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 金日成 [3]

2009. 12. 1. 오후 4:53:47

1
글자
적의 미사일 공격에 대비, 행정수도 건설계획

 
  1975년 4월 월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자
朴 대통령은 1968∼70년에 이어 두 번째로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金日成은 월남이 붕괴돼 가고 있던 4월18일 중공과 東歐 각국을 방문하기 위해 평양을 떠났다. 朴 대통령은 남침에 대한 준비의 일환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金正濂씨는
 
박 대통령은 거의 매일 국방관계자들과 회의를 거듭하면서 하루에 담배를 몇 갑이나 태웠다. 월남이 패망하기 하루 전에 서울死守 선언을 한 것이 이때의 위기감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때까지 우리 측의 방어개념은
全面남침 때 불리하면 주력이 漢江 이남으로 물러나 한강을 주방어선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1974년 12월에 朴대통령이 韓美 제1군단을 방문했을 때
홀링스워드 1군단장은 새로운 수도권 방어 작전계획을 보고하여 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全面남침이 시작되면
4∼5일간은 공중에서 집중적으로 화력을 퍼부어 적을 제압한 뒤
3∼4일 동안 지상군으로 하여금 북한군을 격퇴한다는 내용으로
서울 철수를 배제한 계획이었다.

  朴 대통령은
월남군의 붕괴가 가속화된 이유로
후퇴하는 군중들과 군인들이 뒤섞여버려
작전에 크나큰 장애가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서울死守의 타당성에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월남패망에 따른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朴대통령은 '서울死守 선언을 한 데 이어
5월13일에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여 改憲논의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5월21일에는 金泳三 신민당 총재를 청와대로 초대, 與野 영수회담을 가졌다.
 
朴 대통령은 金日成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을 상세히 설명하여 金 총재로부터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여야가 국가적 차원에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동의를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증대되는 군비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방위세'가 신설되었다.
'행정수도' 계획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왔다.
김정렴 씨에 따르면
朴대통령은 이해 7월 진해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면서 행정수도의 구상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휴전선에서 남쪽으로 평양과 등거리에 행정 수도를 건설하고
평양까지 도달할 수 있는 地對地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朴 대통령은 기자들에게는 행정수도의 건설 이유를 주로 인구 분산책으로 설명하였으나
진짜 이유는
북한의 地對地 미사일의 射程圈 안에 서울이 들어 있다는 데 대한 강박감이었던 것이다.

  
  개성 점령계획 

  
  김정렴씨는
 
“박 대통령은 전쟁이 터지면 자신은 행정수도에서 서울의 전방지휘소로 올라와 전쟁을 지휘한다는 생각이었다”고 했다.
 
朴대통령은
 
“기업은 모험을 할 수 있지만 국가 안보는 모험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이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국방에 관한 완벽주의적 대비로 나타났다.
朴 대통령은 북한이 오산까지를 사정권 안에 두는 소련제 프로그 미사일을 배치하자
평양까지 도달할 수 있는 미사일을 미국으로부터 수입하려고 하였으나 미국이 거부했다.

  그래서 朴 대통령은 자체개발을 지시했다.
국방과학연구소가 미국회사로부터 기술도입을 시도했으나
미 국방당국의 방해로 성사되지 않았다.
그리고 프랑스 회사와 교섭하여 겨우 미사일 추진제 개발 부문의 기술도입만 가능해졌다.
나머지는 우리가 자체 개발했고 1978년 9월26일 미사일 시험발사에 성공하였다.
 
김정렴씨는
 
“내가 대통령을 모시는 9년여 동안 이때처럼 기뻐하시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되자 미국정부는
 
“주한미군에 장거리 미사일을 배치할테니 한국 측의 자체 생산을 보류해 달라」고 했다.
 
朴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1·21, 푸에블로호 피납, 울진·삼척 공비침투, EC-121기격추 1974년 8·15저격사건 등등
金日成에게 당하기만 해왔다고 생각했던 朴 대통령이 절호의 보복 기회를 잡은 것은
1976년 판문점 도끼 사건 때였다.
 
8월18일 판문점에서
미군장교 두 명이 미루나무를 자르다가 북한군인들이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었다.
이 사건은 미국을 크게 자극하였다.
 
朴 대통령은 1·21사건 등에 있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너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데 대해 불만이 많았었다.
미루나무 사건은 미국을 격분시킴으로써
한미간에 자연스럽게 강력한 보복작전 계획이 수립되었다. 

  8월20일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 대장은 청와대를 방문,
朴 대통령에게 미루나무 절단 재개 작전의 요지를 보고하였다.
스틸웰 대장은 미 합참을 거쳐 포드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것은 局地戰이었다.
 
즉, 미루나무를 다시 자르는데
이 작업을 북한군이 武力으로 방해할 때는 개성으로 진격,
이를 점령한 뒤 황해도 연백평야 깊숙이 진출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 계획은 그 전부터 韓美軍의 전략부서에서 공동으로 발전시켜 온 반격작전이었다.
 
우리가 공격을 당하면 一面 방어, 一面 반격으로 나와 북한지역에 戰場을 연다는 취지였다.
이 국지전의 목표는 서울에 대한 근접 위협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이날 늦게 朴 대통령은
徐鐘喆 국방장관, 盧載鉉 합참의장, 李世鎬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북한으로 진격할 경우의 대책을 논의하였다.

  
  전쟁에 가장 가까이 갔던 날 

  
  김정렴씨는
 
“그날 밤 나는 다음날에는 전쟁이 터진다는 확신을 갖고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고 회고했다.
 
21일 韓美양국군은
6·25 전쟁 후 처음으로 데프콘 2(전쟁돌입상태)를 발령하고 開戰준비에 들어갔다.
휴전선 부근 상공에는
저공으로부터 무장헬기, F-4팬덤 전폭기, F-111전폭기,
괌도에서 날아온 B-52중폭격기가 4중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도 한국 海域에서 함재기를 띄워 보내고 있었다.
해병부대도 상륙작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때 인민군 제3사단의 기관총 射手로서
개성지역에 배치돼 있었던 安燦一 상사(탈북한 뒤 박사 학위 받음)는
 
“푸에블로호 사건 때와 EC-121격추 때도 전쟁이 임박했다는 느낌이었으나
도끼사건 때는 전쟁에 돌입한 기분이 들었다.
완전군장을 갖추고 비상식량을 휴대하여 坑道에 들어가 대기하였고
火器사수들은 정 위치에서 발사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명이 태풍 3호였다”고 기억한다. 

  겁을 먹은 북한군은 공수 1여단의 병력이 미루나무를 자르는 작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평양-원산선 이남에서는 이날 단 한 대의 북한 전투기도 뜨지 않았다.
金日成은 개전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루나무 절단 작업이 끝난 그날 오후 金日成은 인민군사령관 자격으로
 
“이런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하여 유감으로 생각한다”
는 내용의 사과성 메시지를 스틸웰 유엔군사령관 앞으로 보냈다.
 
당시 정보부의 북한 담당 간부는
 
“우리가 북으로 진격했더라면 목표는 달성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미군이 적극적인 開戰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그랬었다면 金日成의 기를 결정적으로 꺾어 놓을 수 있었고
수도권의 방어도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을 것이라면서 지금껏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다. 
鄭洪鎭 전 남북조절위 간사는
金日成이 그때 전면전을 할 배짱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고 분석했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초토화된 북녘 땅에 그 정도의 건설을 했는데
또 다시 잿더미가 될 모험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한 정보부 북한담당관은
 
“김일성은 박 대통령을 아주 호전적 인물로 보았던 것 같다.
경제개발과 韓美日 동맹관계를 기반으로 하여
북한에 도발해 올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고 했다. 

  
  好戰狂 북괴

  
  김정렴씨는
 
“박 대통령은 김대중씨나 김영삼씨를 라이벌로 생각했다기보다는
김일성을 늘 염두에 두고 집무를 했던 것 같다”고 했다.
 
확인 가능한 것만 해도 金日成은 네 차례나 박대통령의 살해를 기도하였다.
1965년 봄에
朴 대통령을 암살하라는 임무를 주어 남파했던 무장간첩 3명이 송추에서 발각돼
2명이 붙들리고 1명은 달아났다.
 
1·21사태와 文世光사건처럼 유명하지는 않지만
1970년 6월22일 새벽 국립묘지 현충문에서 일어난 폭파사건도
朴 대통령의 생명을 노린 것이었다. 

  특수훈련을 받은 북한의 무장특공요원 3명이 밤중에 현충문 지붕 위에 올라가
원격조종으로 터지는 폭탄을 장치하려다가 실수로 폭발하는 바람에
한 명은 잔디밭에 떨어져 죽고 두 명은 국군과 경찰·예비군의 추격을 받다가 사살되었다. 
6·25기념식 때 정례적으로 참석하는 朴 대통령과 정부요인들의 爆殺을 목적한 사건이었다.
 
폭발은 200∼300m 떨어진 곳에서 원격조종으로 할 계획이었다.
그 13년 뒤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있었던 全斗煥 대통령 암살기도사건 때와 같은 수법이었다. 

  이런 암살 기도는 金日成의 성격적 특성과도 연관되는 행태이다.
전면남침에 의한 남한의 적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金은
차선책으로 유격전과 국가원수 암살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런 암살 작전은 역효과를 불렀다.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 사건은
朴 대통령이 예비군 창설과 중화학 공업 건설에 의한 자주 국방력 강화로 대응하도록 하였다.
 
1974년 8월15일 文世光 저격 사건으로 부인을 잃은 그는
정보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본 내 북한 공작거점인 조총련을 약화시키기 위한 ‘조총련 母國방문 사업’을 허가하였다.
박정희를 죽이려 하였던 김일성은 결국 그 代價를 비싸게 치렀다. 

  김정렴씨는
 
“박 대통령이 김일성에 대해 특별히 감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다른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화중에 金日成이란 말이 나오면
朴 대통령은 조건반사적인 투지나 증오의 반응을 가끔 보였다고 한다.
 
朴 대통령의 청와대 日記에는 북한에 대한 원색적인 표현이 자주 발견된다.
朴 대통령의 뇌리에 金日成이 얼마나 큰 자리를 점유하고 있었는가는
그의 일기를 관류하고 있는 위기의식과 적개심이 말해주고 있다.

  <공산주의란 왜 이처럼 잔인하고도 포악할까.
인류사회에
어찌 이런 극악무도하고 잔인무도한 主義니 국가니 하는 것이 존재가 용인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국토 북반부에도 크메르 루즈와 꼭 같은 살인집단이 존재하고
이들이 무슨 혁명이니 해방이니 평화적 조국통일이니 하고 狂的으로 설치고
주제넘게도 우리를 보고 독재니 파쇼니 하고 비방을 하고 돌아가니 가소롭다고나 할까,
한심스럽다고나 할까>  (1976년4월24일) 

  <저 무지막지한 붉은 오랑캐들에게 더렵혀져서는 결코 안 된다.
지키지 못하는 날에는 다 죽어야 한다.
죽음을 각오한다면 결코 못 지킬 리 없으리라>  (1975년4월30일).

  <지하 땅굴 또 다시 발견.
오 신이여,
북녘 땅에 도사리고 있는 저 무지막지한 전쟁광들이 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일깨워 주시고
깨닫게 하여 주소서>  (1975년3월20일).

  1976년 4월29일자 일기에서는
'好戰狂 북괴’라는 표현을 썼다.
朴 대통령의 일기는 그 우국충정의 분위기가 충무공의 난중일기와 비슷하다.
충무공에 있어서의 ‘왜적’이 박정희에게서는 ‘金日成의 북한’인 것이 다를 뿐이다.

  
  김일성의 태양공포증 

  
  정신분석학자 白尙昌씨는 金日成·金正日의 성격을 분석해 오고 있는 이로 유명한데
金日成의 성격기반을
큰 인물 콤플렉스·살아남기 콤플렉스·태양공포증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金日成의 어릴 때 이름은 장손(長孫)·종손(宗孫)·회손(曾孫)이었고
별명은 장군, 육조판서 등이었다.
집안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는 얘기다.
자라서 큰 인물이 돼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함께
그가 만주에서 보낸 16년간의 抗日빨치산 생활은 살아남기 콤플렉스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白尙昌씨는
金日成이 마적과 비적, 빨치산과 日帝토벌대,
중국공산당 유격대와 소련군 사이에서 살아남는 과정에서
두 가지 성격상 특성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태양공포증. 해가 뜨면 동굴 같은 깊숙한 은둔지로 숨고
밤에는 치고 빠지는 생활이 습성이 돼
먼동이 트면 불안해지는 태양공포증(Sunphobis Syndrome)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金日成·金正日이 심야회의를 즐겨 하는 등 밤늦게까지 활동하고
군사시설의 지하화·땅굴파기·政敵이나 남한에 대한 기습적 공격·朴 대통령 암살기도·
비행 공포증 등이 태양공포증의 표현방식이란 얘기다.
 
  또 하나의 특성은
자신이 소속한 집단의 최강자와 늘 父子관계를 맺어 생존을 도모했다는 것이다.
金日成은
‘다섯 아버지를 가진 어린이’처럼 복잡하고 다중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多父的 동일시’라고 하는데
金日成의 경우에는
살아남기 위하여
속으로 미워하면서도 아버지를 닮으려고 하는 ‘敵對的 동일시’의 과정을 밟았다는 것이다. 

  깡패가 제거당하지 않으려고
두목에게 충성을 바치는 행위가 대표적인 敵對的 동일시의 예다.
이런 적대적 동일시를 경험한 金日成은 권력을 잡자
多父의 상징적 집단인 국내 공산파, 연안파, 소련파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해버리는 한풀이를 했다는 것이다.
 
白씨는 북한의 역사는 金日成개인의 한풀이 역사라고 주장한다.
큰 인물 콤플렉스에서 나온 우상화와 세습체제,
태양공포증과 多父的 동일시 심리에서 나온 政敵의 숙청.
金日成은 “개인적 한을 풀기 위하여 북한 인민들을 도구로 써 먹었다”는 풀이다.
 
朴正熙가 개인의 恨을 민족의 恨으로 승화시켜 가난과 굴종의 사슬을 끊은 것과 대조적이다. 白씨는 金의 정치행태를
‘무한기만의 원칙, 무한억압의 원칙, 무한연극성의 원칙’이라고 定義하기도 했다. 
  
  金日成은 이런 술회를 한 적이 있다

  “만주에 있을 때 동지들이 나에게 저 하나의 별이 되라고 一星이라 이름 지어주더니
나중에는 하늘의 태양이 되라고 日成이라 고쳤다.”

  正日은 ‘확실한 태양’이란 뜻이다.
즉 金日成이 ‘민족의 태양’이 되면
金正日은 代를 이어 태양의 자리를 굳힌다는 세습체제에의 무의식적 욕망이
아들의 作名에 숨어 있었다는 해석이다.

  
  한 사람은 神이 되고 

  
  白尙昌씨는 金日成 치하의 북한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을 면접,
심층심리 분석을 해보았더니 반동형성심리(Reaction Formation)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반동형성심리는
미워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증오의 표현을 하면 낭패하므로
정반대의 다정스런 표현을 함으로써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 방어심리라고 한다.
이런 심리의 특징은 친절과 경탄의 과장된 표현과 이의 반복이라고 한다. 

  金日成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지만
그 金日成 앞에서는 울부짖고 경배하는 북한사람들의 과장된 몸짓이 이에 해당된다는 얘기다.
북한사람들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
金日成에 대한 복종과 경배의 자유,
다른 하나는 남한에 대한 증오 표현의 자유.
폐쇄된 북한사회에서 쌓이는 주민 불만을 이 두 가지 배설구를 통하여 토해내도록 한다.
 
白씨는
 
“金日成의 50년에 걸친 정신 병리적 통치에 대한 뒷 처리를 우리가 맡아야 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라고 했다. 

  朴 대통령의 주된 콤플렉스는 가난이었다는 것이 白씨의 주장이다.
朴 대통령의 근대화도 개인적 한풀이가 동력원이 된 것이다.
金日成과 다른 것은
朴 대통령은
자신뿐 아니라 한국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던 가난의 한을 함께 풀 수 있도록 유도하여
집단적 한풀이를 민족의 발전 에너지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1970년 말에 金日成과 朴正熙의 관계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한 사람은 神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영웅적인 삶을 살다가 “난 괜찮아”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는 점이다.
 
金日成은
북한을 거대한 우상숭배의 神政체제로 변모시킴으로써 어떤 비판으로부터도 벗어나 버렸다.   朴 대통령은 장기집권에 따른 국내외의 비판과 도전을 받고 괴로워하였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푸념하는가 하면
 
“내가 목표를 달성하면 그만둘 텐데 국민들이 그때까지 기다려주지 못하나
 
하면서 섭섭해 하기도 했다.
 
남이 면전에서 칭찬해주면 계면쩍어하고 부끄러움을 타는 그에겐
개인숭배가 체질상 맞지 않았다.

  
  둘 다 核 개발 시도 

  
  1970년대에 金正日이 일종의 惡役인 國政의 실무에 개입하면서
金日成은 선심만 베푸는 「인자한 할아버지」로 상징조작 되었다.
북한사람들은 金日成을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자비로운 사람으로 알고 있다.
 
모든 과오와 나쁜 짓은
자비로운 수령의 뜻을 밑에서 잘못 받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끔
金日成에 대한 문제의식 자체를 없애버렸다.
 
金日成이 신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부하에게 순교를 명령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애하는 수령’
金日成은 KAL 858편 폭파범 金賢姬·다대포침투 무장간첩 全忠男 같은 테러리스트에게,
발각되면 자살하라고 교육하는 유일한 정치지도자이다.
북한의 간첩선은 자폭용 폭약을 싣고 다니고
자폭할 때 ‘김일성 수령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최후의 전보를 치는 훈련을 받고 있다.
 
1979년 7월 삼천포 근해 미조도에서
10여명의 무장간첩이 自爆하면서 그런 電文을 실제로 보냈다고 한다.
金正日은 공작원들에게
 
“너절하게 사는 것보다는 영광되게 죽어 정치적 생명을 영원히 남기는 것이 낫다”
 
고 교육까지 하고 있다. 

  金日成이 영변원자력 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하여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이다.
朴 대통령에 의한 핵개발이 남한에서 시작되려다가 미국의 압력으로 좌절한 무렵이다.
해가 갈수록 불리해지는 재래식 군사비 투자 경쟁에서 버티기 위하여 金日成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위협과
남한 내의 미군 핵무기 철수를 요구할 수 있는 수단을 核개발에서 구하려 했던 것 같다. 

  金日成의 정치적 행태의 한 특징은 인질작전이었다.
일본에서 북한으로 돌아온 조총련 동포를 인질로 삼아 在日조총련을 조종하고,
在北친척을 미끼로 삼아 訪北 언론인·종교인·학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려 하며,
남북 고위급 회담 때는 姜英勳총리의 누이동생을 억지로 만나게 하였다.
 
핵개발은 세계적인 개방물결과 공산주의의 붕괴,
그리고 對南 열세에 직면하고 있는 그에게
하나의 협박수단, 하나의 인질효과, 하나의 위안거리를 선물하게 되었다. 

  
  카터 때문에 속병 앓기도 

  
  한국군이 본격적인 戰力증강 노선을 결정한 것은 1974년으로서
북한이 4대 군사 노선을 채택한 것보다 12년이 늦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경제규모의 뒷받침을 받아
76년에 벌써 군사비 지출이 36.9억 달러 對 31.6억 달러로서 북한을 앞지르게 되었다.
 
1990년의 남한 군사비는 약100억 달러로서 GNP대비 4.5%인데도
GNP 대비 약22%인 북한(54억 달러)의 두 배였다.
우리 국방부는 군사비를 운영비와 군사력 건설 투자비로 나누고 있는데
남한은 인건비가 많이 먹혀 군사력 건설비의 비중이 적다.
 
북한은 군사비의 48%를 군사력 건설에, 남한은 38%를 군사력 건설에 투자하고 있는데
이런 추세로 나가면 1990년대 중반에 투자비 누계도 남한이 앞서게 된다는 통계가 있었다.
朴 대통령의 先경제, 後군사력 강화 전략이
金日成의 군사 우선 전략을 결국 압도하게 된 것이다. 

  북한은 1991년 현재 236회에 걸쳐 軍縮 제안을 해 왔다.
남한은 29회였다.
북한 제안은 거의가 주한미군의 철수·한반도의 비핵지대화, 그리고 減軍에 관한 것이었다.
대부분이 선전적인 것이라고 치부하더라도
허약한 경제체질에 무거운 군사비의 짐을 진 북한의 다급함과 남한의 여유를 엿보게 하였다.

  김정렴 실장은
 
“말년에 박 대통령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카터 대통령이 공약한 미 지상군의 완전철수 계획이었다”고 했다. 

  “곁에서 보기에 안쓰러웠습니다.
7사단 철수 때 그 대책에 부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며 고민했습니다. 이때 신경을 너무 써 십이지장궤양에 걸렸어요.
주치의를 불러 내시경으로 진단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김 실장은 카터 대통령의 회고록이 나왔을 때
얼른 사서 朴 대통령을 그토록 괴롭혔던 그의 책에
인권외교와 撤軍문제가 어떻게 언급돼 있는지를 찾았으나
한국에 관하여 기술한 것은 940면(일본어 번역판) 가운데 네 줄 반이었다고 한다.
그 네 줄 반은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와 나눈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이 대화에는 金大中, 全斗煥, 朴正熙의 이름이 나오는데, 레이건 당선자는
 
학원이 술렁이고 있을 때
대학을 봉쇄하고 데모 주동 학생들을 군대에 보내는 방법으로
사태를 해결한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이 부럽다”
 
고 열심히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김정렴씨는
 
“철군에 대비하기 위하여 또는 인권문제를 이해시키기 위하여
그렇게도 고생하던 박 대통령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대통령이 너무나도 애절해서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 했다. 

  1979년 6월 朴대통령은 한미정상회담에서,
카터 대통령이 회담후
측근들에게 신경질을 내게 할 정도로 미군철수 반대론을 집요하게 개진하였다.
 
朴 대통령은
 
“주한 유엔군 사령관의 작전지휘 통제하에 있는 세계최강의 60만 현역과
300만의 잘 훈련된 예비군이
西歐의 나토군과 더불어 소련을 견제하는 2대 支柱임을 세계전략 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고 주장하였다. 

  이 논리는 朴대통령이 스스로 개발한 것이었다.
카터 대통령이 철군정책을 포기하게 된 것은
미 군부의 완강한 반대와 朴 대통령의 논리적 설득 때문이었다는 것이 김정렴씨의 주장이다.
 
朴 대통령이 죽기 직전에 한 일 중의 하나는
朴鐘圭 대한체육회장이 기안해서 올린 서울올림픽 유치계획을 승인,
죽기 20여일 전에 서울시로 하여금 발표하도록 한 것이었다.
 
1980년대에 남북한은 서울올림픽의 개최를 둘러싸고 격돌하여
KAL 858편의 승객·승무원 115명의 목숨을 祭物로 바치기도 했지만,
국제사회에서 남한의 경제적, 외교적, 도덕적 우월성이 공인받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북한정권이
서울 올림픽에 대응하여 유치한 세계청년축전(1989년)은
50억 달러의 낭비성 투자를 유발, 경제를 다시 한번 멍들게 하였다.

  
  성공한 것은 ‘朴正熙 세습체제’

  
  金日成은 말년에 남한에서 올라간 姜英勳 총리 등 손님들에게
 
“나는 낙천적이기 때문에 건강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그의 ‘낙천적’이란 말을 ‘혁명적 낙관주의’로 해석하였다.
 
“남한에서 혁명이 일어나 적화통일이 언젠가는 가능하다는 낙관을 갖고 살고 있다”
 
는 의미라는 것이었다.
 
金日成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 영화감독 申相玉씨는
 
“그는 꼭 말년의 李承晩 대통령과 같았다.
귀가 어둡고 정보가 잘 올라오지 않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북한 주민들에 대한 정보폐쇄는 북한의 言路를 틀어막아 결국 金日成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그는 뒤늦게 김정일에게 맡겨놓은 북한의 實相을 알고는
남북 수뇌 회담을 통하여 活路를 찾으려 하였으나 역사의 神은 그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북한에서 즐겨 쓰는 이른바 ‘정치적 생명’이 영원하게 될 쪽은 朴正熙일 것이다.
김일성이 죽기 전부터,
중국·소련·東歐 공산국가들은 朴 대통령의 개발모델을 연구하고 있었으며
외국에 나온 북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朴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높았다.
 
朴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그의 심복이었던 全斗煥, 盧泰愚 두 대통령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성공한 것은 朴正熙식 세습체제였다. 
朴正熙의 행복은 '죽음의 타이밍'일 것이다.
 
자신이 ‘자기 성공의 희생자’가 되어
급변하는 한국 사회에의 적응력을 잃어가고 있을 때
他力에 의하여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함으로써 그는 스스로 나라의 짐을 덜어주었다.

  金日成과 북한주민의 불행은 그의 長壽였다.
민주사회의 장점은 정치지도자의 퇴장시기를 국민이 정해주는 것이고
전체주의사회의 단점은 시간과 독재자가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이다.
 
김일성 父子는 자기 실패의 受惠者,
이승만과 박정희는 자기 성공의 희생자로 평가될 것이다.
김일성이 하나 성공한 것이 있다면
한국에 거대한 '從北세력을 양성' 박정희를 친일파로 몰도록 하였다는 점이다.
 
 
  호화별장과 벽돌 한 장의 차이
 
  
  1987년 3월에 남한으로 탈출했던 김동춘씨는
金日成·金正日의 별장관리인으로 10년간 근무한 경력으로 해서 공개되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는 2년 뒤 이북 5도청 3층 소강당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처음 등장하여 이런 이야기를 했다.

 
  “金 부자 별장은 전국 명승지, 산 좋고 물 좋고 온천 좋은 곳이면 없는 곳이 없어요.
숫자상으로 80개나 됩니다.
이 별장을 지을 때 국내에서 만든 자재는 별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물, 시멘트, 벽돌만 북한 것을 사용했어요.
기타 모든 것은 외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했습니다.
대부분은 일본의 조총련을 통해서 수입해온 것이지요.
일본의 히다치 제품이 제일 많았습니다.
별장은 하나 당 수십만 평을 차지하고 있어요.
한 개의 별장규모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정도는 됩니다.
이곳을 경비하기 위해 2개 내지 3개 중대가 주둔하고 있습니다.

  별장 밖에서는 이들이 경비를 맡고 있고 별장 안엔, 아가씨들이 배치되어 있어요.
큰 별장 같은 경우엔 40명, 작은 별장엔 30명 정도의 아가씨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어요.
이 아가씨들은 전국에서 뽑혀온 처녀들입니다.
나이가 18세에서 25세까지이지요.
25세가 되면 이곳에 더 있고 싶어도 있을 수가 없어요.
25세가 되면 제대를 시키는데 사회로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아가씨들을 경호원들 하고 결혼을 시킵니다.
25세 된 아가씨들의 사진을 10개 정도 탁자 위에 쭈욱 엎어 놉니다.
경호원 중 나이순으로 총각을 뽑아 이 엎어놓은 사진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해요.

  그걸로 일생의 배우자가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러한 배우자 선택을 경호원들이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어요.
‘수령님과 지도자께서 중매해 주는 이런 영광이 어디 있느냐’는 식이죠.
이 여자들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일성, 김정일을 곁에서 모신다고 해서, ‘그보다 더한 영광이 없다’는 정도입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취미는, 이 아가씨들과의 사랑 놀음 이외에도 사냥과 낚시를 즐겨합니다. 

  별장 터의 면적을 수십만 평씩 잡은 것도 사냥을 위해서입니다.
사냥터에 나가면 꿩이 수 만 마리에요.
별장 주위의 넓은 빈터에 콩을 몇 정보씩 심어 놓았다가 가을이 되어도 수확을 하지 않아요. 콩이 마를 대로 말라 떨어지면 꿩들이 먹이를 먹기 위해 다른 곳에 가지를 않습니다.
그 다음에 金父子는 자동차를 타고 엽총으로 꿩을 사냥하는 것이지요.
노루, 사슴 등도 몇 십 마리씩 가두어 놓았다가 두 사람이 사냥을 나갈 때면 풀어 놓죠.”
 
 

  朴 대통령이 피살된 뒤 청와대집무실과 2층 침실을 정리하던 직원들은
집무실에 붙은 화장실의 변기 물통 안에서 벽돌 한 장,
침실의 변기 물통 안에서 벽돌 한 장씩을 발견했다.
이 벽돌은 물을 절약하기 위하여 그가 직접 넣어둔 것이었다.
 
집무실 변기에 그렇게 한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오해를 부를 수가 있겠지만
아무도 안 보는 침실의 변기물통에도 벽돌을 넣어둔 것은
朴 대통령의 자신에 대한 엄격성을 보여주었다.
  인간 朴正熙와 인간 金日成의 이런 차이는
그대로 오늘날 남북한 주민들의 삶 속에 선명한 明暗으로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댓글 1

  • 2009년 12월 2일 오전 12:40

    박정희 시대에는 그를 싫어하고 김영삼씨를 좋아 하였는데 이글을 읽고는 물론 그동안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민 다시한번 박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국부라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좋은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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