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1 주간 목요일. 마태오 6,7-15
어떤 어르신 한분이 성당에서 한 시간 내내 부동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 행동을 그동안 자주 지켜본 신부님이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하느님께서 무슨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그 어르신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느님은 말씀을 안 하십니다. 듣기만 하십니다.” 그러자 다시 신부님이 물어봤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말씀을 드립니까?” “저도 말을 안 합니다. 듣기만 합니다.” 라고 답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당신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들처럼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라고 말입니다. 가끔 개신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주눅들기 쉽습니다. ‘이햐~ 참 말 잘한다..’ 하고 말이죠. 하지만 내용은 별로 없고 기복적인 부분이 많은 것을 보면 진정한 기도가 뭘까? 하는 것이 아쉽기도 한데요. 마찬가지로 진정한 기도를 바라는 우리는 과연 무슨 기도를 바쳐야 할까 고민합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아무것도 몰랐던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7개의 청원의 기도가 합쳐진 이 기도를 이젠 몰라서 못 바치는 사람은 없게 되었습니만 우리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젠 그저 입을 오물거리며 이야기 하는 것보다 진정 당신의 음성을 들으려는 자세가 더 중요하리라 여겨집니다.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기도에는 4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내가 이야기 하고 당신은 들으시고, 둘째는 당신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듣고 셋째는 둘 다 말하지 않고 둘 다 듣고, 마지막으로 둘 다 말하지 않고 둘 다 듣지 않고 말입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침묵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런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린 무언가를 계속 이야기 하여야만 바쳐야만 한다고 여기시지는 않으셨는지요. 우리의 바램을 모르실 분이 아니신데 우린 자꾸만 뭔가를 되내이고만 있습니다. 그러자니 나의 목소리 때문에 하느님의 소리가 가리워지는 불상사를 맞이하곤 합니다. 모든 행복은 들을 때 시작됩니다. 오늘도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실 것입니다. 과연 그 안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헤아려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린 그만큼 당신께 가까이 가 있는 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