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성탄 대축일.
사람은 항상 자신의 머리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합니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공부를 잘하고 많이 한 사람일수록 질문을 많이 하는 것은 자기 머리로 그 사항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이 사건은 그저 묻는다고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머리를 넘는 신비의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인인 안셀무스는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사람은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라고요. 아무리 믿지 않는 사람이 머리로 신앙에 대해 알려해도 그 출발이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라는 말씀처럼 처음에 창세기를 통해 그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오늘 그동안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기 구유의 모습으로 우린 그 광경을 또 지켜봅니다. 그런데 우린 미니어쳐 같이 이쁘게만 장식되어 보이는 저기 구유 앞에서 기도도 하고 있지만 실은 굉장히 처참하고 불쌍한 장면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사실 애를 낳을 방도 없었지요, 아기가 놓인 곳도 짐승의 여물통이었습니다. 이건 축하받을 장소라 보기엔 너무 비천하고 왕이 되어 오실 분의 탄생처라고 하기엔 요즘말로 너무 굴욕적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구하러 오실 임금님이 그 좋은 곳을 마다하고 베들레헴 시골,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어야 했을까요? 우린 이제 교리에서 가르치는대로 대답만 잘하는 단순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이 왜 그러셨을까? 하고 자꾸 물어보는 자세가 우리의 신앙을 계속 앞으로 성장케 해줍니다. ‘말씀이 어떻게 사람이 되셨을까? 그리고 주님은 왜 이런 어려운 곳에서 태어나셔야 했을까?’ 라고 자꾸 물어보는 속에서 시간의 유한함에 갇혀있는 우리가 영원의 존재로 나아가는 공손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공손함은 근원에 대한 진지함입니다. 이 자세는 그분의 신비에 대한 접근을 더 잘할 수 있게 해주고 물음 속에서 당신의 응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린 매년마다 당신의 신비를 묵상합니다. 이번 성탄절에서 당신의 탄생신비는 어떻게 다가오십니까? 이제 그 답을 당신께 말씀드리십시오 주님은 그 답을 기다리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