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유엔군사령관 해임
미8군사령관 릿지웨이는 1951년 3월 본격적인 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3월15일 서울을 재수복하고 전선을 38선 북쪽으로 밀어 올렸다.
미국이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것은 전선 상황이 외교적 국내적 문제를 결정한다는 고전적인 예이기도 하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맥아더는 워싱턴과 싸웠고 릿지웨이는 적과 싸웠다>
고 썼다.
4월5일 하원의 야당(공화당) 총무 조 마틴이 맥아더 원수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맥아더는 이 사신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한국전 정책을 비판했다.
4월5일 하원의 야당(공화당) 총무 조 마틴이 맥아더 원수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맥아더는 이 사신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한국전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공산주의와의 진짜 싸움은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면서
대만의 장개석 군대가 유엔군과 함께 공산군과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했다.
4월10일 트루먼 대통령은 마침내 항명한 맥아더를 해임했다.
그러자 미국내 여론은 트루먼을 맹공격하고 맥아더를 영웅으로 맞았다.
맥아더는 귀국한 뒤 의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다.
뉴욕에선 700만 명 이상이 거리로 나와 그를 환영했다.
1927년 찰스 린드버그가 최초의 대서양 횡단 비행을 하고 돌아왔을 때보다 더 많은 인파였다.
트루먼을 탄핵해야 한다는 소리도 높아졌지만 그러나 그 열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5월에 3주간 진행된 상원 청문회에서 맥아더의 신화가 무너졌으며
5월에 3주간 진행된 상원 청문회에서 맥아더의 신화가 무너졌으며
그때 맥아더는 3일간 증언했는데 고집불통이고 자신의 실수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세계정세에는 관심이 없는 인물로 비쳐졌던 것이다.
마셜 국방장관과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트루먼을 적극적으로 변호했으며
맥아더는 군인으로서 해선 안 될 월권을 저질렀다고 공박했다.
맥아더의 명성에 큰 타격이었다.
맥아더의 명성에 큰 타격이었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사라져 가는 노병이 된다.
트루먼은 맥아더를 더 빨리 해임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맥아더가 해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택동은 몹시 만족해 하며 좋아했다.
그의 측근들은 그 상태를 용심대열(龍心大悅)이었다고 표현했다.
<황제가 크게 기뻐하셨다>는 뜻이다.
중국에선 지금도 맥아더보다 릿지웨이를 더 높게 평가한다.
모택동의 미군 축출 야심을 부순 것이 릿지웨이의 반격으로 서울이 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공군의 대공세 직후
트루먼이 성급한 후퇴책임을 물어 맥아더를 해임하고 즉각 방어전에 나섰더라면
유엔군은 38선 북쪽
예컨대 평양 - 원산선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버틸 수 있었다는 전략가들의 주장이 많다.
만일 그 주장이 옳다면 한국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1951년 봄, 릿지웨이의 반격으로 전선은 거의 원위치하여 38선으로 되돌아왔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그 뒤 2년간 지리한 고지 쟁탈전과 참호전을 계속했는 데
어느 쪽도 전략적 돌파를 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1951년 6월25일 트루먼 대통령은 휴전을 협상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며칠 전 야콥 말리크 소련 외무차관이 휴전협상을 제의한 데 대한 답변이었다.
트루먼, 포로의 자유의지 존중 결정
휴전회담이 2년간 길어진 이유는 포로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및 중공군 중 상당수가
돌아가기보다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한 것이다.
그러나 제네바 포로 조약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그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인들 중 상당수가 남고 싶어 했으나
미국은 이들을 무조건 돌려보내는 정책을 채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폴 니츠 등 미 국무부 관리들은
이 전례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여 반대했으나 국방부는 무조건 송환 쪽이었다.
그 때문에 국무부와 국방부가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의 최종 결재를 받자고 했다.
그리고 트루먼은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단했다.
그에 공산군 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하여 휴전이 늦어졌고
트루먼 재임기간 중 휴전에 이르지 못했으나 미국은 인권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즉 미군은 1950년 흥남에서 철수할 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10만 명의 피란민을 군함에 태우고 남한으로 왔다.
그것은 세계전사에 찾기 힘든 인류애의 발현(發顯)이었다.
그런데 1953년 6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이 관리하던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켜 버렸다.
그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겉으로는 막바지에 이른 휴전회담이 깨진다고 크게 화를 냈다.
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고 공산군 측 역시 반발했지만
골치 아픈 문제를 그렇게 해소해 버린 것이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깨려는 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해서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국군 현대화 및 전후 복구지원들을 약속했다.
이때 겨우 처음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그 때까지 트루먼·스탈린·모택동·김일성·맥아더가 주무르던 한국전쟁의 향방을
이대통령이 막판에 결정할 수 있게 됨으로써
한미동맹이란 국가번영의 튼튼한 방호벽을 구축해 낸 것이다.
수년 전 《모택동 비화》를 쓴 정창과 할리데이 두 저자는
러시아 측 외교문서를 인용하여 이렇게 주장했다.
<북한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모택동은 휴전 당시 불법억류하고 있던 6만 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김일성에게 계속 잡아두도록 지시함으로써 그들을 비참한 운명에 처하게 했다. 그들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탈출도 할 수 없도록 북한의 벽지로 보내졌으며, 생존자가 있다면 그들은 아직도 그런 곳에 살고 있을 것이다>
모택동은 중공군 포로 2만1374명 중 3분의 2가
중공 귀환을 거부하고 대만으로 가버린 데 대한 보복을 한국군 포로들에게 해버린 것이다.
두 저자가 인용한 문서는
러시아에서 2000년에 출판된 ‘극동문제연구’(제2권)에 실린
알레나 볼로코바의 ‘한국전의 휴전회담’(1951~1953)이란 논문이었다.
이 모택동 전기는 한국전쟁 때 전사한 중공군이 약 40만 명이며
연 300만 명이 참전했다고 했다.
그리고 공식발표는 전사자가 15만2000명이지만
등소평이 일본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실토한 전사자 수는 40만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모택동에 대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에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대학생들에게 연설한 뒤 질문을 받은 자리에서
“나는 毛澤東과 鄧小平을 가장 존경한다”
고 말한 바 있다.
트루먼은 강력한 심장을 가진 보스
트루먼 대통령은 참전 결정으로 한국을 구했지만
중국 확전을 거부하고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중국과 한국의 통일을 막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근래의 학자들 거의 일치된 견해는
트루먼의 확전 거부 결정이 정당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전쟁에선 승리를 대체할 것이 없다”
고 했지만 트루먼은
“전쟁에서 승리의 대체물이 있다. 그것은 평화이다”
고 말했다.
1953년의 휴전은 트루먼의 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작품이었다.
1953년의 휴전은 트루먼의 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얻은 평화의 시기에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위대한 지도자, 한미동맹,
그리고 우수한 민족적 자질을 살려 북한정권을 압도하는 경제적·정치적 성장을 이룩했다.
한국은 의지만 있으면 자유통일할 수 있는 고지에 올라선 것이다.
그것은 물론 트루먼의 참전 결단, 그리고 한국 포기 거부 결단 덕분에 가능한 번영이었다.
6·25 전쟁에서
미국과 한국이 손잡고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함으로써 자유세계는 많은 것을 얻었다.
일본과 독일의 부흥과 재무장, 대만의 생존, 미국의 본격적인 군비증강 등.
냉전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난 뒤
역사 학자들은 6·25 전쟁의 의미와 트루먼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트루먼이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오른 가장 큰 이유도
한국전쟁에 대한 지휘를 올바르게 했다는 평가 덕분이다.
1953년 1월15일 트루먼은 퇴임 직전의 작별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나의 재임기간에 대해서 냉전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운 시기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하루도 이런 전면적 투쟁으로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그 배후엔 항상 원자폭탄이란 존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나의 재임기간을 냉전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 8년간 그 냉전을 이길 수 있는 진로가 설정되었다는 점을 인정할 것입니다>
트루먼은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정확하게 규정했다.
냉전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나자
역사가들은 냉전 승리의 전략은 트루먼이 만든 것이란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셜 플랜에 의한 유럽 부흥,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의한 집단안보,
트루먼 독트린에 의한 반공정책, 그리고 한국참전 결정은 냉전승리의 씨앗이었다.
레이건이 성공적인 추수(秋收)를 함으로써 트루먼의 위상이 더 높아진 셈이다.
고졸 학력의 트루먼은 그의‘위대한 성격’으로
미국 역사상 최고의 국무장관(딘 애치슨)과 국방장관(조지 마셜)을 수하로 부렸다.
애치슨은 트루먼을
‘보스’‘강력한 심장을 가진 대장’
이라고 불렀다.
또 마셜은
“트루먼의 용기 있는 결단보다 그의 인간됨이 더 오래 기억될 것”
이라고 평했다.
트루먼을 잊은 한국인들
트루먼은 퇴임 후
고향인 미주리주 인디펜던스에 돌아가 도서관을 짓고 회고록을 쓰면서 바쁜 여생을 보냈다.
현실 정치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여가수 '마리아 칼라스'의 독창회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그들이 나를 알아보더군”이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트루먼은 88세이던 1972년 12월26일에 죽었고, 이틀 뒤 고향의 도서관 마당에 묻혔다.
그의 부인은 10년을 더 살았다.
트루먼은 한국인을 만나면 유달리 따뜻하게 대했다.
유학 중인 한국 장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위로해 주기도 했다.
1963년 김종필씨가
이른바 '자의반 타의반’의 외유를 하던 중 트루먼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김씨에게
“내가 한국을 통일시켜 드리지 못해 미안하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트루먼은 영국을 매우 원망했다고 한다.
트루먼은 김씨에게
“국민은 호랑이이고 정치인은 사육사이다”
고 말했다고 한다.
“사육사가 호랑이에게 밥을 잘 주고 하니 호랑이도 감사할 줄 알거라고 안심하고 있다간 먹히는 수가 있습니다. 주의하세요.”
트루먼은 자신의 회고록 서문에서 대통령직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하였다.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호랑이 등에 오르는 일과 같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잡아 먹힌다. 대통령은 항상 사건의 머리 위에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사건이 그의 꼭대기에 앉게 된다. 한 순간이라도 안심해선 안 된다. 대통령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대통령의 무한책임에 대하여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돌아오지 않는 책임은 없다. 대통령은 한시도 자신이 대통령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최측근 참모도 가족들도 대통령이 어떤 자리인지 모른다. 나는 사람 속에는 그래도 악보다 선이 더 많다는 믿음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선이 악을 누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다.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역사적 선례를 연구했다. 모든 문제는 과거에 그 뿌리가 있다. 나는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결정을 내리려 했다. 내가 왜 역사를 읽고, 또 읽었느냐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한국에는 맥아더 동상과 테헤란로는 있으나 트루먼 동상도 트루먼 이름이 붙은 거리는 없다.
몇년 전 친북좌익 세력들이 인천의 맥아더 동상을 부수려고 했을 때
노무현 그 당시 대통령도 이해찬 총리도
맥아더는 물론 트루먼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서 한마디도 국민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때 노무현은
“나쁜 역사도 보존해야 한다”
는 식의 이야기만 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으로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미군의 참전이 없었더라면 나는 북한의 강제수용소에서 살고 있을 것’
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렇다. 오늘날 그가 한국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준 사람,
그리고 대통령이 될 수 있게 해준 사람이 트루먼이라면 과장인가?
우리 역사에
한번도 만난 일 없고 알지도 못하는 한 사람 외국인의 결단에 의하여
나라를 구하고 유복한 생활을 보내게 된 일은 한번도 없음을 우리는 잊어선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