것이 나 위주(me-centered)의 세대에게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상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진리다. 바꿔말해,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무엇이나 다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가족, 내 친구들, 나의 세계, 온 우주가 도달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최고의 봉이기는 커녕, 나 자신을 충만하게 채우지도 못하고 있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이다. 나는 흔히 나약하고, 늘 허덕이며, 때로 오만하고, 대부분의 시간에 나 자신에게 나를 숨기고, 항상 어떤 종류의 궁핍에 시달리곤 한다. 나는 물론 미사여구로 내 한계들을 가리지만, 영혼이 자신과 대면할 수밖에 없는 깊은 내면에서는 내가 진실로 누구인가를,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상이 제아무리 좋다 할지라도 내가 진실로 무엇이 아닌가를 안다. 그러기에 베네딕도 수도규칙은 우리가 언제든지 하느님과 합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완전해질 때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날마다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완전해진다는 개념 자체가 갈수록 더욱더 의심스러워지고 있다. 우리 자신이 풋내기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 너머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신이 되기를 포기할 때 하느님이 알고 들어오실 수 있다. 베네딕도 수도규칙은 관상으로 이끌어주는 겸손의 네 가지 단계를 적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그저 알아차리기만 하라고 당부한다. 수도규칙이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하느님은 그냥 존재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그 현존을, 그 권능을 알아차리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느님은 사거나 얻거나 쟁취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삶의 터전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안?하느님이 현존하시는 데서 오는 충격과 의미를 묵살하는 것 뿐이다. 나의 공동체에서는 기도시간이 될 때마다 늘 "오, 하느님! 오셔서 저를 도와주소서" 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한다. 기도드리고자 하는 의욕마저도 우리 안에 계시는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겸손의 두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들이 지닌 은총의 선물들, 곧 그들의 하느님본성Godself 과 지혜와 체험은 물론 그들의 방향까지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내밀한 자아를 다른 누군가에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정녕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인정하는 셈이다. 또한 이는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과 결국 우리 자신까지 속이는 거짓들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만들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 이것은 자신이 결코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능력이다. 남성의 경우, 이것은 자신이 가장 요긴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능력이다. 다른 이들이 지닌 은총의 선물과 자신에 관한 진실에 마음을 열 때 우리는 하느님이 계신 자리에서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겸손의 세 번째 단계는 일상생활에서 허황된 기대를 버리도록 요구한다. 나 자신의 작음을 진실로 깨달을 때 나는 내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자아를 만족시키며 삶을 허비하지 않게 된다. 내가 위대하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든 상관없이 가장 좋은 자동차, 가장 좋은 의자, 최고급 음식을 요구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하느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인생의 싸구려들(위안거리, 장식품, 직함, 상징 등)이 보장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튼튼한 보호막을 제공한다. 겸손의 네 번째 단계는 다른 사람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이도록 가르친다. 자기 자신의 한계를 알 때 다른 사람의 한계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나는 허세를 부리지 않고 세상을 조용히 살아가면서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보채는 일 없이 내면에 계시는 하느님께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자신을 실재론적으로 대할 때 정신이 자유로워져서 하느님으로 충만하게 된다. 관상가가 되려면, 날마다 내면에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마음가짐은 더없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비워 하루 동안 어느 누구에게 어떤 형태로든 하느님 노릇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내 가슴에 문을 열다」 조안 키티스터 지음 / 성찬성 옮김 / 성바오로 펴냄
17세기 초 예수회소속 스페인의 판토하 신부는 七克 이라는 책에서 七罪宗은(교만.탐욕.
음욕.분노.탐식.질투.나태) 그 자체가 죄이며 모든 죄의 근원이 된다고 말하면서 이것은 七德行
(겸손,나눔,정덕,인내,절식,사랑,근면)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만은 남을 업신여기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며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고집을 부리고
남을 비판하거나 흉을 보거나 험담하며 善을 가장하여 명예를 낚으려함을 경계하며 이것은
겸손의 덕행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