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26만 압록강 도하
스탈린은
모택동이 소련의 공군지원 없이도 참전하기로 결정한 데 대하여 크게 감격했다고 한다.
모택동이 중국을 적화하는 데
스탈린은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방해했었다.
이런 자격지심 때문인지 스탈린은 모가 제2의 티토가 될지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었다.
모택동이 어려운 결정을 내린 데 대해서 스탈린은 전폭적인 무기 지원으로 보답했다.
하지만 모택동이 참전을 결정한 데는 야비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는 투항한 장개석 군대 출신 병사들을 한국으로 출병시켜 소모시키는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무기 및 제조기술을 대폭 지원받아
중공군을 세계적 강군으로 만들겠다는 야욕이 있었던 것이다.
소련은 중공군이 출병한 지 3주도 지나지 않아 대포 탄약 등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이 무기들이 중공군이 대공세를 펴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소련 공군기도 1950년 11월 초부터 압록강 상공에 나타나 미군기와 교전하기 시작했다.
소련 공군기도 1950년 11월 초부터 압록강 상공에 나타나 미군기와 교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과 미군은 공중전을 벌이면서도 교전 사실을 대외에 공개하지 않았다.
확전을 피하기 위해 덮어 두기로 서로 암묵적 양해가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중국과 소련은 이후 밀월기로 들어간다.
전쟁 후 1953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제1차 5개년계획을 소련이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아무튼 10월13일 밤 김일성은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서 스탈린으로부터 전문을 받고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중공군의 참전통보를 받고 안도했던 그에게 스탈린은
<중국은 파병을 거부했다. 귀하는 중국이나 소련으로 전면적 철수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대와 무기를 전부 철수시켜야 한다>
고 지시했다. 그때 김일성은 크게 놀라더니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권고를 받은 이상 따르겠다”
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직후 스탈린의 또 다른 전보가 도착했다.
<중국군은 장비가 불충분하지만 조선의 동지들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
는 내용이었다.
10월19일 팽덕희는 4개 보병군단과 3개 포병사단의 압록강 도하를 명령했다.
10월19일 팽덕희는 4개 보병군단과 3개 포병사단의 압록강 도하를 명령했다.
그 자신은
저녁에 참모 1명, 경호원 2명, 무전기 한 대를 실은 지프차로 압록강 철교를 넘었다.
모택동은 반대자들을 설득하여 참전을 결정한 이후 한때 고민에 빠졌다.
10월17일엔 출병부대에 대해서 도하 대기선으로의 진군 속도를 늦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동안 생각을 다시 해봐야겠다”
는 이유에서였다.
최종적으로 도하 명령을 내린 10월19일 모택동은
최종적으로 도하 명령을 내린 10월19일 모택동은
수면제를 먹고 나서도 잠이 오지 않아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섭영진 참모총장 대리가 보고차 왔다.
모택동은 옷을 갈아입고 접견실로 나왔다.
섭 장군이 경례를 붙이고는
“주석에게 보고 드립니다. 의용군은 지금 압록강 도하를 개시하였습니다”
고 했다. 그가 30분간의 보고를 끝내고 돌아가자 모택동은
“지금부터 잔다”
고 하더니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