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트루먼과 맥아더 [6]

2009. 12. 19. 오후 2:48:22

글자
치명적 간격 80km

  
모택동의 참전으로 한국의 운명이 또 다시 바뀌게 된다.
통일의 꿈은 물거품 되고
그해 여름처럼 또 다시 국가적 생존을 건 투쟁의 시기를 맞게 된 것이다. 
 

6·25 전쟁의 전개과정을 보면
쌍방이 비슷한 방식으로 실수와 성공, 그리고 기사회생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기사회생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오만해진 맥아더의 치명적 오판으로 중공군의 기습을 허용한 것이다.
 
 
이번에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반대로 기사회생하여 재공세를 펴고
유엔군과 한국군은 다시 벼랑으로 몰린다.
맥아더는 3.8선을 넘어 북진할 때
미8군을 주력으로 하는 서부군과 미10군단을 주력으로 하는 동부군으로 나누었다.
 
 
서부군은 평양 - 신의주 - 압록강을 향해 진군했고,
동부군은 원산에 상륙하여 동해안을 따라 계속 북상했다.
그 때문에 8군과 10군단 사이에 거의 80km나 되는 간격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간격은 산악지대였는데 바로 그 산악지대를 통해서
중공군이 들어왔고 8군과 10군단 양쪽을 치게 될 줄을 맥아더는 예상하지 못한 것일까.
어쨌던 V자형의 8군과 10군단 진격은 중공군의 대공세를 부른 바보 같은 포진이었다. 
 

그때 모택동이 팽덕희에게 지시한 최초의 작전방침은 수세적이었다. 

 <북쪽 산악지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적군이 평양-원산선을 고수하고 더 이상 북상하지 않으면 우리도 평양과 원산을 공격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엔군의 북진속도가 너무 빨랐던 것도 문제였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넌 10월19일에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했던 것이다.
그래서 팽덕희는 신의주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다.
 
팽덕희는
북부 일부 산악지대와 중국의 통로를 확보하는 것조차 보증하기 어렵다고 모택동에 보고했다.
맥아더에 못지않은 군사적 천재성을 지닌 모택동은
그에 유엔군의 동서 양군의 진격로 사이에 드러난 80km의 간격에 착안하게 된다.
 
 
그 간격을 이용하여 대우회 전략을 쓸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당초의 방어전 계획을 기동전 개념으로 바꾸었다.
방어전을 준비하기 전에 우선 80km 간격의 전기를 활용하여 적을 먼저 공격한 다음
전국(戰局)의 주도권을 잡은 뒤 상황을 봐가면서 공세를 준비한다는 전략이었다.
 

중공군과 한 미군 사이의 최초 교전은 10월25일에 있었다.
그 전날 맥아더는 유엔군에게 총공세를 명령했었다.
그리고 백선엽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과
미 기병1사단이 (기병으로 출발한 사단이지만 이때는 기병이 아님)
청천강을 넘어 운산까지 진출했을 때 중공군에게 역공 당한 것이다.
 
 
중공군은 주로 한국군 부대를 겨냥해서 공격했다.
그 결과 한국군 1, 6, 8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는 데
미 1기병사단도 1500여 명의 전사자와 실종자를 냈다.
한국 6사단은
10월 6일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하여 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직후
중공군의 공세로 물러나고 말았다.
 

11월6일까지 계속된 중공군의 1차 공세로 유엔군의 진격에 제동이 걸렸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유엔군은 청천강 남쪽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중공군은 그 뒤 산악지역으로 숨어버렸다.
 
 
맥아더는 중공군 포로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중공군의 참전병력을 수만명 정도로 과소평가했다.
그러나 그 당시 북한지역에 전개된 중공군은 40만을 육박하고 있었다.
 

불과 열흘 전 웨이크 섬에서
 
중공군의 개입은 없을 것이고, 있다 하더라도 소규모일 것이며 그마저 공군력에 의해 떼죽음을 당할 것”
 
이라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자신 있게 말했던 맥아더는 실수를 거듭했다.
그때 평양-원산선으로 물러나 방어선을 구축했어야 할 맥아더는 오히려 공세를 재개한 것이다.
그리고 맥아더의 그 작전에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걱정이 많았다.
11월7일 영국군 참모총장 슬림 원수는 영국 합참회의에서 아래와 같은 견해를 밝혔다.
 

<유엔군은 한반도에서 가장 좁은 지역(注: 평양-원산선)을 선택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한다(유엔군의 현재 포진은 너무 넓어 방어하기가 어렵고 한국군은 중공군의 첫 공격에 무너질 것이다). 그렇게 하면 중공군도 압록강 남쪽에 머물면서 협상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 
 

  
11월28일: 총공세에서 총퇴각으로

  
11월24일 맥아더는 또 다시 총공세를 명령했다.
언론이 그 공세를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맥아더가 이 작전에 성공하면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낼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맥아더는 북한의 산악지대에 숨어 있는 중공군 병력이 45만 명에 달하고 있음을 알고도
이를 워싱턴에 알리지 않은 채 무모한 공세를 폈을 가능성을 말하는 군사 전문가들이 많다.
맥아더는 당대 최고 유능한 전략가였다.
중공군의 대공세를 유발하여 전쟁을 중공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함정을 팠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트루먼 대통령이 확전과 원폭 사용을 거부함으로써
그 자신이 판 함정에 자신이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엔군은 11월24일 별다른 저항 없이 15km를 진격했다.
그리고 다음날 중공군 45만 명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11월28일은 한국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날이었다.
 
 
중공군 제38군과 42군이 미8군과 10군단 사이의 80Km 간격을 뚫고 남하하여
미8군의 후방으로 돌아 배후를 차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적의 배후를 차단했듯이  
중공군이 유엔군의 뒤에 나타났다는 것은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이날 밤 맥아더는 도쿄에서 긴급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워커 8군 사령관과 알몬드 10군단장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는 미8군의 후퇴와 10군단의 흥남 집결(사실상의 후퇴)을 승인하였다.
대공세 4일 만에 유엔군은 후퇴로 전환하고 만 것이다.
 

따라서 11월 28일의 중공군 작전은 모택동판 인천상륙작전이라 할 수 있다.
그날 밤 모택동은 흥분했다.
그는 팽덕희 앞으로 보낸 전보에서
 
 
<7개 미국과 영국 사단, 5개 한국군 사단을 섬멸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호기가 왔다>
 
 
고 했다. 워싱턴 시각으로
11월28일 오전 6시15분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 각하,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아주 비관적인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이날 아침 백악관 참모회의에서 트루먼은
 
 
“우리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했다”
 
 
고 말을 꺼냈다. 이날 회의에는 작가인 '존 허시'도 배석했다.
존 허시는 뉴요커 잡지에 트루먼 대통령의 근황을 기고하기로 되어 있었다.
트루먼이 존 허시의 동석을 허가한 것이다.
그것은 미국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특혜였다.
그 회의 광경을 허시는 이렇게 썼다. 
 

<트루먼 대통령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볼이 붉어졌다. 흐느낄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조용한, 그러나 용기에 찬 말투로 이야기했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우리는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 가는 수밖에 없다.”>
 
 

트루먼 대통령은
총공세에서 총퇴각으로 급변한 한국사태의 책임을 그 누구한테도 돌릴 수 없는 입장이었다.
참전, 인천상륙작전, 38선 돌파, 맥아더에 대한 신임 등 모든 결정은 자신이 내린 것이었다. 맥아더에게 속았다는 억울한 심정이야 있었겠지만 그런 불만은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걱정했던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된 11월1일에는
푸에토리코 독립투사 2명이 백악관으로 들어와 트루먼 대통령이 2층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경비원을 사살하고 총격전을 벌이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11월 중간선거에서 트루먼의 민주당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1월보다 더 암울한 12월, 그 보다 참담한 새해 1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맥아더의 엄청난 요구

  
11월28일 오후 3시 백악관의 각료회의실에서는 국가안보회의(NSC)가 열렸다.
트루먼 전기의 저자 '데이비드 매클로프'
이 회의가 트루먼 시대의 가장 중요한 회의들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날 아침 맥아더는 워싱턴으로 보낸 전문에서 엄청난 요구사항을 내놓았다. 
 

최대한의 추가 파병
대만의 장개석 군대 투입, 중국의 해상봉쇄, 중국 본토 폭격, 확전의 권한 등.
 
 
맥아더는
 
<나의 군대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타격을 입어 피폐한 상태에 있다>
 
 
<우리 사령부는 능력을 초과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고 했다. 
회의 참석자들이 맥아더를 비판하자 트루먼은 이를 제지했다.
싸움을 지휘하는 장군을 공격하여 적 앞에서 체면이 손상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마셜 국방장관은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한국에서 계속 싸워야 하지만 명예롭게 발을 빼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때이다”
 
 
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중국과 전쟁을 해선 안 된다. 그런 전쟁은 러시아가 깔아 놓은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제한전을 해야 한다”
 
 
고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도
 
 
“우리는 한국에 들어온 중공군을 이길 수 없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 우리는 지탱할 수 있는 방어선이 어디인지를 빨리 알아내야 한다”
 
 
고 했다.
이날 회의는 맥아더의 요구를 전면적으로 거부한 것이다.
한국을 포기해서도 안 되고 확전도 안 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1950년 12월은 미국인들에게 1941년 12월 진주만 폭격 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감이 돌았다. 눈 덮인 한국의 산야에서 미군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중공군에 쫓기고 있었던 것이다.
무적의 해병대도 흥남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승리를 목전에 두었다가 당한 패배라 충격이 더 했다.
한국 포기론이 또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종합토론실◈◈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