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 金日成 [1]

2009. 12. 1. 오후 4:45:03

1
글자
朴正熙의 大戰略 '先경제 건설 後군사 건설' 
  
  
  1960년대는 金日成의 전성시대

 
  金日成이 1963년 10월5일에 金日成 군사대학 제7기 졸업식에서 한 연설은
패기 넘치는 51세의 지도자와 뻗어가고 있는 인민공화국의 자신감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 우리 당의 구호는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입니다.”

  “우리는 5∼6년 전부터 쌀을 사오지 않습니다.
남조선 군대들이 먹는 양식은 다 미국 잉여농산물입니다.
남조선 국방군이 입은 군복도 다 미국제품입니다.
신발도 미국 제품이고 총도 미국에서 대준 총이요 탄약도 다 미국 놈들이 대준 탄약입니다.”

   "남조선에서
박정희가 중농정책을 하고 자립경제를 건설하자는 정책은 좋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 자립경제는 미국과 일본의 돈을 꿔다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식민지가 됩니다.”

  “우리 북반부와 합작을 해야만 자립경제가 됩니다.
남조선 당국이 남북합작을 하자고만 하면 우리는
'합작을 하면 우리는 당신네 군대도 먹여 살릴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미국 놈들 반대하고 일본군국주의를 반대하고 오직 인민을 위하여 투쟁하는
그런 조건하에서만 합작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남조선당국은 우리에게 북조선군대를 먹여 살릴 수 있다는 말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물질적 힘, 경제적 자립이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朴正熙 소장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1961년의 남북한 공업수준을 비교해 보면
북한의 압도적 우세였다.
 
석탄생산량은 남한이 590만t, 북한이 1200만t.
發電量은 남한이 약20만kw, 북한이 약 116만kw,
철광석 생산실적은 남한이 약 14만t, 북한은 약116만t이었다.
 
화학비료생산은 남한이 약3만8000t, 북한이 86만t.
시멘트는 남한이 약51만t, 북한은 207만t
수산물 생산량조차도 북한이 59만t, 남한이 45만t이었으며
단지 곡물생산에서만 남한이 약600만t, 북한이 약220만t으로 우세했을 뿐이었다.
농촌 가구 당 소·돼지 보유수는 북한이 월등하여 北韓農家의 內實이 단단함을 보여주었다.
 
  두 승부사의 대결
 
  44세의 朴正熙 소장이 등장하여 金日成과 18년간 피나는 대결에 들어간 1961년은
남한의 1인당 GNP가 북한의 약 60% 수준이었다.
朴대통령이 金載圭의 총탄을 맞고 정계에서 퇴장했을 때
남한은 1인당 GNP에서 2대 1, 국민총생산(GNP)에서는 4대 1로 북한을 앞서고 있었다.
 
朴 대통령에 이어 金日成과 대결하게 된 全斗煥·盧泰愚 대통령은
20세나 나이가 더 많은 노인 金日成을 상대하여 그 차이를 더욱 크게 벌렸다. 
남북한 체제대결은 朴正熙와 金日成이 양측의 대표였던 18년간에 그 승부가 끝난 것이다.
 
두 사람이 모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믿음을 가진 점에서는 같았으나
그 권력을 기반으로 하여 국가발전을 시켜간 전략에서는 극명하게 대조적이었다.
金日成은 自力更生의 경제개발을 추진하되 군사제일주의를 병행하였다.
思想무장의 강화로 정신력을 고양시키는 것을 생산성 향상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朴 대통령은 세계시장을 향하여 문을 연 개방적 경제개발 戰略을 추진했으나
군사 優先이 아닌 경제제일주의를 채택하였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에서 보듯이
대결 관계에 있는 나라들의 흥망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어떻게 결합시키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면이 강하다.
 
군사력 우선주의는 단거리 경기에서는 일단 우세하지만
장거리 경주에서는 경제력 제일주의를 바탕으로 군사력 강화를 하는 쪽이 유리해지는 것이다. 
미국 예일 대학의 폴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의 興亡’이란 책에서
세계 강국들의 성쇠를 그런 모델로 분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남북한이야말로 그런 분석의 틀을 적용하기가 가장 적합한 경우이다.
朴正熙-金日成의 국가발전 전략을 비교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보원은
아마도 9년3개월간 朴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일했던 金正濂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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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쓰다

  
  1969년 10월부터 1978년12월까지 늘 朴 대통령의 측근에 있었던 金씨는
상공부장관에서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대통령이 이렇게 당부하더라고 했다.

  “잘못하면 金日成이에게 먹힐지 모른다.
70년대를 武力적화통일의 시기로 잡고 자꾸 도발해 오고 있으니 바짝 정신 차려야겠다.
나는 경제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국방과 외교에 전념해야겠다.
임자는 경제 전문가이니 경제를 맡아라.
自作農이 많아지고 농민이 잘 살면 절대 공산화되지 않는다.
도시근로자가 잘 살게 되고 중산층화 되어도 안심이다.
도시근로자의 기능이 높아져 소득이 많아지도록 유도해야 한다.”

  계곡에서 보이는 산의 모습과 頂上에서 보이는 산이 다르듯이
일반 국민의 視野에 잡히는 國政과 대통령의 눈에 비치는 國政의 모양새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언론을 통해서 대통령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대통령의 주된 관심사가 국내정치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항상 朴 대통령이 자신의 시간을 쪼개 쓰는 우선순위는 
 
①남북관계(국방)
②경제
③국내정치 순서였다.

  金正濂씨는
 
“박 대통령의 경우,
국방에 50∼60%의 시간을 쓰고 경제에 30∼40%, 국내정치에는 10% 이하였다”고 했다.
 
이것은 경제·정치 등 國政에 대한 발상이
국방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김정렴씨는
 
1970년대에 朴대통령이 중화학공업투자를 서둔 것은
방위산업의 기반을 조성한다는 데서 출발했으며
새마을 운동에도 농민이 잘 살아야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고,
카터 미 대통령과의 갈등도 철군문제를 둘러싸고 진행 되었으며
행정수도를 공주근교로 정한 것도
휴전선을 기준으로 평양과 등거리에 위치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朴 대통령은 가끔
 
“강물이 넘치는지 안 넘치는지는 둑 위에 선 사람이 가장 잘 안다”고 했다.
 
위로 누구한테 책임을 돌릴 데가 없는 국가 지도자가 되면
그것도 세계에서 화력(火力)의 밀도가 가장 높은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있는 나라에서는
자동적으로 국가안보가 대통령의 뇌리를 압박하게 되고
이것이 그의 정책 순위 선택에나 정치적 행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얘기다.
그것은 金日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때 박정희에게 기대했던 김일성 

 
  두 사람이 역사의 무대에 맞수로 서게 된 날은 1961년 5월16일이었다.
5·16주체세력은 혁명공약에서
 
“반공을 國是로 한다”고 천명했으나
金日成은 남로당의 前歷이 있는 朴소장에게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북한은 5·16쿠데타의 소식만 알릴 뿐 한동안 비난을 삼가했다.
5.16일 오후 평양방송은
 
“남조선 청년학생들과 인민들이 張勉 정권을 타도한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군중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라며 쿠데타를 옹호하는 듯한 허위보도를 하기도 했다.
1962년에는 朴正熙의 형인 고 朴相熙씨의 친구 黃泰成을 남파시켜 비밀접촉을 시도하였다. 

  미국도 5·16직후에는 朴소장을 의심했었지만 7월15일 결론을 내렸다.
이 날짜로 사무엘 버거 駐韓미국대사가
국무장관에게 보낸 ‘군사혁명세력의 용공성 검토 보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박 장군은 공산주의자와 결별하고 전향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으면 희생물 제1호가 될 것이다>
 
이런 판단에 근거하여 미국당국은
혁명주체세력의 사상적 경향을 ‘민족적이며 반공적’이라고 했다.
 
이것은 정확한 시각이었다.
朴 소장은 한때 남로당의 군내조직 간부였으나
여순반란 사건 뒤 수사에 협조한 뒤에는 확실하게 돌아섰고
6·25전쟁이 터지자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감으로써
행동으로 자신의 사상적 좌표를 증명하였다. 

  朴正熙는 이념적으로 공산주의자였던 적이 없었다.
타고난 반골적 기질과 미군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좌익에 속했던 형 朴相熙씨가 대구폭동 때
경찰의 총탄에 맞아 죽은 데 대한 반감이 뒤엉켜 그를 남로당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朴甲東씨와 같은 남로당 출신들은
朴憲永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던 金日成을 철천지원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남로당 출신인 朴正熙도 인간적인 면에서부터 金日成을 증오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휴전 뒤 李承晩과 金日成은
전쟁피해복구에 전념하였기 때문에 서로를 의식하며 본격적인 대결을 벌일 여유가 없었다. 
 
 
4대軍事노선

  
  전쟁피해 復舊 부문에서 40대의 金日成은 70대의 李承晩을 앞서기 시작하였다.
북한은 천리마운동 등 국가총동원체제로써 그때 이미 중공업 부문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1959년에 재무부 이재국장이 된 金正濂씨에 따르면
 
'한국의 자립 가능성에 대하여 절망하고 있었던 미국정부는
한국에 대한 원조를 1965년에 가서는 끊는다는 계획표'를 짜 두고 있었다고 한다. 

  남한은 박정희의 군사정부에 의하여 1962년부터 제1차 5개년 계획을
북한은 61년부터 제1차 7개년 계획을 추진함으로써 경제개발 경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1960년대 전반기에는 북한이 높은 성장률을 보였으나
66년부터 남한의 성장률이 앞서기 시작하였다.
 
국민총생산(GNP)을 기준으로 할 때
총량은 인구가 많은 남한이 늘 우세하였으나
1969년부터는 1인당 국민총생산에서도 남한이 앞서게 됨으로써
경제부분에서는 남한이 절대적 우위에 서게 되었다.
북한은 7개년 계획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자 기간을 3년 연장하였다.
북한 경제의 추진력이 60년대의 후반기에 약화된 최대의 요인은 군사비의 過重한 부담이었다.

  6·25전쟁 뒤 북한은 經濟再建에 注力하여 군사비 지출이 감소되었었다.
북한은 1962년부터 4대 군사노선을 채택하여
軍事優先의 ‘경제·군사건설 竝進정책’에 나서게 된다.
 
북한은 4·19를 전후한 남한의 대혼란기에
군사적 개입을 할 만한 무력을 갖고 있지 못했던 점을 크게 후회했었다고 한다.
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 때
소련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사일을 철수시키는 것을 본 金日成은
큰 충격을 받고 自主국방 노선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경제정책면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이념분쟁이 격화돼 이 두 나라로부터 원조를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되자
金日成은 自力更生의 노선을 들고 나온다.
1961∼69년 사이 북한이 도입한 차관은
소련 1억9700만 달러, 중공 1억500만 달러, 동독 3500만 달러 등 3억4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
남북대결의 분수령, 69년의 선택 

  
  5·16군사쿠데타 이후
朴 대통령이 이끄는 강력한 남한정권이 한·일 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을 결정한 것도
金日成으로 하여금 군사력 강화를 재촉하게 하였다.
金日成은 한국·미국·일본의 3각 동맹체제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북한의 국민총생산에 대한 군사비의 지출비율 변화를 보면 
1962년을 기준으로 65년에는 3배, 71년에는 4배로 증가하였다.
북한의 공식통계에 의하면
1967∼71년 사이 국방비는 5년 연속해서 예산의 30%∼32%(GNP의 20∼25%에 해당)를 유지했다.
 
  외부적 도전에 당면하여
金日成이 채택한 응전의 방식-자력갱생의 경제발전과 군사제일주의
이 2대 국가발전노선이야말로
오늘날의 남북한 간 격차를 가져오고 북한 경제를 파탄으로 몰고 간 근본적인 요인인 것이다.
 
오늘날 북한의 모습은 1960년대 초에 결정되었다는 얘기다.
바로 이 시기에 朴 대통령은
金日成과는 정반대로 對外개방에 의한 경제제일주의를 국가발전 전략으로 채택하였다.
경제제일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駐韓미군이 한국 측 군사비의 부담을 상당히 덜어준 덕분이다.

  1969년에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1.5%였는데 남한은 그 열 배인 15%였다.
1·21청와대 습격사건과
삼척·울진공비 침투사건의 다음해인 이 1969년은 남북한 대결에 있어서 분수령이 된 해였다.
당시 중앙정보부 북한국에서 조선노동당의 동향을 관찰하고 있었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 3년 전부터 노동당 안에서 심각한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경제성장이 둔화된 데 대하여 한쪽에서는 수정주의적인 개방정책을 주장하였고
다른 쪽에서는 인민의 사상과 의지를 강화하면 생산성을 계속 높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북한노동당은
그때만 해도 黨內 민주주의가 보장돼 있어 이런 토론은 격렬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결국 金日成이 이 논쟁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상무장의 강화로써 생산력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쪽으로 결정을 했습니다.
기존노선의 수정을 거부한 것입니다.
정신력을 강조하는 이 노선은
그 뒤 주체사상의 강화, 金正日의 등장, 세습체제 구축, 혁명소조의 투입 등으로 이어져
결국 우상숭배로 갑니다.
사회주의 경제구조의 한계를 이념적 정신력으로 돌파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쓴 결과가 오늘의 북한입니다.
노동당 관료들은 69년의 선택을 되씹어보고 있을 겁니다.”

  
  金日成, 軍 강경파 제거 

  
  金日成은 1950년대의 ‘천리마 작업반 운동’을 발전시켜
19650년에 ‘청산리방식’
1962년에는 평남 강서군 대안전기공장에서
'대안의 사업체계’를 발표함으로써 그 이후 경제개발의 관리방식을 확립하였다.
 
청산리방식은 농장, 대안의 사업체계는 공장·기업소의 운영방침이다.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에 의한 운영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
공장, 기업소 등 경제단위조직에 黨 위원회를 설치, 최고지도기관으로 삼는다. 

  이 黨 위원회는 당 간부·행정간부·공장지배인·노동자 등 광범한 군중의 참여를 유도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집체적으로 토의, 결정, 추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산 각 계층의 의사를 충분히 수렴하여
하부의 자발적 熱意를 사상적으로 동원함으로써 自覺的으로 일하도록 하려는 노선이다.
 
이런 자발적 근로의욕이 유지되려면 당·행정조직의 관료주의가 끊임없이 타파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세계 어디서도 이루어진 적이 없는 理想이다.

  金日成은 1970년대초 대학생들로 구성된 3대혁명소조를
공장·농장·학교 등에 파견, 관료주의의 타성을 해결해보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더구나 1970년대의 무조건성·무오류성·절대성의 유일사상체계가 북한사회를 지배함에 따라 문제의식에 기초한 창의성과 자발성은 설 자리를 잃었다.

  1967년 5∼7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15∼16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金日成은 수정주의노선을 강행했다는 이유로
朴金喆(서열 4위·조직담당 부위원장), 李孝淳(대남담당 비서),김도만(선전선동담당 비서) 등 당료파를 거세해 버렸다.
 
당과 행정의 실권을 상당히 휘둘렀던 이들은
경제정책에서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했던 이들이다. 

  귀순자 출신 정치학도인 安燦一씨는
 
“이들이 실권을 잡고 있을 때는
공장에서 일과가 끝나면 의무적으로 춤을 배우게 하는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어 생산의욕을 고취시킨다는 정책을 썼고 사회분위기가 다소 풀려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들을 몰아내고 기반을 강화한 것은
민족보위상 金昌奉, 李孝淳을 대신하여 對南비서가 된 許鳳學 등 군사파였다. 
1962년에 민족보위상이 돼 4대 군사노선을 주도했던 金昌奉은
날로 비대해지는 군부안에서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하였다.
 
개성이 강한 그는 당의 군 통제기구인 정치부장의 역할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개인숭배의 분위기를 조장하였다고 한다.
1969년 金日成은 북한 군사력이 절정에 달했을 때
군사노선을 주도했던 金昌奉 그룹을 숙청하였다.
‘군벌관료주의’가 숙청의 주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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