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5주일] 품삯 (마태 20,1-16)
이사야 예언자는,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사야 55,6-9)
6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7 죄인은 제 길을, 불의한 사람은 제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주님의 말씀이다. 9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이 있듯이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 위에 드높이 있다.
바오로 사도는 삶이 곧 그리스도라고 한다. (필리피1,20ㄷ-24.27ㄱ)
형제 여러분, 나는 20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21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 22 그러나 내가 육신을 입고 살아야 한다면, 나에게는 그것도 보람된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24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27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산 밭 임자와 같다며, 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품삯을 주는 관대한 주인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마태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연중 제25주일 제1독서(이사55,6~9)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6)
이사야서 55장 1~5절에서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풍성하고 값없는 은총으로 초청하시며
메시야를 통하여 구원의 계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음을 밝혔다.
이제 이사야서 55장 6절 이하 13절에서는 주님의 초청에 대한 예언자의
순종 촉구와(6~7절) 주님께서 초청에 응할 자들을 위하여 축복된 약속을
온전히 실현하실 것을 재강조하는(8~13절) 내용이 소개된다.
먼저 55장 6절과 7절은 주님의 초청에 대한 예언자의 순종 촉구를 다룬다.
하느님을 찾고 회개하여 그에게로 돌아오라는 이러한 촉구에는
하느님의 다함없는 풍성한 은혜가 전제되어 있다.
사실 하느님께서 은총을 베풀지 않으시고 구원의 문을 닫아버려셔도
그 누구도 항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죄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문을 넓게 열어 놓으시고,
회개함으로써 그 가운데로 들어오라고 초청하시는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고 권면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구원의 초청도 정해진 때가 있으며, 한 번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을 때가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기회가 영원 무궁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자신에게 기회가 주어질 바로 그 때에 회개하며
주님을 찾으라고 촉구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55장 6절은 복수 2인칭 명령형으로서 앞선 1~5절에서
초청 대상이 되었던 자들을 염두에 둔 명령이다.
여기서 '너희'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든 이방인들을 다 포함한다.
하느님의 구원 초청은 어느 한 개인이나 민족에게 제한적으로 주어지는
좁은 범위의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1티모2,4).
여기서 '찾아라'에 해당하는 '띠르슈'(dirsh)의 원형 '따라쉬'는
원래 발로 밟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동사이다.
이 단어가 제의적 맥락에서는 주님의 성전으로 찾아가서 제사를 드리는
의미(신명12,5)와 더불어 하느님의 신탁을 구하는 의미(1사무9,9)를
내포하고 있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명4,29; 1역대15,13; 16,11).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해, 그리고 나아가서는 메시야의 구속사업을
통해 당신을 만민에게 알리시고, 그들이 쉽게 만날 수 있도록
당신을 공개하셨다.
특히 구약 시대에는 하느님을 찾는 것이 사제를 통해 혹은 예언자를 통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신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통해
만민들에게 널리 전파되었다(2코린6,2).
그야말로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손을 뻗기만 하면
누구든지 구원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불러라'
'가까이 계실 때에'에 해당하는 원문은 '삐헤요토 카로브'(biheyotho qarob)는
'그가 가까이 계실 때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공간적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메시야의 구속사업을 기반으로 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초청하시는 때, 또는 자비롭게 손을 벌리고 모든 이들이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열망하시는 은총의 때를 말한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이것은 그 은총이 중단되는 시점도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시는 그 때가 바로 종말의 때이고, 심판의 때인 것이다.
한편 반대로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는 은총의 문이 열려 있는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부르기만 하면 하느님의 자비롭고 은혜로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
'그분을 불러라'에 해당하는 '케라우후'(qerauhu)의 원형 '카라'(qara)는
55장 5절에서 메시야가 이방 민족을 부르신다는 것을 묘사하는 단어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뉘앙스에 있어서는 두 단어가 차이가 있다.
55장 5절의 '카라'(qara)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 구원으로 초청하신다는 의미이고,
55장 6절의 '카라'(qara)는 자신의 전적인 무능력을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성령 강림 예언과 관련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요엘서 3장 5절ㄱ에 사용된 단어와 같다.
"그때에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으리라."
이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는 자들은 곧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놀라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도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 예언을 오순절 성령 강림 때에 인용하였고(사도2,21),
주님을 부르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과 연결시켰다.
이 예언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예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아니라
전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며 그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함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중 제25주일 복음(마태20,1~16)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요?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5)
한글 새 성경은 '나에게 합당하지'에 해당하는 '엑세스틴 모이'(eksestin moi;
it is lawful for me)의 번역을 생략했는데, 포도밭 임자의 행동의 합법성을
강조하는 뜻이 있으므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내게 합당하지 않느냐?"
(is it not lawful for me to do what i will~?) 라는 뜻이 된다.
원문대로 하면, 자신의 소유를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합당한 행위였다는 의미가 들어있는 것이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의 마음대로
하신다 하여도 그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며, 더군다나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은 절대 공의로우며 인간에게도 유익이 되는 선(善)한 것이기에,
인간이 왈가왈부할 성질이 못된다는 것이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에 해당하는 '호티 에고 아가토스 에이미'(hoti ego agathos eimi;
because i am generous; because i am good)에서 '에고'(ego; i)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독립적으로 사용되었다.
'에이미'(eimi; am)란 동사에 주어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에고'(ego)란 단어를 사용한 것은 후하고 관대하며 선한 자가
바로 포도밭 임자(주인)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아가토스'(agathos)는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뜻도 있지만,
'상대방에 대하여 너그럽다'는 의미도 지닌다.
말하자면, 놀고 있는 자를 고용하여 넉넉한 품삯을 준
포도밭 임자 자신의 행동을 가리킨다.
한편, '후하다고'를 의미하는 '아가토스'(agathos)와 대응되는 단어로서
'시기하는'으로 번역된 '포네로스'(poneros; envious; evil)는
'비열한', '무가치한'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즉 의인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은혜를 베푼 것을
도덕적으로 비열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뜻이다.
비록 늦게 포도밭에 왔지만 동료가 후한 대접을 받은 것에 대하여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마땅한데, 이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우월감을 타인과 비교하여 드러내기를 좋아할 뿐,
하느님의 입장에서 내려지는 크나큰 사랑을 볼 줄 모르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아담과 하와의 본성적 요소가 만드는 세속적인 가치관과 기준은
항상 하느님의 뜻과는 상반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한 안목으로 볼 때, 모든 인간들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얻어 입어야 하는 죄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바라보며,
자기 우월감을 확인하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어리석음에 빠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본문은 바로 세속적이고 본성적인 가치관으로
감히 하느님의 주도권에 대해 판단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확실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마태 20,1-2).”
이른 아침에 포도밭 주인을 만난 일꾼들은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들,
즉 남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앙인들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품삯은 하느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시는 은총을 뜻합니다.
비유의 내용을 보면, 모든 일꾼들이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고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총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주시는 은총은 똑같은데, ‘얼마나 잘 받는가?’는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온전히 잘 받는 사람도 있고,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안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일꾼들을 구한 포도밭 주인은,
아홉 시쯤에도, 또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또 오후 다섯 시쯤에도 장터에 가서 일꾼들을 구합니다(루카 20,3-6).
그는 왜 한 번에 일꾼들을 구하지 않고, 그 일을 계속 반복했을까?
(실제 현실에서는 이런 식으로 일꾼들을 구하지 않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포도밭 주인의 모습은,
포도밭 일에 필요한 일꾼들을 모집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루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이 없어서 장터에 서 있는 모든 사람을 전부 다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일을 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 부르십니다.
신앙인들의 신앙생활은 다 자기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루카 20,6-7).”
맨 나중에 포도밭 주인을 만난 일꾼들은 가장 늦게 ‘부르심’을 받은 신앙인들,
즉 남들보다 늦게 신앙생활을 시작한 신앙인들로 해석됩니다.
그런데 비유의 내용을 보면, 그 일꾼들이 하루 종일 장터에 서 있었던 것은,
일하기 싫어서 그냥 놀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일하고 싶은데도 불러 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게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진리’를 갈망하고 있었지만 그 진리를 만나지 못하고 있다가,
마침내 복음을 만나게 되었고, 믿게 된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된 일은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해서 서서히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 일은 지금도 완성되지 않은 일, 즉 현재 진행 중인 일입니다.
그러니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루카 20,9-12).”
노동시간과 품삯은 비례해야 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닌데,
만일에 신앙생활 시간과 은총은 비례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말은 틀린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노동이 아니고, 구원의 은총은 품삯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의 결과는 구원과 멸망, 이 두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구원이 될 것입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구원이나 더 큰 구원 같은 것은 없습니다.
또 더 적은 구원이나 더 작은 구원 같은 것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더 오래 했다고 해서 더 큰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고 인정되면 똑같은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루카 20,13-16).”
여기서 우리가 흔히 무심코 지나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의 성실성입니다.
비유의 내용을 보면, 그들은 분명히 성실하게 일했고,
늦게 온 사람들보다 일을 더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품삯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자격이나 권한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심판 때에 하느님의 선고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 제기를 할 수 없습니다.
당사자에게도 그럴 권한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한 번 내려진 하느님의 선고는 번복되거나 취소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선고 전에 자비를 간청하는 것뿐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바오로 사도를 만난 스테파노 순교자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크게 기뻐하면서 환영했을 것입니다.
“왜 순교자와 박해자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라고 하느님께 항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박해자였던 사람이 사도가 되고 순교자가 된 것만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그런 성인들만 있는, 그런 나라입니다.
(꼴찌였던 사울이 바오로 사도로 변화되고 첫째가 되어서 온 것을 축하하고,
첫째가 될 수도 있었던 유다가 배반자가 되고 꼴찌가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사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예수님께서 불러 주지 않으시면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언제 받았는지, 또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닌 것이 됩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가 중요할 뿐입니다.
또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 기간이나 성실성을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권한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의 셈법은 우리의 세상 셈법과 사뭇 다릅니다. 자본주의 논리에 익숙한 우리에게 ‘정당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경제 정의의 기초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나중에 와서 적게 일한 일꾼과 먼저 와서 종일 일한 일꾼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는데 이는 우리의 경제 정의와 맞지 않습니다. 비록 포도원 주인과 일꾼이 맺은 계약으로 본다면 같은 품삯을 주는 것이 정당하지만, 먼저 일하러 온 일꾼이 더 많은 품삯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이런 우리의 익숙한 경제 정의를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품삯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양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차별로 느껴지는 품삯일 수 있지만, 하느님께는 같은 무게를 지닌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 사랑을 더 받고 덜 받는 문제는 하느님의 방식이지 인간의 방식이 아닙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는 것이 세상의 잣대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고 전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도가 곧 자신의 삶이고 죽음이 이득이라는 역설을 말하는 것도 세상의 논리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복음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이유는 먼저 복음을 들은 우리가 선점한 구원의 보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마음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기 위함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