릿지웨이 장군 등장
미 8군 워커 사령관의 후임은 육군참모차장 매튜 릿지웨이 중장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제82공수사단장으로서 이탈리아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노르망디 상륙전 때는 낙하산으로 적진에 뛰어내린 용장이었다.
그는 발령통보를 받자마자
<준비된 점검목록에 따라 짐을 꾸리고 유언장을 작성했으며, 유산 분배를 결정하고 전선으로 가져갈 사진을 처자와 함께 찍었다>
고 한다.
50代의 릿지웨이는 가슴에 수류탄이 달린 공수부대원 복장을 하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50代의 릿지웨이는 가슴에 수류탄이 달린 공수부대원 복장을 하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한국전선에 도착하자마자 전선을 누비면서 떨어진 사기를 되살려 내려고 애썼다. 릿지웨이 사령관이 장교들에게 맨 처음 명령한 것은 지프의 덮개를 걷도록 한 일이었다.
그는 말했다.
“밀폐된 차는 탑승자에게 안도감과 안이함을 준다. 포장 따위가 총탄을 막아 주지는 못한다. 달아나던 타조가 모래에 머리만 파묻고 안심하고 있는 것과 같은 심리일 뿐이다.”
1951년 1월4일 서울은 다시 중공군 손에 넘어갔다.
릿지웨이는 피란길에 오른 한국인들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쓰려 왔다고 했다.
한국의 겨울 추위는 미군들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릿지웨이 장군은 이들의 사기를 회복시키지 않고서는 반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 맹장은 텐트를 치고 장병들과 행동을 함께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발끝에서 입술까지 언 몸을 녹인 커피 한 잔의 추억을 실감 있게 묘사했다. 아래 소개하는 글은 릿지웨이가 미 8군 소속원들에게 내린 훈령 전문이다.
미군 장교들의 생각과 필력(筆力)을 잘 보여 준다.
<진짜 군인은 모두가 지성인이다.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내가 한국에 온 지난 수주 동안 제8군 장병들의 마음속에 두 개의 절실한 의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는 왜 여기 있는가?’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이다.
8군사령관으로서 나는 모든 장병들이 나의 응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1951년 1월21일자로 8군에 소속되거나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아래와 같은 나의 응답을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첫 번째 질문, ‘왜 우리는 여기에 있는가?’에 대한 답은 간단하고 단호하다. 우리가 존중하는 정부의 합헌적으로 구성된 당무자들이 내린 결정에 의해서 우리는 여기에 와 있다. 유엔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말했다.
“유엔 회원국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임무에 따라서 우리 사령부는 한국에서 군사적 포진을 유지할 것이다.”
더 이상의 논평은 불필요하기 때문에 나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바치고 기대하는 충성심은 이상의 명령에 대한 아무리 사소한 의문이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단호한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아주 심각한 것이므로 우리 사령부 소속원들은 논리적이고 완전한 답변을 들을 권리가 있다. 나의 답변은 이렇다.
나로선 문제가 명쾌하다. 한국의 이런 저런 도시와 농촌을 지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그런 부동산 문제는 부수적인 것이다. 문제는 동맹국 한국의 자유에만 한정되지도 않는다. 한국인들의 지조와 용기가 전쟁 중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꺾이지 않고 있음을 우리가 높게 평가하지만, 한국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것이 더 큰 명분의 한 상징이고 이 대의명분 속에 포함되는 셈이다.
문제의 본질은 서구 문명의 힘,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에서 꽃피도록 하신 그 힘이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패배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인간의 존엄성을 비웃고, 포로들을 쏘고, 시민들을 노예로 삼는 독재세력이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신성하게 보는 민주세력을 뒤집어엎을 것인가이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가 생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시체처럼 사라질 것인가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싸움은 동맹국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자유만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이 논란의 여지없이 명백해진다.
이 전쟁은, 우리 조국 미국이 독립과 명예를 누리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자유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이다. 우리가 바친 희생과 도움은 타인을 위한 자선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기 위한 직접적 자위행동이다.
결론적 분석 : 여기 한국에서 제기된 문제의 핵심은 공산주의냐 개인의 자유냐의 투쟁이며, 우리가 목격한 그 겁에 질린 사람들의 대탈주를 중단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절망적이고 비참한 그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게 할 것인가이다.
이것들이 우리가 싸우는 이유들이다. 일찍이 그 어떤 군사령부의 소속원들도 우리가 직면한 이런 도전을 감당한 적이 없다. 이는 도전이기도 하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 국민들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보여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그리하여 군인이란 직업과 우리를 키워 준 용감한 사람들에게 영광을 돌리자>
천당과 지옥 사이를 오간 한국
점차 트루먼과 워싱턴의 정책전문가들은 맥아더의 보고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가,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일축했다가 중공군이 총공세를 펼치자
갑자기 비관적으로 변해 원폭 사용, 중공 공격을 주장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철군할 수밖에 없다고 말을 바꾸는 것은
패전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라는 평판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트루먼은 육군과 공군의 참모총장을 한국전선으로 보내 현장을 조사하도록 했다.
1951년 1월17일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총장은
한국 시찰에서 돌아와 맥아더와는 전혀 다른 낙관적 보고를 했다.
미8군의 사기가 좋아졌으며 릿지웨이 신임 8군사령관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워싱턴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이후 철군론은 쑥 들어가 버렸다.
6·25 전쟁 중
한국의 운명이 외국정부에 의해서 몇 번이나 지옥과 천당을 오간 사실을
요즘의 한국인들은 잘 모른다.
1951년 1월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건너 수원을 향해서 밀려 내려오고 있을 때
영국이 중심이 되어 캐나다·인도 등 자유진영 소속 국가들을 끌어 모아 중국에 대한 휴전안을 마련하여 유엔에 제출했다.
그 골자는 현 위치에서 휴전, 평화회복을 위한 정치회담, 모든 외국군의 단계적 철수, 남북한 관리행정을 위한 준비, 휴전 후 미국·영국·소련·중공이 참여하는 정치회담을 열어 대만 문제와 중공의 유엔가입을 논의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내심 이 결의안의 내용을 걱정하면서도
우방국 영국이 주도하고 있어 명시적으로 반대하기가 어려웠다.
영국은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전쟁에서 손을 떼고서 유럽 방위에 전념하기를 원했다.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고민에 빠졌다.
이 제안을 거부하면 미국은 우방국과 갈라서게 되고 유엔에서 소수파로 전락할 수가 있다.
유엔의 이 제안을 중공이 수용하면 더욱 큰일이다.
현 위치 휴전이란 수원 이남까지 중공군과 북한군이 진출한 상태의 휴전이므로
서울이 공산군 수중에 넘어감은 물론이다. 이는 사실상 남한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애치슨은 중공이 유엔의 이 제안에 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이 제안을 지지하자고 설득했다.
미국이 그 휴전안을 지지하자 유엔은 1951년 1월13일 휴전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중공은 에치슨이 확신했던대로 4일 후 이 제안을 거부했다.
애치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중공이 이때 휴전안을 받아들였으면 한국의 수도권은 북한 측으로 넘어가 버린 상태에서 휴전했을 것이다.
공산측은 휴전협상에서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을 절대로 내놓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중공이 유엔의 그 제안을 거부한 이유는
승승장구하던 당시 전황에 고무되어
한반도에서 미군과 유엔군을 완전히 쫒아 내고 공산통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중공에 휴전을 제안했던 영국과 유엔회원국들도 중공이 거부하자
미국 노선으로 복귀하여 2월1일 유엔이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에 동참했다.
한국의 운명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지옥까지 갔다가 생환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