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 金日成 [2]

2009. 12. 1. 오후 4:48:13

1
글자
黨에 의한 軍 통제 강화 

  
  숙청된 군 수뇌부는 항일빨치산 출신으로서
당 비서겸 정치위원이었던 김광래, 인민군총참모장 崔光, 당비서 겸 사회안전상 石山,
정치위원인 해군제독 李英鎬 등이었다.
 
1969년 1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린 人民軍黨 제4기4차 전원회의를 마감하는 결론연설에서
金日成은 투박하고도 직설적으로 金昌奉파의 과오를 비판하고 이를 방치한 인민군내의 黨조직을 질타하였다.
 
이 연설 내용全文은
그해 3월에 휴전선을 넘어 귀순한 인민군 노관봉 중위가 갖고 있었다. 
金日成은 金昌奉 등 군 수뇌부가 현대무기만 좋아하고
한반도의 지형에 맞는 전술 및 무기개발을 등한시했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비판했다. 
 

  “전쟁승리의 결정적 요인은 현대전과 유격전을 배합하는 것이다.
산악이 많기에 곡사포가 많아야 하는데 인민군대는 직사포가 더 많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초음속(비행기)만 가지고는 안 된다.
초음속은 윙하면 확 지나가고 만다.
저공하는 비행기가 더 우월할 수 있다.
 
이자들은 산악전과 적 중심에서 싸울 경보병 부대를 조직할 데 대한 당의 요구를 제대로 집행하지 않았다.
적을 코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서 부대가 단결 안 되었지,
당 조직은 마비상태에 들어갔지,
전사들을 막 부려먹고 돌보지 않지,
심지어 전사들이 물 길러 먹으라고 준 바케스마저 다른 용도에 써먹지,
인민들을 때리고 그러니 말을 듣지 않지...”

  “수정주의가 들어왔다. 군벌주의가 들어왔다.
창봉이가 이렇게 된 것은
여편네가 일본군대에서 간호원을 했으니까 부화한 잡지나 소설만 읽으니 썩었다.”

  “우선 당 조직을 강화해야 한다.
당 조직은 사단장이나 연대장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사단, 연대에다가 정치위원제를 둔다.
정치위원의 의무는 군사일꾼들을 일 잘 하게끔 도와주고
정치적으로 잘 안 될 대는 제재하고 또 권고해야 한다.
군사간부 혼자서는 어떤 명령서에도 사인하지 못한다.
정치위원의 사인이 있어야 효력을 발생한다.” 
  
  
  군사력 강화가 경제문제 야기
 
 
  金日成은 1972년 5월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한 李厚洛 정보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청와대 습격사건(1·21사건)은 맹동분자들이 한 짓인데 책임을 물어 내쫓았다”
 
고 하면서 朴 대통령에게 사과의 뜻을 전해달라고 했었다.
金日成은 金昌奉, 許鳳學 등이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 사건을 저지른 것처럼 이야기했으나 이는 물론 거짓이다.
金日成 체제 아래서 그런 大事를 金日成의 허락 없이 어느 누가 결정할 것인가.
더구나 1·21사태 열 달 뒤에는 또 다시 삼척·울진지역에 무장병력을 침투시키지 않았던가.

  당시 정보부 북한국의 한 간부는
 
“1·21 청와대 습격과 울진·삼척공비침투는 군사력 강화의 頂点에 도달한 북한이 남한에 시험을 걸어 본 사건이었다”
 
고 해석했다. 

  “북한은 시험결과가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던 것 같습니다.
특수부대가 단시간에 청와대까지 접근할 수 있었던 점,
100여 명의 게릴라부대가 상륙에 성공하고
두 달간 수십만의 국군을 분주하게 만들었던 점을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하고 미국 전자첩보기 EC-121을 격추시킴으로써
미국과의 정면대결 직전까지 갔을 때는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동해안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對空砲를 집결시키는 등 야단법석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북한이 미국에 도전하기 위하여 일부러 저지른 것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徐大肅 하와이대학교 교수는 ‘북한의 지도자 金日成’이란 책에서
金昌奉 등의 숙청은 이들의 영향력이 증대되고 군사적 모험주의로 나가는 데 대하여
金日成이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였다.
어쨌든 이들 군 수뇌부의 숙청은
1960년대의 군사제일주의노선에 제동이 걸린 것을 의미하였다. 

  金日成이 金昌奉을 비판한 것을 분석해보면
金이 전면적 현대전에 대비하여 첨단무기를 많은 돈으로 도입한 데 대한 불만이 엿보인다.
유격전과 경보병부대의 효능성을 강조한 것은 군사비투자의 절약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때부터 金日成은
남한에 대한 全面戰 전략 대신 유격전과 민중봉기 선동을 배합한 戰略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것은 60년대의 군사노선이 경제력의 벽에 부딪쳤다는 신호였다. 

 
  駐韓미군 감축의 충격

  
  1970년 11월2일에 열린 조선노동당제5차 대회에서 金日成은 사업총화보고를 통해서
 
“우리의 국방력은 비싼 대가로 이루어졌다”고 실토하였다.
 
그는
 
“국방에 들어간 부담의 한 부분이라도 털어 경제건설에 돌렸더라면
인민경제는 보다 빨리 발전하고 인민들의 생활은 훨씬 더 높아졌을 것이다”고 했다.
 
金은
 
“우리는 일시적인 안락을 위하여 혁명의 근본이익을 저버릴 수 없으며
다시는 망국노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도 했다. 

  북한측에서 볼 때
1969년은 1인당 국민총생산까지도 남한우세로 逆轉되고
군사력의 상대적 우위가 약해지는 가운데
기존 경제 노선을 고수하기로 결정한 急轉直下의 시작이었다.
이에 반해 남한에 있어서는
이 해가 북한의 군사적 도전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대응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한반도에 놓인 힘의 저울이 남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첫해가 1969년이었다는 얘기다. 1968∼69년 金日成의 군사적 모험주의는
朴대통령을 자극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내몰았다.
1960년대의 북한군사력 강화가 1970년대의 남한측 군사력 증강을 유발하는 것이다.
 
북으로부터의 잦은 도발, 미군의 일부 철수, 월남의 붕괴 등
1970년대에 朴대통령이 당면하였던 국내외 문제들은
金日成이 1960년대에 부딪쳤던 것과 성격이 비슷했다.
다른 것은 대응방식이었다. 

  김정렴 씨는
 
1969∼70년 사이에 朴 대통령이 가장 많은 시간을 쓴 부분은
71년 대통령선거 준비가 아니라
예비군제도의 정착과 미7사단 철수에 따른 대책이었다”고 했다.
 
애그뉴 미국 부통령이 7사단의 철수방침을 통고하러 온다는 연락을 받고
朴 대통령은 일상 업무를 제쳐 놓고 약 10일간 청와대 본관2층의 內室에 틀어박혔다고 한다.
7사단 철수 방침을 포기시키기 위한 논리를 개발하고
철수에 따른 보장조치들을 거의 혼자서 다듬어갔다고 한다.
朴 대통령과 애그뉴 부통령의 회담은 1970년 8월25일에 열렸다.
두 시간으로 예정된 회담은 여섯 시간으로 길어졌다.
朴대통령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애그뉴를 설득하려고 했다. 

  애그뉴는
 
“2만 명 이상은 감군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애그뉴는 한국을 떠나 대만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행 미국기자들에게
 
“한국군의 현대화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
아마도 5년 이내에 주한미군은 완전히 철수할 것이다”고 말했다.
 
朴 대통령은 金 실장으로부터 그 보고를 받더니 한참 침묵하다가
 
일희일비해서는 안돼.
국방을 언제까지나 미군에 의존할 수는 없어.
이제는 자주국방이야.
미국도 피를 덜 흘리는 해군·공군으로 계속 지원 할 테니까
地上전투만은 우리가 맡도록 하라는 것이고 우린 그렇게 해야 돼.
그러려면 경제가 잘돼야 해”라는 반응이었다.
 
김정렴씨는
 
“7사단 철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방위산업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의 방위산업은 질·양·경제성 면에서 북한보다 월등하다.
그 체제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의 방위산업체는 軍需專用이 아니라
평시에는 民需 80∼90%, 軍需 10∼20%, 戰時에는 100% 軍需로 전환되는 시스템으로 돼 있다.
 
북한은 다른 산업과는 완전히 분리된 軍需廠(군수창) 제도이다.
한국의 방위산업은 중화학 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그 안에서 밀접한 연관을 갖고 움직이므로 시설과 기술의 상호이전이 잘 되고
가동률이나 생산성도 뛰어나다.
북한의 경우에는
군수산업이 인민 경제로부터 고립돼 있어
여기에 투자되는 자본·기술·시설은 경제적으로 큰 낭비가 되고 있는 것이다.

  김정렴씨는
 
“한국의 防産체제는 아마도 세계적으로 가장 독특하고 경제적일 것이다”고 했다.
 
이런 발상을 맨 처음 한 것은 吳源哲 당시 상공부 차관보였다고 한다.
朴 대통령이
金鶴烈 경제기획원장관에게 병기공장 건설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한 것은 1970년 7월이었다.
朴 대통령은 일본 차관으로 外資를 충당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일본에 대해서는 병기공장이라고 하지 않고 특수강 공장 등 중공업 공장이라고 위장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물론 미국·유럽으로부터도 차관을 얻지 못하였다.

  
  兵器생산 위해 중화학 육성 

  
  이때 「한국적 방위산업 모델」의 아이디어를 낸 것이 吳 차관보였다.
吳 차관보는,

  ①무기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軍工廠(군공창)을 만들면
    평시에는 시설을 놀려야 하므로 낭비가 심하다 

  ②민영군수공장도 마찬가지로 비경제적이다.

  ③따라서 병기공장의 기반이 되는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키고
    '모든 병기는 분해하면 부품' 이라는 원칙에 따라
    부품별 또는 뭉치별로 有關공장에 제조를 분담시켜
    무기수요의 변동에 따른 낭비를 극소화시키자고 했다.
 
  朴 대통령은 이 착상을 받아들이고
吳씨를 방위산업 및 중화학공업담당 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였다.
60만 대군의 무장을 지원할 수 있는 방대한 병기산업 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병기의 기본소재인 철, 특수강, 銅, 아연의 생산을 위하여 철강 및 비철금속공업이,
정밀 加工을 위해서는 기계공업이,
전자무기 부품생산을 위해서는 전자공업이 먼저 육성돼야 한다는 방향으로 계획이 발전되었다.
 
1973년 1월12일 朴대통령은 연두기자 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했다.
철강·조선·비철금속·전자·화학·기계 등을 6대 중화학공업으로 선정, 온산(비철금속)·
울산과 여천(석유화학 및 조선)·창원(기계)·구미(전자) 등에 공단을 짓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무기의 주요 부분별로 생산업체를 지정하여
평상시 작업량을 민수용 80%, 防産用 20%로 하도록 하였다.
兵器생산에만 사용되고 民需용도가 전혀 없는 기계는 국방부가 구입해서
防産공장에 대여해 줌으로써 경영압박을 덜어주는 제도도 만들었다.
 
지상군의 기본 장비는 창원 기계공단에서 제조할 수 있도록 37개 특수 유치 업종을 선정하고 방위산업도 수출산업화 할 수 있도록 추진하였다.
朴 대통령은 2∼3년 내 防産체제를 완비하도록 재촉하였는데
김정렴, 오원철 씨가 4∼5년이 소요된다고 했더니 어쨌든 빨리하라고 독촉했다고 한다. 

  북쪽의 金日成을 마주보고 있던 朴 대통령 입장에서는 쫓기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대치상황에 있는 나라에서는
경제발전과 군비증강을 어떻게 결합시키느냐 하는 선택이 국가 운명을 결정한다.
朴대통령이 선택한 한국형 방위산업은
막대한 군사비 투자가 밑 빠진 독에 물붓기가 되지 않도록
이를 중화학공업육성·기술개발 등 민간경제 부분과 밀접하게 연결시킨 것이었다.
이런 결합방식의 對北우월성은
그 뒤 힘의 균형을 남쪽으로 돌려놓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고슴도치 이론 

  
  金日成은 1963년 군사대학 졸업식 연설에서
 
“군사대학에서는 갱도학을 배워주어야 한다.
우리는 이르는 곳마다 굴을 파 놓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金日成은 이어서 고슴도치이론을 들고 나왔다. 

  “고슴도치란 놈은 머리를 쑥 들여 밀고 몸을 슬쩍 구부리면 온몸이 가시로 덮입니다.
어떤 짐승도 달려들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전체 인민을 무장시키고 전국을 요새화해 놓으면 미국 놈도 접어들지 못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朴 대통령도 1970년대에 한국이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한 군사전략을
고슴도치에 비유하여 설명하곤 했다는 점이다.
 
  고슴도치는 공격적 동물은 아니나
남북한처럼 두 마리가 붙어 있으면 찌르고 찔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화공존 하에서 善意의 체제 대결을 하자”는 1970년 8월15일의 선언은
경제발전에 자신감을 가진 朴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최초의 제의였다.
金日成은 그 동안 숱한 對南 제의를 했었으나 朴 대통령은 묵묵부답이었다.
 
朴正熙는
 
“남쪽이 더 잘살게 되기까지는 북한과의 대화에 응하지 않는다”
는 원칙을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1971년의 남북적십자회담과 이듬해의 7·4성명이 성사된 배경에 대하여
김정렴 씨는 朴 대통령의 전략을 이렇게 풀이했다.

  “미국과 소련, 미국과 중공, 일본과 중공이 가까워지는
세계적인 데탕트 무드를 타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 기관에 연구를 시켰는데 정보부가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수립해서 올린 것입니다.
박 대통령은 남북대화를 통해서 전쟁을 막아보자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통일에 대하여는 대통령께서 확고한 안목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이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통일은 안 된다.
우리가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면 북쪽에서 자연히 끌려 올 것이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른바 독일식 통일방안이지요.
그분은 전쟁이 없으면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정보부 북한국의 한 간부는
 
“박 대통령은 김일성의 수를 훤히 읽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상적인 판단을 일체 배제하고 힘의 관계 속에서 남북관계를 계산했으며
특히 실무자의 견해에 귀를 기우렸다”고 말했다.
   
  金正濂 당시 비서실장에 따르면
朴 대통령은 정보부장을 북한으로 보내는 문제를 두고 고심했었다고 한다.
남북한 비밀 사전접촉과정을 주한 미국 CIA 거점장에게 자세히 알려서
신변안전상의 협조를 받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7·4성명을 전후한 접촉을 통해서
金日成도 얻은 것이 있다고 鄭洪鎭 당시 남북조절위 간사는 말한다.
남한이 北侵의도가 없다는 것을 金日成은 확신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가건물 상태이던 평양을 본격적으로 건설하는 일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金日成은
1974년부터‘사회주의 대건설’이란 구호를 내걸고 큰 건물과 고층아파트 등을 짓기 시작했다. 남한에서는 74년부터 戰力증강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1960년대와는 거꾸로 1970년대에는 북한이 경제에, 남한은 軍備에 큰 관심을 쏟은 샘이다.

  
  군사비 지출도 逆轉 

  
  북한은 1971년부터 신6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면서
서방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자본도입을 시도하였다.
북한은 1970년에 서방으로부터 30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는데
72년부터는 서방 선진국 차관이 공산권을 앞지르게 되었다.
1973년의 경우 서방차관이 3억7500만 달러, 소련차관이 1억900만 달러였다.
 
북한은 대외 무역의 확대도 꾀하였으나
수입증가로 무역수지의 적자폭이 늘어나면서 1975년부터 外債상환이 늦어지게 되었고
76년부터는 외국자본을 거의 끌어들일 수가 없게 되었다.
북한 최초의 대외 개방 시도는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남한과의 경제개발 마라톤에서 격차는 더욱 커져 갔다.
1966∼70년 사이 남한은 10.4%, 북한은 5.8%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으나
1971∼75년 사이엔 남한이 연평균 9.7%, 북한은 2.3%에 그쳤다. 

  북한의 1970년대식 對外개방시도가 실패한 것은
외국기술과 자본을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내부체질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에 金日成은 金正日을 후계자로 삼기 위한 여러 가지 무리를 범했다.
金日成은 金正日을 위하여 당과 군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했고
金正日은 金日成을 위한 神格化 작업을 지휘함으로써
父子 간에 북한체제를 경직화시키는 相乘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주체사상의 교조화, 유일체계의 확립,
중국의 홍위병을 본 딴 金正日 직속의 3대혁명소조 활동 등등 체제의 창의성과 자율성,
그리고 신축성을 말살하는 조치가 잇따랐다.
국가발전 단계상 대중의 창의와 자율을 촉진하고 국제교류를 확대해야 할 시점에서
金日成은 주체사상과 세습체제로써 북한의 역사적 진행방향을 거꾸로 돌려놓은 것이다.
역사발전의 흐름을 탄 남한과의 격차는 1970년대에 결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국가의 興亡은 도전에 대한 응전의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이 방식의 결정에 지도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김정렴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의 박 대통령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면 ‘사색하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再任時에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습니다.
거듭되는 도전을
깊은 사색에서부터 나오는 면밀한 계획과 무서운 추진력으로
하나하나 헤쳐가면서 나라를 이끌고 갔습니다.”
 
  1970년대에 남한은 발전했지만 朴 대통령의 고민은 더 깊어졌고
북한은 침체했지만 金日成은 우상화운동에 의해 더 즐거워졌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
북한의 비틀거리는 경제가 군사력 증강을 계속 뒷받침할 수 없음이 명백해졌다.
미국 랜드 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1973년, 75, 79년에는 북한의 군사비지출이 전년도보다 감소하였다고 한다.
1970년대의 10년간 북한의 군사비지출은 1.5배가 늘었는데 남한은 2.4배나 늘었다.
 
1976년부터 남한의 군사비 지출이 북한을 앞서기 시작했다.
1인당 GNP가 북한을 앞선 지 7년 뒤의 일이었다.
북한은 1974년부터 인민군에 대한 白米지급의 관습을 수정해 옥수수를 섞어 주기 시작하였다. 건설공사장에 現役군인들을 대거 동원하였다.
경제 성장의 둔화는 서서히 북한의 군사력을 좀먹기 시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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