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대축일] 사랑 (요한 3,16-18)

2017. 6. 10. 오전 6: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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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11일 주일

[삼위일체 대축일]사랑 (요한 3,16-18)


모세가 돌판을 들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가자 주님께서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하고 선포하신다. 모세는,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란다고 아뢴다. (탈출 34,4ㄱㄷ-6.8-9)
그 무렵 4 모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아침 일찍 일어나 돌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나이 산으로 올라갔다.
5 그때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6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8 모세는 얼른 땅에 무릎을 꿇어 경배하며 9 아뢰었다. “주님, 제가 정녕 당신 눈에 든다면, 주님께서 저희와 함께 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백성이 목이 뻣뻣하기는 하지만, 저희 죄악과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당신 소유로 삼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함께하기를 빈다. ( 2코린 13,11-13)
11 형제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자신을 바로잡으십시오. 서로 격려하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고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12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한다. (요한 3,16-18)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17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18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 (탈출34,4ㄱㄷ~6.8-9)

그때 주님께서 구름에 싸여 내려오셔서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 '야훼'라는 이름을 선포하셨다. 주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가며 선포하셨다.  "주님은,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다." (5~6)

'모세와 함께 그곳에 서시어'에 해당하는 '와이트맛체브 임모 샴'(waithyatseb immo sham)은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그와 함께 거기에 섰다'이다.

여기서 '그가 섰다'라는 뜻의 '이트얏체브'(ithyattseb)'서다'(탈출14,13), '대적하다', '등을 돌리다'(2사무18,13)라는 뜻을 지닌 '야차브'(yatsab)의 재귀형이다.

그런데 '야차브'(yatsab)는 단순히 '서다'(탈출32,26)라는 뜻을 지닌 '아마드'(amad)'(굳건히)서다'(탈출33,21)라는 의미를 지니는 '나차브'(natsab)와는 달리 주로 '~와 대적하여 서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동사이다.

따라서 '함께 서다'라는 표현은 주님께서 모세와 한편이 되어 어떤 대상을 대적하여 섰음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함께 선 장면이 주님의 권세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형용할 수 없는 지극한 위엄을 발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달라는 모세의 간구(탈출33,12.13)대한 분명한 응답으로서(탈출34,10.11) 주님께서는 모세와 함께 서서 앞으로 맞게 될 가나안 족들(탈출34,11)과 싸우실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탈출기 34장 5절에서 모세는 백성을 위한 중재 기도를 드리면서 과거에 처음 하느님의 소명을 받았을 때처럼(탈출3,13~15), 자신과 함께 하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백성들에게 선포할 하느님의 자기 계시의 필요성을 호소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에도  역시 하느님의 동행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지금 모세의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서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야훼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탈출34,6).

'주님은,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운 하느님이다'(6)

주님께서는 처음 모세를 부르실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3,14)라고 자신을 계시하시며 그 이름을 '야훼'('예흐와'; yehwa)로 알려 주셨다(탈출3,15).

바로 그 '야훼'께서는 이집트에서 기적들을 행하시고, 홍해 바다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며,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임으로써 그 어느 다른 존재에 전혀 의존하지 않으시는 '(스스로)있는 자'라는 전능하신 주님의 이름 '야훼' 되심을 입증해 주셨다.

이제 주님께서는 자신과 동행하여 달라는 모세의 간구(탈출33,12.13)에 대한 응답으로 다시 한번 그 이름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이 바로 과거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던 그 주님인 사실과 더불어 앞으로도 계속 당신 백성을 인도하여 주실 것을 밝히는 것이다.

또한, 탈출기 34장 6절'하느님'에 해당하는 '엘'(EL)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방의 '신'(신명32,13)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천지(우주)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느님'을 의미할 때에는 '하느님'(EL)의 속성을 묘사하는 형용사들이 수반되는 것이 보통이다.

여기서는 특별히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그 '선하심'의 속성들(탈출33,19; '나는 나의 모든 선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하느님의 속성들 가운데 본절의 '자비하고 너그럽고 분노에 더디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한' 그 속성이야말로 다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들로 회복시키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까지 동행하시겠다고 하신 하느님 당신의 마음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덧셈과 곱셈>

 

둘이 만나서 하나가 된 것이 부부이기 때문에

가정의 달 5월의 21일을 '부부의 날'로 정했다고 합니다.

부부란 하나와 하나가 만나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즉 1X1=1입니다.

만일에 1+1=2가 된다면 그건 그냥 둘이 함께 사는 것일 뿐이고,

일심동체인 부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란 말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건 서로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1X1X1=1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신이 셋이라는 3신론 교리가 아닙니다.

(3신론 교리는 1+1+1=3입니다.

다른 종교 중에는 이렇게 여러 신을 믿는 종교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은 한 분이라는 유일신 교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하느님이라고 믿습니다.

이걸 설명하는 방법은 1X1X1=1뿐입니다.

셋이 완전한 하나가 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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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을 보면

각자 이해관계나 신념에 따라서 정당을 만들어서 정치를 하는데,

그 정당이라는 것이 합해졌다 쪼개졌다 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그건 그들이 곱셈으로 만나지 않고 덧셈으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같은 뜻으로 함께 모여 있어도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집단으로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는 한 몸이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집단은 그냥 모여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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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은 집단이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한 몸입니다.

가족의 기쁨도 내 기쁨이고, 가족의 슬픔도 내 슬픔입니다.

웃어도 함께 웃고, 울어도 함께 웁니다.

이것은 발가락의 통증도 나의 아픔이고,

손가락의 통증도 나의 아픔인 것과 같습니다.

발가락과 손가락은 위치와 역할이 다르지만 그래도 한 몸입니다.

한 몸이란 여러 부속품을 조립해서 완성체를 만든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느끼고, 똑같이 반응하고, 똑같이 함께 사는 것이 한 몸입니다.

 

기계의 부속품을 교환하듯이

신체의 장기나 지체를 새것으로 교환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한 몸은 한 몸입니다.

새로 이식한 장기나 지체가 한 몸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그냥 잘라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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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삼위일체 교리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아버지의 뜻이 곧 예수님의 뜻이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곧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겉으로는 구별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한 분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삼위'가 어떻게 '일체'가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차피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 교리입니다.

인간이 생각해서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계시로 주어진 교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학문으로는 삼위일체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고 '왜?'입니다.

왜 예수님이 하느님인가? 왜 성령도 하느님인가?

왜 세 분이 모두 한 분 하느님이어야 하는가? 왜?

 

대답은 간단합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삼위일체 교리는 등장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의 신앙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은 예수님의 구원사업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그분이 그냥 뛰어난 인간 예언자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인간으로만 존경했다면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생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유대교의 한 종파로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떠나시면서 보내 주신 성령도 하느님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예수님과 아버지가 완전한 하나라는 것을 믿습니다.

그 '완전한 하나' 라는 것이 곧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대축일에 경축하는 것은

그 수수께끼 같은 신비가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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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의 완전한 일치는

우리 인류에게는 구원과 평화와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부부의 완전한 일치는

부부 당사자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큰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국가 공동체의 일치는 국민 모두에게 행복한 일입니다.

인류의 일치는 세계 평화입니다.

 

반대로 분열은 곧 고통과 불행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가톨릭 신자들이 바치는 가장 짧으면서 가장 중요한 기도는 성호경입니다.

우리는 모든 기도가 시작되어지고 마쳐질 때,

또 모든 일이 시작되어지고 마쳐질 때, 성호경을 바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성호경 안에는 하느님은 한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가지고 계신다는 삼위일체의 신앙이 녹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톨릭 신앙 중 핵심이 되는 신앙은

부활신앙과 더불어 삼위일체 신앙을 들 수 있겠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여러분은 삼위일체 신앙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십니까?

또, 삼위일체 신앙을 어떻게 배우셨고,

삶 속에서는 삼위일체 신앙을 어떻게 적용시키시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삼위일체는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지니시면서

동시에 한 분이시라는 신비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34항에서는

삼위일체 신비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이다.”


 

삼위일체에 관한 기초적 증언은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하고

마태오 복음 28장 19절에서 20절을 걸쳐 말씀하십니다.


또,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는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루카복음과 바오로 서간에서도 이와같은

삼위일체적 언급이 발견됩니다.


삼위일체 신앙은 이러한 신약성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2-3세기를 거치면서

여러 교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론화되기 시작합니다.

2세기에는 교부 리옹의 이레네우스를 통해서,

3세기에는 테르툴리아누스라는 교부를 통해서 이론화됩니다.

이레네우스는 성자와 성령은 ‘하느님의 두 손’이라는 우명한 표현을 남겼고,

테르툴리아누스는 하느님께서는 ‘하나의 실체이면서 동시에 세 위격’이라는

유명한 정식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삼위일체 교리가 발전되는 시기였음과 동시에

많은 이단들이 등장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이단들은 주로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던 유일신 신앙이 강했기에,

성자와 성령은 성부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이들은 신명기 6장 4절,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라는 말씀을

목숨처럼 생각했기에, 한 분이신 하느님이 셋으로 나누어진다는 교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분열을 해결하기 위하여 첫 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가 325년에 열립니다.

이 공의회를 통해 이단들은 단죄받고,

처음으로 삼위일체 신앙이 공식적으로 형성됩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아 공의회를 통해서도

이단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교회의 분열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38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두 번째 공의회가 열입니다.

여기서 다시한번 이단들은 단죄를 받고, 기존의 니케아 신경을 보완해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장엄하게 선포됩니다.


이 신경은 다음과 같이 매우 분명하게 삼위일체적 신앙을 고백합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 전능하신 아버지를 저는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이렇게 삼위일체론에 관한 교의가 정립된 것입니다.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아실것입니다.

삼위일체 신학에서 중요한 이론을 제시하였던 성 아우구스티누가 성인이

어느날 삼위일체 신비를 골똘히 생각하면서

북아프리카의 아름다운 해변을 거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어린아이가 모래사장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바닷물을퍼 담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성인이 아이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그 아이는 모든 바닷물을

그 모래 구덩이에 담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지적하자,

그 아이는 천사의 모습으로 변해 떠나가면서 삼위일체 신비를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은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와같은 일화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점은 삼위일체는 신비라는 것입니다.

신비란 무엇입니까?

신비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기하고 묘한 비밀을 말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그렇게 신비스럽게 한분이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단지 그 신비에 체험적으로 접근해 나갈 뿐임을 먼저 인정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서로 하나되는 느낌을 갖습니다.

이러한 사랑과 일치의 체험이 삼위일체의 신비체험과 흡사합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신비에 더 잘 접근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 삼위의 삶을 균형있게 살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부 하느님을 창조자로, 성자 하느님을 구원자로,

성령 하느님을 협조자로 알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성서에 증언되어 있기에 참된 진리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의 삶을 산다는 것은

성부의 창조성과 성자의 구원성과 성령의 협조성을 본받는다는 뜻입니다.

즉, 성부 하느님의 창조성을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합니다.

우리 집안에, 우리 공동체안에, 우리 교회안에, 사랑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분열이 있고, 어두움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 때,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인내하고, 내가 먼저 희생함으로써

사랑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부 하느님의 창조성을 사는 것입니다.


성자 하느님의 구원성을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합니다.

주위의 영육간의 어려움중에 있는 이웃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그를 받아주고, 그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정신적, 물질적 도움을 줌으로써 그의 영혼과 육신을 구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자 하느님의 구원성을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 하느님의 협조성을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을 뜻합니다.

나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좋고, 선한 일을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도적이고, 내 고집대로 할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하느님의 협조성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께서, 성령님께서는 한 분이시라는 신비를 믿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고자하는 우리들의 믿음과 행동을 통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께서는 세세히 영원히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멘.


 

  


<삼위일체 대축일>(2014. 6. 15.)(요한 3,16-18)


<믿는다면 사랑하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느님과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성령이 명백하게 구분되는 세 분으로 오셨지만

사실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아버지도 하느님, 아들 예수님도 하느님, 성령도 하느님이라고 믿는데,

하느님은 세 분이 아니라 한 분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만들고 보살피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과

우리를 하나로 일치시키는 성령의 일은

모두 다 똑같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에는 삼위일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사람도 있겠지만,

하느님은 한 분이라는 믿음과 예수님도 하느님이라는 믿음과

성령도 하느님이라는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핵심 교리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위격은 셋으로 구분되지만 사실은 하나라는(일체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 말장난이 아니냐?" 라고 말할 텐데...

하느님은 그런 분이라고 계시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믿으라고 윽박질러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체험을 통해서, 또는 묵상을 통해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는 교리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뜬구름 잡는 것 같은 공허하고 추상적이고 막연한

신학 이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 삶에서 언제나 항상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그래서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사랑을 언제든지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고(1요한 4,8),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신 하느님의 사랑이신 분이고,

성령은 지금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세 가지 사랑은 서로 구분되면서도 하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느님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구분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구분된 모습으로(위격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 외에 다른 계시는 없습니다.

그러니 사위일체나 오위일체 같은 말을 억지로 만들면 안 됩니다.

(마음대로 그런 말을 만들어내면 그건 이단입니다.)


또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도 처음부터 우리가 믿어왔던 믿음이고,

이것도 역시 계시된 교리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된다는

삼위일체 교리는 계시된 교리이지 인간이 만들어낸 교리는 아닙니다.

(계시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 신비를 알고 믿기 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아버지와 예수님과 성령은 하나입니다.


요한 1서의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1요한 4,8-9)."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1요한 4,12-13)."


여기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라는 요한 1서 저자의 말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 말은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게 되고, 또 믿게 됩니다.

따라서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첫째,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할 일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함께 그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기 때문에

우리는 혼자서만 그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그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서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믿는다면 사랑하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삼위일체 대축일(요한 3,16-18) 

가톨릭신문 발행일2017-06-11 [제3048호, 18면]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 아들 하느님, 그리고 두 분에게서 발하시는 성령 하느님께서는 각각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한 분 하느님이심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인간 이성으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지만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 하느님으로 계시되고 있고, 교회 공동체 역시 여러 지체가 한 몸을 이룬다는 점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있기에 교회는 하느님을 삼위일체이신 분으로 고백하고, 삼위일체가 바로 공동체의 원리임을 받아들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이런 삼위일체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들입니다.

먼저, 오늘 1독서의 탈출 34,4-9은 아버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줍니다. ‘야훼’라는 이름을 지니신 주님께서는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을 때는 분노하시어 그들을 벌하시지만,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과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어 그들을 고통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다시 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느님을 당신의 아버지, 더 나아가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이토록 자비하고 너그러운 하느님에 관해서는 에제 36,16-38에도 잘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이름 때문에 이스라엘을 바빌론 유배지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이끌어 내시어 깨끗이 씻겨주시며, 정결하게 해 주시어 다시금 당신 백성으로 삼으십니다. 탈출 34,9이 말하는 것도 바로 이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뻣뻣하여 항상 하느님 계획을 틀어놓는 역할을 하는데,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악과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에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너그러우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피로 온 세상의 죄를 대신 치르셨는데, 이를 통해 당신 아들을 믿는 이들은 누구나 당신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도 이 점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을 내어 주시는데, 이제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요한 3,16-18)

그런데 요한 14,15-17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께로 되돌아가고 나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 곧 진리의 영을 보내 주시어 우리와 함께 영원히 있도록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 당신께서 부활하신 뒤 예수님께서는 당신 숨을 불어 넣어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아버지와 아드님이 보내어 주시는 진리의 영 덕분에 세상 안에서 고아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님을 만나고 깨달으며, 그분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성경은 곳곳에서 하느님의 세 가지 위격인 성부, 성자, 성령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오늘 2독서로 봉독한 사도 바오로도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드러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항상 우리와 함께하기를 빈다고 인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 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 희생으로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은총이 주어졌음을 믿고 고백하며, 그 믿음이 코린토 공동체에서 제대로 드러나기를 기원하는 인사말입니다. 아울러 성령께서 오시어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믿음으로써 하느님과 화해하며,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친교의 공동체를 이루게 되기를 기원하는 인사말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아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느님이 삼위일체이심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모습을 본받아 다양한 구성원들이 하나의 몸을 이루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 청하고, 또 각자의 자리에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염철호 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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