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주일]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4)

2017. 1. 15. 오전 6: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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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주일]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4)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고 하신다고 전한다. (이사야 49,3.5-6)
주님께서 3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바오로 사도는 소스테네스와 함께 코린토 교회 성도들에게 인사하며 은총과 평화를 빈다. ( 1코린 1,1-3)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오로와 소스테네스 형제가 2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다른 신자들이 사는 곳이든 우리가 사는 곳이든 어디에서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들과 함께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3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한다. (요한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연중제2주일 제1독서(이사49,3.5-6)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49,3.5)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3)

기서 '종' 해당하는 '아브띠'(abdi)는 '섬기다','일하다'는 의미의 '아바드'(abad)에서 유래하며 주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소유물인 노예 왕국의 가신(1사무19,1)을 언급하거나 상대방에 대한 겸손을 나타낼 때에 사용한다(창세33,5). 그러나 본문에서 이 종은 주님을 지칭하는 1인칭 접미어와 결합하여 '주님의 종'으로 표현되고 있다.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에 해당하는 동사 '에트파아르'(ethpaar)의 원형 '파아르'(paar)어떤 물체가 찬란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어원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영화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재귀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되 그의 종을 통해서 그렇게 하실 것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너에게서'로 번역된 '뻬카'(beka)는 '메시야의 삶과 일(사명)을 통해서'라는 의미이다. 오직 주 하느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메시야의 삶무죄한 자로서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은 메시야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주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요한17,4).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5) 

이사야서 49장 5절부터 7절까지는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사명을 성취하게 하실 것과 영광의 승리를 보장하시는 약속이 제시된다. 

이러한 내용은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표현으로 시작된다. 한번 주신 약속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성취시킨다는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앞세움으로써 앞으로 제시되는 이사야서 49장 6절의 주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여기 이사야서 49장 5절은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주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매우 긴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주님께서 주님의 종과 이스라엘이 어떤 관계이며, 이들에게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이사야서 49장 5절의 이러한 내용은 이사야서 49장 6절에서 인용되는 주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사야서 49장 5절에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에 해당하는 원문은 '예흐와 요체리 밉베텐 레에베드 로'(yehwa yotseri mibbeten leebed lo;who formed me as his servant from the womb)이다.

여기서 '모태에서부터'에 해당하는 '밉베텐'(mibbeten; from the womb)에서 드러나지만, 주님의 종이 후천적으로 사명을 받은 자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사명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모태에서부터 주님의 종을 예비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그 종이 성공적으로 사명을 완수하게 하실 것임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5) 

'모여들게 하시려고'의 표현은 앞의 '돌아오게 하시고'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가장 가깝게는 이스라엘의 바빌론 유배로부터의 귀환과 신앙적 회복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9장 2절에 암시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질 것인데, 주님의 종이 본래부터 이스라엘의 영육의 회복을 위해 지음을 받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사명을 입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오래전부터 계획된 주님의 종을 통한 하느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며, 이 계획은 궁극적으로 종말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백성들이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옴으로써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로마11,25~27).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5) 

'소중하게 여겨졌고'에 해당하는 '웨엑카베드'(weekkabed; for I am honored)원형 '카바드'(kabad)는 본래 '무겁다'는 의미로서 '소중히 여기다'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주님의 눈에'라는 '뻬에네 예흐와'(beene yehwa; in the eyes of the LORD)라는 표현은 주 하느님과 주님의 종과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준다. 이처럼 주님의 종을 특별히 소중하게 보신다는 것은 결국 이 종을 통한 사명이 반드시 성취되게 하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라는 표현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이것은 메시아가 이 땅에서 인류 구속 사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원천바로 주님께서 주신 능력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요한 복음 14장 10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감당하고 있는 사명이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어린양>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하느님의 어린양’은 과월절의 어린양과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어린양이 합해진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 열 번째 재앙을 내리시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열 번째 재앙은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들이 모두 죽은 재앙입니다.)
“이달 초열흘날 너희는 가정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집집마다 작은 가축을 한 마리씩 마련하여라.
... 이 짐승은 일 년 된 흠 없는 수컷으로 양이나 염소 가운데에서 마련하여라.
... 이날 밤 나는 이집트 땅을 지나면서,
사람에서 짐승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맏배를 모조리 치겠다.
그리고 이집트 신들을 모조리 벌하겠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가 있는 집에 발린 피는 너희를 위한 표지가 될 것이다.
내가 이집트를 칠 때, 그 피를 보고 너희만은 거르고 지나가겠다.
그러면 어떤 재앙도 너희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이다(탈출 12,3-13).”
여기서 ‘어린양’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그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생명과 구원’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인간들은 허무하게 멸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을 대신해서 죽으심으로써
인간들에게 생명과 구원을 주신 어린양이신 분입니다.


또 이사야서 53장에 이런 예언이 나옵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이사 53,4-11).”
여기서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 ‘속죄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시켜 주신 속죄양(어린양)이신 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로마 3,22-25).”
예수님께서는 우리 대신에 당신의 목숨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셨고,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용서와 생명과 구원의 은총을 거저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선 먼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죄인인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존재가 될 뿐이라는 것도 인정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시기를, 그래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를,
또 나를 영원한 존재로 만들어 주시기를 간절하게 희망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통하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예수님을 믿으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혹시 다른 길이 또 있지 않을까, 하면서
어떤 학문이나, 아니면 다른 종교들을 괜히 기웃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속죄와 구원의 은총은, ‘거저’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마치 예수님과 거래를 하듯이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이만큼 바치면, 예수님께서 이만큼 주시겠지.”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께 바치는 것들은 모두 다 항상 감사 예물입니다.
은총은 언제나 무상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뭔가를 얻어내기 위한 투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하느님의 뜻과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믿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실천하는 믿음’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만 강조되어 있을 뿐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의롭게 됩니다.
...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4-26).”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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