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7주일]포도밭 비유 (마태 21,33-43)

2017. 10. 8. 오전 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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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7주일]포도밭 비유 (마태 21,33-43)

[주일복음(가해) 11-10-02] - 연중 제27주일 / 군인주일(마태 21,33-43)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포도밭인 이스라엘 집안을 두고 재앙을 선포하는 노래를 부른다. (이사야 5,1-7)
1 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2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3 자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나와 내 포도밭 사이에 시비를 가려 다오! 4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5 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리라. 6 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어 가지치기도 못 하고 김매기도 못 하게 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올라오게 하리라. 또 구름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7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


바오로 사도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라고 한다. (필리피 4,6-9)
형제 여러분,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8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9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악한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를 드시며,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연중 제27주일 제1독서 (이사야 5,1-7)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4ㄷ)

 

이사야가 예루살렘에 거주하며 예언 활동을 펼쳤는데,

첫째 시기가 요탐의 치세(기원전 740~735) 동안이다.

 

요탐의 치세 때에 남부 유다는 풍요로움과 가난을 동시에 겪었다.

그만큼 사회 정의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대목이 이사야서 2~5장이다.

 

제1이사야(1~39장)중 첫째 예언(2~12장)은 남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잘못을 징벌하시기 위해 여러 민족을 끌어들이신다.

그러나 징벌의 도구로 선정한 민족들이 이 사실을 잊고

만용을 부리자, 하느님께서 그들도 응징하신다.

 

징벌을 받은 이스라엘에는 남은 자들 소수가 하느님께 충성을 보일텐데,

이들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루신 이 모든 위업, 곧 이스라엘의 징벌과

이민족들의 심판과 남은 자들을 통한 이스라엘의 회복

메시아 왕국이라는 종말론적 희망으로 이루어진다.

 

오늘 독서는 죄지은 이스라엘을 징벌하시기 위해 잘못을 지적하는 대목이다.

 

주님의 포도밭에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만 들포도가 맺었다는 비유로서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빗나간 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지적한다.

 

"자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나와 내 포도밭 사이에 시비를 가려 다오!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5,3~4)  

 

이사야서 5장 4절(ㄷ)의 말씀은 이미 5장 2절에도 나온 바 있다.

이 구절은 포도 확(술틀)을 만들면서 주인이 내심 바라고 있는

자연스런 희망을 말해준다.

'좋은 포도'에 해당하는 '아나빔'(anabim) '예나브'(yenab)의 복수형으로서

잘 익은 포도 열매를 의미한다.

 

이사야서 5장 2절에서 '좋은 포도 나무'에 해당하는 단어는 단수형이고,

'좋은 포도'에 해당하는 단어는 복수형으로 나오는데,

전자는 이스라엘 집안 그 자체를 가리키며, 후자는 그들이 삶을 통해 맺는

갖가지 아름다운 삶의 열매들을 가리킨다.

 

이사야서 5장 7절에서 이것은 공정 정의로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주님께 이스라엘 집안은 '좋은 포도나무'로서 그 자체로 기쁨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 익은 열매,  그가 바라시는 착한 행실들로 열매를 맺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이사야서 5장 4절(ㄷ)에서 '바랐는데'에 해당하는 '와에카우'(waeqau)의 원형

'카와'(qawa) 바라보면서 참을성있게 기다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욥기6,19;7,2).

 

특히 이사야서 5장 2절과 4절(ㄷ)에서는 강조형으로 사용되어

오랜 세월을 두고 당신께서 몸소 선택하신 이스라엘 집안이

선한 삶의 열매를 맺기를 희망하고 또 고대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서 5장 4절(ㄷ)의 후반부 '좋은 포도나무' 이스라엘 집안이

실제로 맺은 삶의 열매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들포도'에 해당하는 '뻬우쉼'(beushim; wild grapes)은 겉모양으로는

포도 열매 같지만, 실제로는 크기가 작고 딱딱한 야생 포도로서

쓰고 신 맛이 나며, 심지어 이들 중에 어떤 것은 약하지만

독을 품고 있는 해로운 것이다.

 

이러한 열매는 그냥 먹을 수 없음은 물론, 포도초나 포도주도

만들 수 없는 무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사야서 5장 7절에서 이것은 피흘림(포학)과 울부짖음으로 해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집안이 주님 대전에서 맺은 삶의 열매는

주님께 전혀 기쁨을 드리지 못했으며, 오히려 땅만 버리는

무익하고 악한 것들 뿐이었다.

 

이러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은 이사야서 1장 2절에서 4장 1절까지

이미 구체적으로 묘사되엇다.

 

이러한 삶의 열매들은 남부 유다의 전반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이지만,

주로 지도층 인사들, 상류층 인사들이 저지르는 죄악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사야서 5장 4절에서 강조하는 것 주님께서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라면서 오래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뭔가 이루어질 일을 참을성있게 고대하면서 희망하는 사실을

나타내는 단어인 '카와'(qawa)를 사용하여 주님께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얼마나 큰 기대감을 가지고 오랜 세월에 걸쳐 그들이 공정과 정의를

맺기를 기다리셨는지를 나타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완료형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러한 기다림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님의 인내가 이제 끝났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분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오래 참으시는 속성을 지니신 주님의 인내가

끝났다는 것은 그 인내의 대상이 이제 심판만이 남아 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이사야서 5장 5절과 6절에서 이러한 심판에 대한 선언이 시작되고 있다.




나는 하느님께서 당신 포도밭에 심어주신 좋은 포도 나무였는데,

아직도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 좋은 나무인가?

 

나의 포도 나무에 달린 열매는 질좋은 포도인가,

쓸데없고 악표양인 들포도인가?




 연중 제27주일 복음(마태21,33~43)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자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버렸다."  (35~39)

 

'소작인들'로 번역된 '게오르고이'(georgoi; tenants; husbandmen)

'게오르고스'(georgos)의 복수 주격으로서, 농토를 일정 기간 차용하여

일정한 비율의 세를 내고 농사를 짓는 소작농들을 가리킨다.

 

여기 포도원의 소작인들은 이처럼 주인과 계약을 마친 일꾼으로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 혹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한다

(마르12,12; 루카20,19).

 

마태오 복음 21장 35절에는 이 소작인들이 행한 악행이 세 가지로 묘사된다.

그리고 여기서 사용된 동사들이 모두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단어들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핍박받은 종들은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예언자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매질하고'로 번역된 '에데이란'(edeiran; beat) '데로'(dero)의 부정 과거형인데,

구약 성경 희랍어 번역본인 70인역(LXX)에서는 '제사에 사용되는 희생 제물의

가죽을 벗기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레위1,6; 2역대 29,34; 35,11).

 

말하자면, '데로'(dero)맞지 않아도 될 매를 맞는

희생적 고난의 의미가 들어있는 단어이다.

 

마태오 복음 21장 35절에서도 종들이 소작인들에게 맞는 것은

자신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제사에서

사용되는 동물들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이 되는 것과

같은 희생을 말한다.

 

그리고 '죽이고'로 번역된 '아페크테이난'(apekteinan; killed)

'아포크테이노'(apokteino)의 부정 과거형이다.

 

'아포크테이노'(apokteino)'죽이다'는 의미의 동사 '크테이노'(kteino) 앞에

강조하기 위해 '아포'(apo)라는 전치사가 결합되어 처절한 죽음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본문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겪게 될 순교적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로 번역된 '엘리토볼레산'(elithobolesan;

stoned)'리토볼레오'(lithoboleo)의 부정과거형으로서

'돌을 사람이나 짐승에게 던지다'는 뜻이다.

 

특히 신약 성경에서는 의로운 박해를 받는 예언자나

성도들이 고난을 받는 모습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루카23,37; 사도7,58.59).

 

여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종들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들을 사악한 방법으로 계속 박해하는 것으로 묘사된 소작인들

바로 그 자신들이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이제 마태오 복음 21장 36절에는 주인이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내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다시'로 번역된 '팔린'(palin; again)

한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음을 가리킨다.

 

주인의 종들을 잔인하게 죽은 소작인들을 즉각적으로 심판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자비로운 주인은 소작인들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더 주고 있다.

 

'많은'으로 번역된 '플레이오나스'(pleionas; more than)

'플레이온'(pleion)의 형용사 비교급으로서, 보다 많은 수의

종들이 파견되었음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주인으로 비유되고 있는 하느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비유되고 있는 소작인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인내하시면서, 그들이 뉘우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또 한번의 기회를 허락하셨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 큰 사랑을 가지고 그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그러나 완고하고 사악한 소작인들은 자신들에게 베풀어진

주인의 사랑과 인내를 저버리고, 처음처럼 주인이 보낸 종들을

무참히 살해하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의 아들은 존중해 주겠지'라는 마음으로

주인의 아들을 보내게 된다.

 

마태오 복음 21장 37절에서 '마침내'로 번역된 '휘스테론'(hysteron;

last of all)어떤 일의 과정에 있어서 마지막 수단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단어로서, 최후의 결단을 내리는 주인의 비참한 심정을 가리킨다.

 

여기서 '존중해 주겠지'로 번역된 '엔트라페손타이'(entrapesontai;

they will respect)'엔트레포'(entrepo)의 미래형으로서,

'엔트레포'(entrepo)'~안에'라는 의미가 있는 전치사 '엔'(en)

'돌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트레포'(trepo)의 합성어로서

'빙 돌다', '방향을 바꾸다'는 뜻을 가진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존경하다'는 뜻과 '부끄러워 하다', '무시하다'

두 가지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완고하고 사악한 마음이 바뀌어,

예수님께 대해 공경해 줄 것을 바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기대감이 들어 있다.

 

특히 시제가 미래라는 것은 악한 소작인들의 변화된 모습을

기대하는 주인의 심정을 생생하게 잘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21장 38절 이하에서 주인의 아들을 상속자라고 하면서

소작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리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고자 한다.

 

여기서 '상속자'로 번역된 '클레로노모스'(kleronomos; heir)

첫번째 의미 '기업','유산', '유업'(heritage)이다.

 

구약 성경에서 '유업'의 뜻을 가진 '나할라'(nahalah)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을 가리키며,

이 땅은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분배되었다(신명20,16; 21,23).

 

이스라엘 백성은 각 지파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하느님께서 주신

유업으로 알고, 자기 지파 안에서만 상속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바빌론 유배기를 통해 가나안 땅의 유업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유업을 희망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의인들이

메시아가 도래할 때 갖게 될 것으로 믿었던 몫이었다(다니12,13).

 

이 유업에 대한 희망은 메시아 대망 사상과 연결되어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할 때 새로운 유업을 가질 것을 기대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이러한 유업을 희망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유업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영적으로 이루어졌다(갈라3,16).

 

그러나 악한 소작인들로 비유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믿음으로써 영적인 유업을

차지하는 대신에 그를 맞서서 죽이려고 했다.

 

그 원인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메시아관이 죄에서 구원을 주시는

영신적 메시아관이 아니고, 자신들을 현실적인 고난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아관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급급하여

영적인 유업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크나큰 잘못을 범했던 것이다.



10월2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 마태21,33-43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마태 21,33).”


여기서 ‘어떤 밭 임자’는 하느님입니다.


‘소작인들’은 비유 안에서는 유대인들, 또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뜻하지만,


넓은 뜻으로는 ‘하느님의 백성’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왜 ‘소작인들’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아마도 유대인들이 소작인들처럼 살고 있음을 꾸짖으시기 위해서


그들을 소작인들이라고 표현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작인들은 밭 임자와 맺은 계약대로만 일하면 그만입니다.


그들이 일하는 밭은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소작인들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아버지의 밭은 곧 자녀들의 밭이고, 아버지의 일은 자녀들의 일입니다.


자녀들은 ‘나의 밭’에서 ‘나의 일’을 합니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마태 21,34-36).”


 


여기서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기가 싫어서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듣는 것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비유의 내용에서 소작인들이 종들을 죽인 것은 소작료를 내기 싫어서입니다.


내야 할 소작료가 너무 많다고, 즉 밭 임자가 부당하게


너무 많은 소작료를 요구한다고(착취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소작인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너무 적은데,


자기들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것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하느님께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소작인들을 자녀들로 바꿔서 생각하면, 밭 임자가 종들을 보낸 것은


자녀들의 일을 도와주고 격려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이라면 종들을 환영하고 잘 접대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37-3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또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에서도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잘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주인의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구원을 받기는커녕 구세주를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실제로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안 믿었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께 충성을 바친다고 한 일이었지만,


어떻든 결과적으로 하느님께 반역죄를 지은 일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4-17).”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공동 상속자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나라이고, 아버지의 집은 우리 집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인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의 모습은,


자기가 아들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소작인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이 말에서 ‘아버지’로 번역되어 있는 단어는 원문에서는 ‘당신’입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는 성실하게 의무를 다 수행했는데,


아버지 쪽에서는 아무런 보상도 주지 않았다는 큰아들의 말은,


마치 소작인이 부당한 노동을 시키는 주인에게 항의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 큰아들을 아버지는 이렇게 타이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하느님은 우리에게 일을 시키고 품삯을 주는 고용주도 아니고,


땅을 빌려주고 농사를 짓게 한 다음 소작료를 받아가는 지주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아버지의 사랑 속에 머무르는 ‘삶’이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삶’입니다.


결코 소작인과 같은 삶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경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신 일은,


무상으로 주신 은총이고 특권입니다(요한 1,12).


이 은총과 특권은 자녀답게 살 때에만 유지됩니다.


소작인처럼 사는 사람은 이 은총과 특권을 자기가 스스로 버리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자기 스스로 자녀의 자격을 잃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주님의 포도밭

혼인 잔치와 포도밭의 비유는 하느님의 나라를 비유하시는 예수님의 단골 메뉴입니다. 그만큼 하늘 나라를 잘 표현하는 신학적인 깊이가 있는 비유입니다.
농부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밭을 만듭니다. 자신이 손수 공들여 만든 그 포도밭은 자신의 혼이 담겨 있는 자식과도 같은 것이고, 마치 혼인 예식에서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신부와도 같습니다. 그렇게 정성이 담긴 포도밭에서 농부는 당연히 좋은 결실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 포도밭은 주인이 기다리는 결실을 안겨 주지 않고, 소작인의 배신이라는 통탄할 결과를 가져다줍니다.
이 간단한 비유 안에 우리 인류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하느님의 끊임없는 사랑과 용서에 온전히 응답하지 못하는 인류의 부족함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이사야 예언서와 예수님의 비유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포도밭 주인이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올라오도록 내버려 두어 황폐하게 놓아두지만, 예수님의 비유에서 포도밭 주인은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다른 소작인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중책을 맡은 하느님의 백성, 곧 교회이고, 그 교회의 중심에는 집짓는 이들에게는 버림받았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하시고, 우리가 구원받을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도구로 부름을 받은 우리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되풀이할지, 아니면 새로운 소작인으로서 마지막 날에 제때에 소출을 잘 바칠 수 있을지는 바로 오늘 우리 자신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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