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의 회개(悔改)
’사랑(愛)’은 참으로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회개(悔改)’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회개가 바로 사랑이며, 그것은 다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루가 복음 16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부옹(富翁)과 거지 나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부옹은 자색 홍포(紅袍)와 마(麻)로 지은 옷을 입고 매일 호화로운 연회를 엽니다. 나자로는 전신이 상처가 나 있는데, 그는 부옹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얻으려고 희망하고 있는 처지이고, 개들이 다가와서 그의 상처를 핥곤 합니다. 어느 날 부옹은 이 세상을 떠나서, 지옥(陰間)에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후회하고, 기도도 하지만,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루가 복음서 16장, 19절 이하 참조)
마르코 복음 1장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엄재(嚴齋)를 지키신 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면서, 내던진 첫 말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福音)을 믿으시오!(마르코 복음서 1장 15절) 회개는 예수님의 복음 선포 말씀 가운데서 반복되는 외침입니다.
유태교의 랍비 부남(Rabbi Bunam)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류가 지은 제일 엄중(嚴重)한 잘못은 범죄(犯罪)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 어디서나 회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다. 그 까닭은 바깥에서 오는 유혹(誘惑)이 너무 큰 반면에, 내면의 굳은 의지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회개는 희생을 요구하며, 희생에는 고통이 따른다.
회개와 관련하여, 우리는 마음의 상태를 대략 3가지로 열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회개는 일생에 거의 한 번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수도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수도회에 입회하고, 혹은 성직(神職)을 수여 받으면, 그 때 이미 회개가 이루어 진 것이다. 둘째의 마음 상태: 그렇다. 우리는 회개가 필요하다. 정객(政客)들은 회개해야하고, 불의(不義)하게 돈을 번 사업가들도 회개해야하고, 교우들도 회개해야하고, 교회 인사들도 회개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회개할 사람은 그들이지, 내가 아니다. 세 번째 마음 상태: 나는 그렇게 엄중(嚴重)한 죄를 짖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회개해야한단 말인가?
마태오 복음서 20장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우두머리(領袖)가 되려는 사람은 먼저 다른 사람들의 종(奴僕)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人子)이 온 것은 다른 이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이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생각해 보자. 수도생활 가운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할애하였는가?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섬김을 받았는가?
2000년 전, 예수께서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무겁고 힘겨운 짐들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메우고 자신들은 그것을 나르는 데 손가락도 대려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성구갑을 넓적하게 하고 옷단의 술을 크게 한다. 그들은 잔치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좌석을 차지하는 것을 좋아하며, 또한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고, 선생님 혹은 지도자 혹은 아버지라고 불린다. 오늘날 교회의 수도자와 이천 년 전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들 사이에 혹시 여러모로 비슷한 점은 없지 않는가? 여러분은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마십시오.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질 것입니다.(마태오 복음서 23장 1절-12절 참조)
루가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남을 심판하지 마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심판 받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불의 하다고 단정하지 마시오. 그러면 여러분도 불의 하다고 단정 받지 않을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도 받을 것입니다.(루가 복음서 6장 36절-38절 참조) 교회 안에서 몇 명의 수도자가 비판을 하지 않고, 심판하지 않고, 잘 용서하고, 잘 베풀까?
오늘날의 수도자는 대학에 진학한다, 박사학위도 취득한다, 지식도 있고 학문도 있다. 언변도 있고, 능력도 있어서, 전문가의 자리에 앉는다. 높은 대접도 받고, 큰 건물에 출입하며, 좋은 음식과 술을 대접받는다. 거지 나자로와 같은 사람들은 일찍이 그들의 뇌리 저 밑에 자리하여 잊혀진 존재이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 자신의 입을 빌어 우리를 상기(提醒)시킨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들에게나 선한 사람들에게나 당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들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여러분이 무슨 상을 받을 가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여러분의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더 낫게 한단 말입니까?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습니까?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5장 43절-45절) 이를 현대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정객(政客)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습니까? 수도자여! 그대가 그들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그대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충실합니까? 그대는 수도(修道)와 복음 선포(傳敎)의 뜻이 확고합니까? 그대가 말하고 행하는 것(所言所行)이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해 보입니까?
사순절(四旬齋期)에 교회는 모든 이들이 회개(悔改)하도록 상기시킨다. 수도자여, 그대는 회개의 자료를 가지고 있는가? 만일 없다면, 예수님의 다음 말씀을 경청하기 바란다: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5장 48절 참조)
* 이 글을 쓴 이가 붙인 제목이 {수도자의 회개(修道人的悔改)}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수도자 혹은 성직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스도를 인생의 길잡이로 삼고,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이 사순절에 한번쯤 옷깃을 여미고, 자신을 추스려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글에서 좀 래디컬(radical)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도 눈에 띄겠고, 또 어떤 부분은 한국교회의 현실과 썩 부합되지 않는 면도 보일 수 있겠다. 또 다른 편에서 보면, 이 글이 래디컬한 면이 보인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역자 자신이 스스로를 돌이켜 보아도, 사실 내 자신이 너무 달콤하고 입에 맞는 것들을 섭취하는데 길들여져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쪼록, 이 작은 한편의 글이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을 돌이켜보고, 혹시 소홀한 점은 없는지를 반성하는데 작은 채찍이라도 된다면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겠다. 여러분 모두 뜻 있는 사순절을 지내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이 글은 필명 팡구우(方谷)가 이 타이완에 있는 天主敎輔仁大學(Fu Jen Catholic University)에서 발행하는 격주간지 益世評論(Catholic Observer a Biweekly)(第257期,2001년4월1일자) 4쪽에 기고한 원제 ’修道人的悔改’입니다.(양재오 번역, 2001/04/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