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

2017. 9. 16. 오후 8: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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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



우리나라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 몇몇의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그리스도교와 크게 충돌하였다. 결국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천주교는 박해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신해박해(1791년)를 시작으로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의 해인 1984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이들 순교자들 가운데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평신도인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명을 시성하였다. 이에 따라 9월 26일의 ‘한국 순교 복자 대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를 중심으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혜서의 저자는,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며,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라고 한다(지혜 3,1-9)
1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2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3 우리에게서 떠나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4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5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하시고, 그들이 당신께 맞갖은 이들임을 아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7 그분께서 그들을 찾아오실 때에 그들은 빛을 내고, 그루터기들만 남은 밭의 불꽃처럼 퍼져 나갈 것이다. 8 그들은 민족들을 통치하고 백성들을 지배할 것이며,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9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냐며, 어떠한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한다(로마 8,31ㄴ-39)
형제 여러분, 31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32 당신의 친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33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34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셨다가 참으로 되살아나신 분, 또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신 분,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 주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35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36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39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하며, 당신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다(루카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제1독서(지혜3,1-9)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으로 생각되며, 우리에게는 떠니는 것이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1~4) 

지혜서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고, 칠십인역(LXX; Septuaginta; 희랍어로 쓰여진 성경)에만 나오므로, 제2경전(개신교에서는 외경)으로 분류한다. 제 2경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어(희랍어; 헬라어)로 저작된 책은 지혜서와 마카베오 하권뿐이다. 

지혜서의 저작 연대는 BC 50-30년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다인이 쓴 것으로 보인다. 유다교 사상가 필론에 의하면, A.D.1세기 초에 이집트에는 100만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한다.

좀 과장된 숫자이겠지만, 이집트의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유다 백성들; 각 나라에 흩어져 사는 유다 교포들이 사는 곳을 말함)유다인들이 상당히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것이 분명하다. 지혜서는 철학,윤리,신학,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제기된 갖가지 주제들을 다룬 소품 모음집이다. 

저자의 집필 목적은 이집트의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이 헬레니즘 문화가 압도하는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와 그 부근에 살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유다교의 정통교리를 다른 문화에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킬 것인지를 끊임없이 모색하는 토착화(Inculturation)작업의 일환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혜서 저자는 유다교 전통을 거의 모르는 그리스인들과, 저자 자신처럼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헬레니즘에 익숙한 유다인들 에게, 그리스 문화와 사상과 비교하여 유다교 관습과 사상이 훨씬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헬레니즘에서 기원한 우상 숭배와 물질주의적 인생관에 맞서, 유다교의 전통적 믿음과 교리를 수호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일깨워 준다.  

지혜서는 크게 세 부분, 종말의 숙고(1-5장), 지혜의 찬가(6-9장), 역사의 숙고(10-19장)로 나눈다. 첫째, 종말의 숙고(1-5장)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강조한다.

둘째, 지혜의 찬가(6-9장)에서 임금과 권력자들에게 하는 권고, 7장 22-23절에 나오는 지혜의 정신에 담긴 정신의 특성 21가지(완전을 뜻하는 7의 3배수=매우 완전한 숫자), 지혜를 청하는 기도(9장)등이 나온다. 마지막 세째 부분(10-19장)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10장에서는 원조들과 성조들의 이야기, 10장 15절-11장 20절에는 이집트 탈출 사건,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높이 기리는 찬미가(11,26-구원의 보편주의), 가나안 정복,자연,우상,동물 숭배의 어리석음(13-15장),  이집트 탈출 사건과 광야에서의 시련(16-19장)을 두서없이 열거한다.

지혜서에는 특히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돋보이는데,<의인들의 불사 불멸>과 <지혜의 의인화>이다. 

지혜서의 저자는 전통적 인과응보와 상선벌악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그는 의롭게 살고도 현세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 의인들은 비록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죽더라도, 하느님 마음에 들어 죽은 다음에 하느님 곁에서 평화를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이다. 지혜서 저자가 희망하는 것은 죽은 의인의 부활이 아니라 의로운 영혼의 불사불멸이다.

한편, 지혜서에 묘사된 <인격적 지혜>사람 안에 들어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과 일치하게 만드는 그리스도교의 <은총>개념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 가운데 오신 요한 복음의 <육화된 말씀>과도 상통한다. <인격적 지혜>를 성령이나 성자와 동일시하는 것은 성급한 시도이지만, 어쨌든 지혜서에서 신약성경의 삼위일체 신학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던지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다. 하느님께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시고 전능하신데, 왜 이 세상에 악이 범람하는가? 전선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왜 악을 허락(허용)하시는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참으로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착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분이 너무나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당하고, 불의의 사고나 불치병으로 일찍 주고, 끊임없이 나쁘고 못된 짓을 하며, 천상천하(天上天下)유아독존(唯我獨存)처럼 살아 천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 너무나 현세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잘되는 것을 보면, 神은 과연 계시는가? 도대체 神의 공의, 정의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던지면서 불신앙과 회의를 품게 된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소위 신정론(神正論)이라 일컬었다. 일찌기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보다 더 큰 善을 위해서, 보다 더 큰 惡을 예방하기 위해서" 전지하시고 전선하신 하느님께서 惡을 허락하신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안에서 고찰할 것을 설파했다. 

오늘 지혜서 3장의 말씀은 여기에 대한 응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전통적 인과응보(因果應報)와 상선벌악(償善罰惡)의 원리를 확신하고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영원(eternity)에 비교하면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점에 지나지 않고, 잠깐 지나가는 이승의 삶을 마치면 반드시 심판이 있고, 그때에는 종말론적 자리바꿈(자리 전도)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공의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지상에서 비뚤어진 부분을 바로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주시고, 당신의 말씀과 계명에 충실한 이들에게 당신이 약속하신 상급을 반드시 주시고, 의로운 영혼은 반드시 불사불멸이 있음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행에는 상급을 내려 주시고, 악행에는 벌을 주시는 공의(公義)로우신 하느님께서는 불의하고 죄짓고 자신이 신이 되어 안하무인(眼下無人; overbearance) 으로 이승에서 맘대로 산 자들을 가만히 두지 않고, 영원한 심판과 지옥벌로 갚아 주시어, 당신의 의를 바로 세우시며, 당신의 생명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것을 입증하시고, 당신이 천상 천하의 절대 주권을 가지신 분임을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잠깐 살다가 육신 생명을 마치지만, 불의와 불법, 거짓과 오류, 무지와 폭력에 맞서서 하느님의 진리와 의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순교를 통해 그 목숨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되돌려 드린 순교자들처럼, 이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불의와 절망과 억울한 고통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천국의 영원한 복락과 내세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인간성으로는 견딜 수 없는 지독한 고문과 박해와 죽음 속에서도, 내세의 영원한 복락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산 자에게 약속된 선물과, 하느님을 지복지관(至福直觀)하며 영원히 찬양할 수 있는 축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7장 55절 나오는 초대 교회 첫 순교자이신 스테파노  부제의 순교 장면처럼,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 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당신을 위한 고난의 순간에까지 항상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 하느님의 구원과 권능과 나라와 그분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하느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하던 그자가 내쫓겼다.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그자를 이겨냈다.  그들은 죽기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묵시록12,10~11참조)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묵시록21,3ㄹ~4)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복음(루카9,23-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26)

루카 복음 9장 24절과 25절이 앞의 9장 23절과 한 맥락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루카 복음 9장 26절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과 내용적으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의 대상은 예수님 당신을 따르지 않는 무리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부끄럽게 여기면'에 해당하는 '에파이스퀸테'(epaischinthe; is ashamed)원형 '에파이스퀴노마이'(epaischynomai)는  '수치스러운', '오욕'을 뜻하는 '아이스퀴네'(aischyne)'~에 기초하여'를 뜻하는 '에피'(epi)라는 접두사가 붙은 합성어로서 수치스러움과 모욕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을 매우 강조하는 단어이다.

이것을 예수님을 따르는 것 자체를 수치스러움과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서 단순히 감정적으로 부끄럽게 여긴다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을 매우 강도 높게 부인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 역시 이러한 사람을 마지막 때에 수치스럽게 여겨 부인할 것임을 말한다. 원문에는 '그를'에 해당하는 '투톤'(touton; him)이라는 말을 종속절의 맨 앞 부분에 둠으로써 그 의미가 강조된다.

따라서 원문의 구조를 따라 번역하면,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바로 그 사람'을 사람의 아들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가 된다.

원문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러한 어투의 뉘앙스는 당신 자신을 수치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한 아주 단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거부하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종말론적 구원과 심판의 주재자로 다시 오실 때(마태24,30.31) 그들이 아끼고 지키려는 자신의 안정과 위치에 대해 공의로운 심판으로 단죄하시겠다는 단호한 말씀인 것이다.





오늘의 묵상

‘불사의 희망’, 죽음도 꺾지 못하는 희망이 있다면 우리는 그 희망에 목숨을 걸 수 있을까요? 그런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생각이나 기대일 수는 없습니다. 확고한 신념이 생기려면 바오로 사도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뵙고, 수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께서 지켜 주고 계신다는 체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뒤를 따라 불사의 희망,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누구나 저마다 짊어져야 할 삶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책임져야 할 가족, 살기 위해 다녀야 하는 직장, 보기 싫지만 만나야 하는 사람들, 힘겨운 학업, 떨쳐 버리지 못하는 지병, 경제적인 빈곤, 희망 없는 인생, 맞이해야 할 두려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가장 크게 다가옵니다.
배교를 강요하는 이들의 칼 앞에 당당하게 신앙을 증언한 103위 한국 순교 성인들이라고 이런 인생의 십자가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까지 순교자들이 배교의 유혹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자신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행 속에서도 ‘불사의 희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피를 흘리는 순교는 없지만, 삶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땀과 희생의 순교는 요청됩니다. 한두 번 순교하는 마음으로 참고 살 수는 있지만, ‘날마다’ 십자가를 지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삶은 수행의 연속이고, 그 수행의 끝 날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우리가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버릴 수 있고, 날마다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으려고 예수님 뒤를 따라간다는

매일미사 책의 설명은 잘못된 설명입니다.

확신을 얻으려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확신하니까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확신만 있으면 누구나 따라갈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6,41).” 라는 말씀은,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일에도 적용됩니다.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유혹을 만나게 되는데,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들을 물리칠 수가 없고(마르 9,29), 쉽게 무너집니다.

(마음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어도 몸이 따르지 않는 일이 생깁니다.)

순교자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 하나만으로 순교한 것은 아닙니다.

그분들은 평소에 꾸준히 기도함으로써 하느님,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었고,

그 일치에서 힘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순교로 생을 마무리한 분들입니다.

(박해 때 죽었다고 해서 다 순교자로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을 순교자로 선포하려면 평소의 신앙생활이 어떠했는지부터 살펴봅니다.)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일은 사람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이 말씀도 역시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일에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앞장서 가시면서 동시에 옆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기도’는 예수님 안에 잘 머무르기 위한 노력이고,

또 예수님의 도우심을 잘 받기 위한 노력입니다.

 

확신과 기도 외에도 ‘기쁨에 넘치는 생활’을 하려는 노력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에 들어 있는 ‘자신을 버리고’ 라는 말과

‘십자가’ 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길이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걸어가는 길이기 때문에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기뻐하면서 걸어가는 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어서 하나도 기쁘지 않은데, 어떻게 기뻐하란 말인가?”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지만, 지금 말하는 ‘기쁨’은,

저절로 생기는 감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노력해서 얻는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세속 사람들이 말하는 기쁨과 신앙인의 기쁨은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길은, 세속의 기준으로는 재미없고, 따분하고,

지루하고, 괴롭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길을 기뻐하면서 걸어갑니다.

우리는 예수님 뒤를 따라간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고,

믿고 희망하는 것을 향해서 간다는 것을 기뻐하고,

그 희망이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틀림없이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을 믿고 있고,

그래서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 뒤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슨 일이든 투덜거리거나 따지지 말고 하십시오.

그리하여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니십시오. 그러면 내가 헛되이 달음질하거나

헛되이 애쓴 것이 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설령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가 되어

여러분이 봉헌하는 믿음의 제물 위에 부어진다 하여도, 나는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기뻐하십시오.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필리 2,14-18).”

조선시대 박해 때, 선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새 신자가 꾸준히 늘어난 것은, 당시 신자들이 모진 박해와 고난을 겪으면서도

흔들림 없이 기쁨 가득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교회 문을 두드렸는데,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신자들의 ‘기쁨 가득한 모습’이 별처럼 빛났던 것이고,

조선 사회를 인도하는 등불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신앙생활 모습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뒤를 잘 따라가려면 ‘감사하는 마음’도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신 것과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신 것과

당신 뒤를 따라갈 수 있도록 불러 주시고 허락해 주신 것과

구원과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이 길은 붙잡혀서 끌려가는 길이 아니라, 우리가 원한 길이고,

기뻐하고 고마워하면서 가는 길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참을 수 있습니다.

(만일에 기쁨도 없고 감사하는 마음도 없다면, 인내심이 생기기 어렵습니다.

단순히 확신 하나만으로 인내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과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하나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뒤를 따라가는 이 길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져 있는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 구원과 영원한 생명도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이미 시작된 일이고 진행 중인 일이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고,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따라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2010년 9월 19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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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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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일] 품삯 (마태 20,1-16)17.09.24조회 59[연중 제24주일]용서 (마태18,21-35)17.09.17조회 66[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루카 9,23-26)17.09.16조회 58[연중 제23주일] 내 이름으로 모인 곳 (마태 18,15-20)17.09.10조회 55[연중 제22주일] 제 십자가를 지고 (마태 16,21-27)17.09.02조회 56[연중 제21주일] 반석 위에 내 교회 (마태오 16,13-20)17.08.26조회 62[연중 제20주일] 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태오 15,21-28)17.08.19조회 203[연중 제19주일] 물 위를 걸으시다 (마태 14,22-33)17.08.13조회 145[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마태오 17,1-9)17.08.06조회 349[연중 제17주일]밭에 숨겨진 보물 (마태 13,44-52)17.07.29조회 57[연중 제16주일] 가라지 비유 (마태 13,24-43)17.07.23조회 68[연중 제15주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 13,1-23)17.07.16조회 275[연중 제14주일] 내 멍에를 메고 (마태 11,25-30)17.07.09조회 94[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마태 10,17-22)17.07.02조회 149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용서 (마태오 18,19ㄴ-22)17.06.25조회 87[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살과 피 (요한 6,51-58)17.06.18조회 142[삼위일체 대축일] 사랑 (요한 3,16-18)17.06.10조회 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