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라자로의 소생 (요한 11,1-45)
에제키엘 예언자는 당신 백성을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에제키엘 37,12ㄹ-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2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 13 내 백성아, 내가 이렇게 너희 무덤을 열고, 그 무덤에서 너희를 끌어 올리면, 그제야 너희는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4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신다고 한다. (로마 8,8-11)
형제 여러분, 8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11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이며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시어 유다인들이 믿게 하신다. (요한 11,1-45)
그때에 1 어떤 이가 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는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사는 베타니아 마을의 라자로였다. 2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의 발을 닦아 드린 여자인데, 그의 오빠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리아와 그 언니 마르타가 3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 이르셨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5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병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머무르셨다. 7 예수님께서는 그런 뒤에야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 하자, 9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11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그가 잠들었다면 곧 일어나겠지요.” 하였다. 13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그냥 잠을 잔다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14 그제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히 이르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이제 라자로에게 가자.”
16 그러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가 동료 제자들에게,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가서 보시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벌써 나흘이나 지나 있었다. 18 베타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열다섯 스타디온쯤 되는 가까운 곳이어서,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28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스승님께서 오셨는데 너를 부르신다.” 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30 예수님께서는 마을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당신을 맞으러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다.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으면서 그를 위로하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를 따라갔다. 무덤에 가서 울려는 줄 알았던 것이다.
32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34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37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38 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무덤은 동굴인데 그 입구에 돌이 놓여 있었다. 39 예수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니,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였다.
40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41 그러자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42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43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44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 주어 걸어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사순 제5주일 제1독서 (에제37,12ㄹ-14)
"나 이제 너희 무덤을 열겠다. 그리고 내 백성아, 너희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12ㄹ)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 다음, 너희 땅으로 데려다 놓겠다. 그제야 너희는,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14)
에제키엘서 37장 12절 이하 14절에서 마른 뼈의 환시를 통한 새로운 확신과 희망에 근거하여 하느님께서 에제키엘로 하여금 회복의 약속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주어짐을 보여준다.
그리고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환시를 받은 자들을 '내 백성아'라고 부르신다. 이것은 비록 현재 그들의 영육의 상태가 마른 뼈처럼 희망없는 가운데 있지만, 이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여기시고 그들에게 선민의 축복을 회복시키실 것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에제키엘서 37장 1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땅에서 포로로서 아무런 희망이 없이 살아가는 자신들의 상황을 자신들의 뼈가 말랐다고 표현하였다.
그런데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의탁하고 신뢰하며 살지 못하는 그들의 상황을 더 비관적으로 무덤 속에 있다고 표현하셨다. 하지만 이어서 하느님께서는 무덤 속에 있는 그들을 무덤으로부터 끌어내어 나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무덤 속에 있다는 것은 죽었다는 의미이고, 무덤으로부터 끌어내어 나오게 하겠다는 것은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겠다는 의미이다. 이 무덤의 비유는 넓은 계곡 한 가운데 가득하던 마른 뼈들이 힘줄과 살이 붙고 살갗이 붙은 후에 숨이 불어 넣어져 큰 군대가 되게 하신 환시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마른 뼈의 소생 비유나 무덤의 죽은 자들의 소생에 관한 비유는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영육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른 뼈나 무덤 속의 시신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잃어버린 남부 유다 공동체의 영적인 죽음 상태를 의미하고, 마른 뼈에 숨(생기)이 불어 넣어져 큰 군대로 소생하는 것이나 무덤 속의 시신이 살아 나오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신앙이 생겨 새롭게 변화되며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는 특히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겠다'는 표현이 사용되어 정치적인 해방과 국권의 회복을 보다 명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한편, 여기 에제키엘서 37장 12절에서 예언되는 바빌론 유배 포로 공동체의 정치적 해방은 그들을 억류하고 있던 바빌론 제국이 B.C.539년에 멸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즉 그 후 세 차례에 걸친 포로 귀환( B.C.537년, 458년, 444년)이 이루어져 원하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하느님께로부터 상속받은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영적 회복은 그들이 다시 주님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 대표적 사건으로는 B.C.516년에 이루어진 성전 재건과 B.C.432년에 이루어진 느헤미야의 개혁 운동을 들 수 있다.
한편, 에제키엘서 37장 14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의 영적 측면을 보다 부각시켜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당신의 영을 선민 공동체에 두어 살아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여기 에제키엘서 37장 14절의 '내 영을'에 해당하는 '루히'(ruhi; my spirit)의 원형 '루아흐'(ruah)는 앞의 '숨'(생기)으로도 번역된 단어이다. 여기서 사용된 '루아흐'(ruah)는 에제키엘서 37장 1절에서 에제키엘을 이끌고 계곡으로 갔던 것으로 언급된 '그의 영'에 해당하는 '루아흐 예흐와'(ruah yehwa)와 관련된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즉 '주님의 영',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결국 에제키엘서 37장 14절은 본 단락이 제시하는 선민의 회복이 단순히 포로 생활에서의 해방과 국권의 회복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선민들이 하느님의 영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될 것임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이전에 그들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하고 징계 받도록 한 이전의 잘못된 삶이 완전히 청산되고,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백성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선민의 회복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속하는 새로운 백성들이 될 것임을 나타내는 새성전과 새로운 예배와 새 땅에 대한 환시를 담고 있는 에제키엘서 40장 이하 48장 까지의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순제5주일(110410)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1-45)
주일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려내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흔히 이 이야기를 해설하거나 묵상할 때,
'돌을 치워라.' 라는 말씀과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라는 말씀만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치워야 한다,
우리는 무덤에서 나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누워 있지만 말고 무덤에서 나가야 한다.'
라는 식으로 해설하거나 묵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듣기에는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죽은 사람 자신이 무덤 입구를 막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 라자로가 자기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무덤에서 걸어 나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무덤 입구의 돌을 치우셨고,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깨우셨고,
예수님께서 그를 무덤에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라자로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자력구원이 아니라 타력구원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라자로만 바라보면 그리스도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의 손을 잡으시고 '소녀야, 일어나라.' 라고 하시자
그 소녀가 다시 살아났습니다(마르 5,42).
그 소녀가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나인'이라는 마을에서 관을 메고 가는 사람들을 만나자
예수님께서 순전히 죽은 사람의 어머니가 가엾어서 기적을 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시고 '젊은이야, 일어나라.' 하시자
관 속에 누워 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일어납니다(루카 7,15).
그 젊은이가 자기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래도 라자로는
자기 발로 무덤에서 걸어 나오지 않았느냐고 할 사람도 있겠지만,
장소가 무덤이니까 그렇게 된 것이고,
무덤이나 침대나 관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무덤 속 같은 암흑과 절망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가서,
이제 그만 거기에서 나와라,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가기 싫어서 그러고 있는 것이 아닌데,
나가고 싶어서 몸부림치고 있는데,
그만 나와라, 라는 말만 하면... 나갈 수 있습니까?
병에 걸려서 고통 속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가서,
아프지 마라,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말만 하면 병이 낫고, 통증이 사라집니까?
예수님도 아니면서 예수님 흉내를 내지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은
자기 힘으로는 일어나서 무덤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타비타' 라는 여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가 그곳에 가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타비타, 일어나시오.' 하고 말합니다(사도 9,40).
그러자 그 여자가 다시 살아나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장면에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베드로 사도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린 다음' 그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죽은 타비타를 살려낸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내실 때에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당신의 권능으로 살려내셨습니다.
(아,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예수님에게 라자로를 살려낼 능력이 없어서
그 능력을 청하는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군중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에 대한 감사기도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에게, ‘아프지 마라, 그만 일어나라.’
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 환자를 위해 예수님께 기도하고,
그 환자를 실제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실천해야 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는 사람에게,
배고파하지 마라, 라는 식으로 말 같지 않은 말을 하지 말고,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같이 굶든지, 같이 먹든지...)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헤로데는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그 다음 날 군중 앞에서 처형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적을 행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별로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음 날 사형당할 운명인데도 베드로는 태연하게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자고 있는 베드로를 깨우고,
쇠사슬을 풀어 주고, 옷을 입게 하고(옷을 입혀주었을 수도 있고),
베드로를 감옥에서 데리고 나갑니다.
그 동안에 베드로는 계속 이게 꿈이려니(환시이려니) 하고 생각합니다.
그가 그 모든 일이 주님께서 하신 실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감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천사가 가버린 다음의 일입니다(사도 12,1-11).
무덤 속에 누워 있는 라자로와
감옥에 갇혀 있는 베드로의 모습이 비슷하게 보입니다.
라자로는 예수님께서 직접 깨우셔서 무덤에서 불러내셨고,
베드로는 천사를 보내셔서 감옥에서 빼내셨지만,
어떻든 둘 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무덤 속에 누워 있는 사람을 깨워서 데리고 나가시는 분이고,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을 깨워서 데리고 나가시는 분입니다.
라자로 자신이 한 일도 아니고, 베드로 자신이 한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복음 말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라자로가 살아나는 내용이 아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라자로를 살리심으로써 당신의 말씀을 증명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라자로는 나중에 다시 죽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주인공은 라자로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라자로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살고 싶다면 믿으면 됩니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하지만,
우리 힘으로 안 되는 일들은 믿고 맡겨야 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은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도를 닦아서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고,
스스로 초월적인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살리시기 전에 마르타에게 물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생명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죽음과 가족들의 슬픔을 마주하면서 마음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 눈물은 사랑의 눈물이며 인류의 고통과 아픔을 나누는 눈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심정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치워라.” 하고 소리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은총을 받기 전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우리는 돌처럼 굳어 있는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불신을 치우고 자녀다운 신뢰를 마음에 심어야 합니다. 사순 시기의 기도와 선행은 우리 마음의 돌을 치우는 노력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차디찬 마음을 따듯하게 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하시는 예수님의 외침은 인류를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고통에서 해방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르타처럼 믿음을 고백하면, 죽음의 어둠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죽음의 수렁 속에 허우적거리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
- 윤경재 요셉
예수께서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머무르셨습니다. 이는 그토록 사랑한 친구를 도와 주고자하는 예수님 자신의 원의보다 오직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동하심으로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제자들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어디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요한11,10)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으므로 걸려 넘어진다.”라고 분명하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빛을 들여놔야 하는 것입니다. 그 빛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의 빛입니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입고 부활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선물로 오신 파라클레토스 성령이십니다.
그믐이라 별빛만 찬란한 캄캄한 밤중에 한 나그네가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고맙게도 멀리서 작은 등불이 움직이는 게 보여 그 등불을 목표로 삼아 걸었습니다. 거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잠시 후 맞은편에서 등불을 들고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는 소경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나그네가 소경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신데 왜 등불을 들고 다니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소경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이 등불을 들고 다니면 소경이 걷고 있다는 것을 눈 뜬 사람들이 잘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야 저도 부딪치지 않고 걷게 되겠죠.”
사람들은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남들이 자기 마음을 알아차릴 거라 기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심리학 연구에서 이것은 착각이라고 결론이 났습니다. 이런 착각을 ‘투명성 착각’이라고 부릅니다. 자기가 자신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줄 리가 없으며 서로 부딪칠 뿐입니다. 이 예화에서 소경이 등불을 든 이유도 이런 ‘투명성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아직도 두 눈이 먼 소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등불을 켜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표시를 하지 않아도 남들이 알아줄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알리지 않는 게 살아가는 데 더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신앙인이라는 표시는 그저 성호를 긋는 다거나 십자가목거리와 묵주반지를 착용한다고 해서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내 모든 행동이 욕심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더러 사랑,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 선행 그리고 성실, 온유, 절제의 열매를 맺으라고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나누어 보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신앙생활의 결과입니다. 자기와 남, 공동체가 얻는 열매입니다. 인내, 친절, 선행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규범입니다. 성실, 온유, 절제는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이렇게 성령은 자신과 남과 공동체가 모두 하나가 되는 길을 밝혀줍니다. 결코 자기 하나만 깨달음의 경지로 도달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통하지 않고 살면 참 신앙인이 아니라는 통렬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숨도 쉬지 말아야합니다. 투명성 착각은 남뿐만 아니라 자기도 기만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솔직한 성격의 마르타는 예수님께 등불을 켜달라고 매달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이 부탁은 단지 자신만을 위한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자신과 마리아 그리고 죽은 라자로를 위한 등불을 점화시켜달라고 매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아직 부족한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개념으로만 부활을 이해한 것입니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도 역시 남에게 들은 소리를 가지고 자기가 안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남에게 소문으로 들은 진리는 아직 자기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체험이 뒷받침 되어야 진정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개념은 체험으로 입증되어야 그 힘을 얻습니다.
욥의 고백이 연상됩니다. 욥은 세상 이면에 하느님의 뜻이 따로 있다는 것을 체험한 뒤에 그 모든 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욥42,5~6)
예수께서는 이제 곧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그 첫 단추를 여셨습니다. 전대미문의 체험을 열어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뿌리가 내린 다음 열매가 맺으며, 하느님의 일은 최종 목표를 향하여 첫 걸음을 내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즉, 하느님의 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향하여 그와 비슷한 사건들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주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인간적 눈에 머물러 있는 마르타의 의심을 벗겨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습니다.
그 순간은 무덤 속에서 나온 라자로와 함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각자 등불 하나씩을 자신 안에 점화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등불은 그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밝혀줄 희망과 진리의 불빛이었습니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 (요한12,36)~.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