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11주일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오리새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모두 다 아는 작품이죠. 헌데 여기서 주요하게 볼 점은 정작 미운 오리라고 불리운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처음에는 몰랐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백조의 새끼인지 알았다면 어릴 때부터 남을 따라하거나 우울해하지 않았겠지요. 내가 언제 피는 꽃 같습니까? 꽃이란게 봄에만 피지 않지요. 계절마다, 간절기에도 핍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내가 누구인지, 언제 피는 꽃인지 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지금의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 수 있을텐데요.
복음에 “어떤 사람이 씨를 뿌려” 놓습니다. 하지만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 지 모른다” 고 나옵니다. 즉 앞서 내가 어떤 꽃인지 모르는 것처럼, 내가 어떤 씨인지, 언제 자라는지 모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모르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무작정 남을 따라 하나요? 아니지요. 바로 나다움을 찾아야 합니다. 나다울 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하면서 나는 어떤 꽃을 피워낼지, 어떤 열매를 맺을지 알아갑니다. 그러면서 준비할 수 있지요. 1독서에는 향백나무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성경에서 일흔 번 정도 나오는 향백나무는 소나무과의 식물입니다. 키가 30미터나 자란답니다. 이사야서 35장 2절에 ‘레바논의 영광’ 이라고 했듯이, 오늘날 레바논 국기에는 향백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워낙 목질이 견고하고, 곧게 자라기에 건축재로 쓰이고요. 향백나무 기름은 곰팡이나 좀을 보호한답니다. 그래서 힘과 권능을 상징하지요. 참으로 잘난 나무입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키 큰 풍채 때문에 ‘자만심’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그에 반해 겨자씨는 자신이 작은 줄 압니다.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물론 복음에는 약간의 과장은 있습니다. 겨자는 나무가 아닙니다. 풀입니다. 새가 날라와 깃들만큼 크진 않습니다. 하지만 작다고 볼 품 없진 않습니다. ‘작은 씨’가 나중에 커진다는 관용적 표현을 쓰신 이유는 주님을 통한 하느님 나라의 변화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상하는 수준에서 머무는 변화가 아닌, 그 이상을 말씀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변화란 그렇지요. 자신의 예상치를 벗어나고요. 한계치가 없기에 거기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지금에만 머물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준비하시는 지, 정작 나는 무엇을 품고 있는 지를 기도 속에서 잘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내가 만나는 것들이 평범함인지 그 안에 주님의 기적이 함께 계시는 지 알 수 있는데요. 지금의 세상을 그리 평이하게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