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중공군 참전 요청
소설 《三國志》에서 주유가 제갈량 출현을 한탄했던 식으로 말한다면 한국인들은
“트루먼을 내신 하늘이 어찌 모택동을 같이 내셨는가”
라고 한탄해야 할듯 하다.
북진하는 유엔군 앞에서 북한군이 일패도지하고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1950년 10월,
북진하는 유엔군 앞에서 북한군이 일패도지하고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1950년 10월,
맥아더가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내도록 하겠다고 미군들에게 약속했던 그 순간
북경에선 모택동의 음모가 분주하게 진행 중이었다.
스탈린이 6·25 전쟁 최종 연출자이고 김일성이 최초 실행자라면
모택동은 후반전의 주역이다.
1950년 10월부터 6·25 전쟁은 ‘트루먼 대 모택동’구도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모택동은
중국의 완전한 적화가 끝나지 않았던 1949년 4월 말
북한의 민족보위부상 김일이
김일성의 편지를 가져와 중공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조선족 장병을 귀환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이를 승낙했다.
모택동은 해방군의 동북군구 소속 164, 166 사단을 장비와 함께 북한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이 해 여름에 북한으로 돌아온 2개 사단은 북한군 5, 6사단으로 재편되었다.
그 때문에 북한군은 약 2만3000명이 증가했고, 3개 사단이 5개 사단으로 증편되었다.
바로 그 무렵에 미국은
'한국이 전략적으로 가치가 없다'
고 판단하고
약 4만5000명의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남북한의 군사력 균형이 무너진 셈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이때부터 방어적 자세에서 벗어나 남한 공격을 목표로 세우게 된다.
1950년 1월 모택동은 북한의 김광협 부수상이 찾아와 김일성의 참전요청을 전달하자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소속의 조선인 장병 1만4000명을 무기를 갖고 귀환하도록 해주었다.
이들은 4월18일 원산에 들어와 북한군에 편입되었다.
전투 경험을 가진 약 3만5000명 해방군 출신들이 북한군 핵심이 되어 남침 때 앞장선 것이다.
남침 전 1950년 3월30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4월25일까지 머물면서
스탈린과 세 차례 만나 남침을 허락받고 자세한 전쟁계획을 지도받았다.
스탈린은 그 1년 전에는 남침을 허가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동안 중국이 공산화되고 소련이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 것이 전략상황을 급변시켰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가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모택동을 만나 동의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김, 박은 1950년 5월13일 북경에서 모택동을 만났다.
모택동은 남침에 동의하고 만약 미군이 참전하면 중공은 군대를 보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에 김일성은
“참전할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서도 싸우지 않고 물러갔지 않았느냐”
고 말했다.
그래도 모택동은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일이 생기면 중공군을 반드시 보내겠다. 그 전에 3개 군단을 압록강을 따라 배치해 두겠다”
고 말했고, 김일성은
“절대로 중국이 파병할 일은 없을 것이다”
고 했다. 모택동은 전쟁의 전개과정을 살피면서
김일성에게 인천 등지에 대한 상륙전을 조심하라는 충고를 했다.
모택동은 미군의 반격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
여름엔 임표가 지휘하는 최강의 제4야전군 병력의 상당수를 뽑아 만주지역으로 보냈다.
1950년 9월28일 서울 중앙청에 태극기가 다시 올라가던 날
김일성은 노동당 정치국 전체회의를 열고 소련과 중공에 지원을 요청하기로 결의했다.
10월1일 김일성은 북한주재 중국대사관의 자성문 참사관을 만나
“압록강 대안에 배치된 중공 제13 집단군을 출동시켜 도와줄 것”
을 요청했다.
모택동은 10월1일, 2일에 서기국 회의를 열어 파병문제를 토의하기 시작했다.
외교 책임자인 주은래는
중공군 파병을 반대했으나 모택동에게 정면으로 맞설 입장은 되지 못했다.
그는 중국주재 인도대사를 불러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면 중공도 개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해달라고 부탁했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이를 공갈로 치부했다.
10월3일 오전 모택동은 또 북경주재 소련대사 로시친을 통해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다.
10월3일 오전 모택동은 또 북경주재 소련대사 로시친을 통해 스탈린에게 전문을 보냈다.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면 소련도 같이 휘말려들 가능성이 있다>
고 경고하면서
<지금 개입하는 것보다는 사태를 지켜보면서 힘을 비축해야 한다>
고 신중론을 전개했다.
중국공산당 서기국 회의에서 다수가 전쟁개입 반대론을 폈던 상황을 반영한 내용이었다.
흑해의 소치에서 휴가 중이던 스탈린은
흑해의 소치에서 휴가 중이던 스탈린은
이 전문을 받자마자 답신을 보내 중공의 참전을 모택동에게 촉구했다.
스탈린은
스탈린은
<미국은 대규모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에선 군국주의가 부활되지 않고 있어 미국을 지원할 수 없다>
고 했다. 스탈린은 또
<조선이 미군에 점령되면 장개석과 일본의 교두보가 될 것이다>
고 경고하면서
<우리는 미국과 일본보다 강하지 않은가>
라고 모택동을 부추기며 자극했다.
스탈린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모시는 마음이 강했던 모택동으로선
이 전문에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10월3일 북한 내무상 박일우가
김일성의 편지를 갖고 와서 모택동을 만나 의용군 형식의 파병을 요청했다.
연안파 출신인 박은 중공의 수뇌부와 친면이 있었다.
10월4, 5일 북경에선 중국공산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열려 참전문제를 토론했다.
그러나 4일 회의에 참전을 찬성한 사람은 모택동 한사람 뿐이었다.
주은래와 중공군사령관으로 내정된 팽덕회는 중립이었고
나머지 7명은 적극 반대였다고 한다.
주은래는 10월3일에도 중국주재 인도대사 파니카를 만나
미국 측에 공개적인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은래는
“한국군만 38선을 넘으면 중국은 개입하지 않지만 미군이 침입하면 반드시 중공의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의 6·25 전쟁 연구자들은
모택동은 한국군만의 북진이었더라도 저지하기 위해 파병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이때는 수십만 병력이 아닌 수만 병력을 보냈을 것이고
군복을 북한군으로 위장시켰을 것이라는 것이다.
10월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확대회의는 결국 모택동의 설득에 눌려 파병을 결정했다.
그 때는 팽덕희도 적극적으로 모택동 편을 들었다.
그들 참전파들이 주장한 참전이유는 대강 이러했다.
1. 미국은 대만·한국·인도지나 세 방면으로 중국을 치려고 한다.
2. 미국과의 교전이 불가피하다면 일찍 할수록 좋다.
공업시설을 건설한 다음에 하면 시설이 파괴되고 일본과 독일이 부흥하여 불리하게 된다.
3. 적대세력이 압록강까지 진격하면 1000km의 국경선을 방어하기가 어렵다.
대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므로 수동적 자세에 빠진다.
4. 전쟁이 끝나기 전에 참전해야 한다. 끝난 뒤엔 참전의 대의명분을 찾을 수 없다.
5.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준비 부족상태이다.
그들의 전략적 중점은 유럽이고 한국에 보낼 수 있는 병력은 한정되어 있다.
이때 모택동이 중공의 최고지도자가 아니었다면
중공의 참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설이 다수다.
한국이 트루먼이란 한 개인의 결단에 의해 구출되었고
맥아더의 천재적 전략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통일을 눈앞에 두게 된 한국이지만
마왕 같은 모택동의 결심 때문에 다시 지옥의 문턱까지 가게 된 것이다.
참전을 결정한 모택동은 팽덕희에게 자신의 아들 모안영을 데리고 가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모안영은 그 뒤 유엔군의 폭격으로 죽는다.
10월5일의 정치국확대회의는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는 날을 10월15일로 정했다.
10월7일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성명을 냈다.
그리고 같은 날 유엔은 남북한 통일을 위한 선거의 실시 등을 결의했다.
10월9일 유엔군이 서부전선에서 38선을 넘어 평양을 향해 북진을 시작했다.
참전결정을 스탈린에게 통보한 모택동은
주은래와 임표를 소련으로 보내 무기 및 공군력 지원 등을 협의하도록 했다.
임표는 파병될 병력이 자신의 제4야전군이므로 당연히 사령관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으나
아프다면서 빠졌다.
중국의 한족 군대로서는
옛날 당나라의 신라 삼국통일 전쟁 개입 이후
1200년 만에 처음으로 한반도를 침략하는 군대가 된 중공군의 지휘부는
후방지원을 맡은 동북군구 사령관 겸 정치위원인 고강과 전선사령관 팽덕희였다.
10월8일 모택동은 김일성에게도 참전을 통보했다.
북한주재 대사를 수행하여 김일성을 만났던 자성문 참사관은 이런 증언을 남겼다.
<대사와 나는 모란봉의 지하 지휘소로 갔다. 김일성은 우리가 다가가는데도 누군가와 큰 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상대는 박헌영 부수상 겸 외상이었다. 박이 방을 나간 뒤 우리가 들어갔다. 김일성이 일어나 악수하면서 “그는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할 마음 자세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가 중국의 참전방침을 통보하자 김일성은 언쟁할 때의 긴장된 표정을 풀고는 웃으면서 “잘 되었다. 참으로 잘 되었다”고 소리쳤다. 김일성은 우리 둘의 손을 잡고 홀에 있는 식탁으로 끌고 가더니 술잔을 채웠다. 그는 “중국군의 서전 승리를 위해 건배!”라고 소리쳤다>
모택동이 주도한 중공군 파병결정은 막판에 또 한 차례 곡절을 겪는다.
10월10일 흑해의 소치에서 휴가 중인 스탈린을 찾아가 만난 주은래와 임표는
스탈린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공군 지원은 불가능 하다”
“당장 소련 공군력을 투입하여 중공군을 지원할 수 없다”
고 말한 것이다. 중공군이 남하한 뒤 즉 두세 달 뒤에야
소련 공군이 그것도 제한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장비가 형편없던 중공군이
소련 공군기의 엄호 없이 미군기의 공습에 노출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문제는 10월9일 출병 군단 지휘관 회의에서 제기되었던 것이다.
지휘관들은 팽덕희와 고강에게
“소련 공군의 지원이 있느냐”
고 물었고 중요한 것을 빠뜨렸다고 생각한 팽덕희는 북경의 모택동에게 물은 것이다.
모택동은 주은래-스탈린 회담 결과를 통보받은 뒤 만주에 있던 팽덕희에게
“소련의 공군지원은 없다”
고 알렸다.
직선적인 성격의 팽덕희는 즉각 북경으로 올라가 10월12일 밤의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여
직선적인 성격의 팽덕희는 즉각 북경으로 올라가 10월12일 밤의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여
“배신당했다. 이런 상태에선 전쟁을 할 수 없다”
고 길길이 뛰었다고 한다.
일이 그렇게 되자 모택동은 팽덕희에게
“일단 출동준비를 중단하라”
고 지시했다. 주은래와 스탈린은 소치 회담에서
소련 공군의 지원 없이는 중공의 참전이 불가능하다는 데 합의했다.
이에 따라 김일성에게는 소련 측이
<타이밍을 놓치지 말고 중국으로 물러나 게릴라전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는 연락을 해주기로 했다.
스탈린은 이 회담에서 중공 측에 10개 사단분의 무기를 대주고
소련 공군기를 만주 지역으로 전진 배치하는 데는 동의했다.
이 회담에서 스탈린이
이 회담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이 중국의 만주지역으로 물러나 게릴라전을 해야 한다”
고 말하자 임표가 즉각
“김일성은 물러나지 말고 산이 많은 북한에서 게릴라전을 지휘해야 한다”
고 반박하는 장면이 있었다.
임표는 김일성이 만주에 망명정부를 세우면 미국의 공격 목표가 될 것임을 걱정했던 것이다.
주은래 일행은 10월13일 오후 비행기 편으로 소치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주은래 일행은 10월13일 오후 비행기 편으로 소치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주은래는 숙소에 들어가 차를 한잔 마시고 있었다.
통역으로 따라갔던 사철이 북경과의 통신을 담당한 보좌관 방으로 들어갔다.
“새로운 지시가 들어온 게 있는가.”
보좌관은
“지금 막 전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라고 했다. 사철이 받아 읽어 보니 정치국 회의가 있었고
<소련의 공군지원이 없더라도 우리는 참전하기로 했다>
는 내용이었다. 사철이 놀라서 주은래한테 달려가 보고했다.
주은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잘못 읽은 것이 아닌가” 라고 말했다.
사철이 전문을 읽고 있는 사이 주은래는
소파에 앉은 채 아무 말 없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깊은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모택동은 별도로 스탈린에게
10월13일의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가 참전을 재확인했음을 통보했다.
이 전보에서 모택동은 중요한 전략의도를 밝혔다.
26만 명이 10월19일에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가면 공세를 취하지 않고
북부 산악지방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유엔군의 북진을 기다리기로 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