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일]부활논쟁(루카 20,27-38)

2016. 11. 6. 오전 5:3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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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2주일]부활논쟁(루카 20,27-38)

예수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다. 바닥에 앉아 있는 이들은 예수와 사두가이파의 논쟁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마카베오기 하권은, 율법으로 금한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는 임금에 맞서 법을 어기기보다 죽음을 택한 일곱 형제와 의인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한다. (2 마카 7,1-2.9-14)
그 무렵 1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2 그들 가운데 하나가 대변자가 되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를 심문하여 무엇을 알아내려 하시오? 우리는 조상들의 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소.”
둘째는 9 마지막 숨을 거두며 말하였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10 그 다음에는 셋째가 조롱을 당하였다. 그는 혀를 내밀라는 말을 듣자 바로 혀를 내밀고 손까지 용감하게 내뻗으며, 11 고결하게 말하였다. “이 지체들을 하늘에서 받았지만, 그분의 법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들까지도 하찮게 여기오. 그러나 그분에게서 다시 받으리라고 희망하오.” 12 그러자 임금은 물론 그와 함께 있던 자들까지 고통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 젊은이의 기개에 놀랐다.
13 셋째가 죽은 다음에 그들은 넷째도 같은 식으로 괴롭히며 고문하였다. 14 그는 죽는 순간이 되자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바오로 사도는 테살로니카인들에게, 우리가 지시한 것을 여러분이 실행하리라 믿는다며 기도한다.(2 테살 2,16─3,5)
형제 여러분,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또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은총으로 영원한 격려와 좋은 희망을 주신 하느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어, 온갖 좋은 일과 좋은 말을 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3,1 끝으로 형제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서처럼 빠르게 퍼져 나가 찬양을 받고, 2 우리가 고약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구출되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은 성실하신 분이시므로, 여러분의 힘을 북돋우시고 여러분을 악에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
4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지시하는 것들을 여러분이 실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행하리라고 믿습니다. 5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이끄시어, 하느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저세상에서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고,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신다. (루카 20,27-38)

그때에 27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28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29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30 그래서 둘째가, 31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32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33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35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36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37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38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부활 논쟁>송영진 모세 신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상한 질문을 합니다.
“......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루카 20,27-33).”
사두가이들의 질문은, 알고 싶어서 한 질문이 아니라,
부활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억지로 만들어낸 질문입니다.


사두가이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1) 내세는 없다. 따라서 부활도 없다.
2) 만일에 부활이 있고 내세가 있다면,
그쪽 세상은 지금 세상이 계속 이어진 세상일 것이고,
그 세상에서의 인생도 지금의 인생이 계속 이어지는 인생일 것이다.
3) 그렇다면 현세에서의 복잡한 문제들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부활은 없는 것이 낫다.


1) 내세도 부활도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반박하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여기서 ‘죽은 이들’이라는 말은
“죽어서 소멸되어야 하는 허무한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죽음’이라는 것에게 자기의 자녀들을 빼앗기는 무능한 신”이라는 뜻입니다.
‘산 이들’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릴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산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전능한 신이 아닙니다.
전능한 신이 아닌데도 믿는다면, 그 믿음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하느님을 전능하신 분이고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당연히 부활도 내세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면,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는 일이 부활이고,
부활한 사람들이 영원히 사는 곳이 내세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2) 지금의 세상과 인생이 부활 후의(내세의) 세상과 인생에서
계속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반박하십니다.
“저 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 20,35-36).”


이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저 세상은 이 세상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곳에서의 인생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인생이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천사들과 같아진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입니다.
그곳은 인간을 괴롭히는 ‘생로병사’도 없고, ‘오욕칠정’도 없는 곳입니다.
서로 싸우거나 다투는 일도 없고 오직 사랑만 있는 곳,
인간 세상의 불공평한 일들과 억울한 일들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활과 내세를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환생이나 윤회와 혼동하면 안 됩니다.
환생과 윤회는 지금의 인생이 반복되는 일일 뿐입니다.
만일에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앞에서 말한 ‘전능하신 하느님’이라는 믿음과 맞지 않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전생, 환생, 윤회 등을 믿지 않습니다.


3) 내세는 완전히 새로운 새 세상이고,
부활 후의 인생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새 인생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복잡한 문제들은 그곳에서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정말로 풀기 어려운 복잡한 일들이라고 해도
그곳에 가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원한도 욕망도 모두 사라지고 없으니...)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풀지 못할 매듭은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4)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판단 받는’이라는 말은,
부활할 자격을 판단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에게 자격이 있다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자격을 주시기를 희망하고 청하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끝나버린 예수님이 아니라,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와 핵심은 부활 신앙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바칠 때마다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신앙생활의 마지막 목표를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먼저 부활에 참여할 자격을 얻어야 하고,
그 자격을 얻으려면 먼저 용서를 받아야 하고,
용서받기를 바란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도 않고 죄 속에서 살면서 용서받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용서받지 못한다면 구원도 부활도 영원한 생명도 없습니다.
“나는 회개해야 할 죄가 하나도 없다.” 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말은 ‘위선’과 ‘교만’이라는 죄를 짓는 말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작은 부활, 큰 부활>

 

부활이란 것, 인류 역사 안에서 전무후무한 것이고, 너무나 엄청난 일이기에 그게 과연 내게 해당이나 되는 일이겠는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이자 믿을 교리입니다. 이 부활 신앙이 없다면 우리 그리스도교의 근본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교회의 기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부활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우리에게도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최초로 영원히 풀리지 않았던 숙제였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삶 안에 적용시켜야할 부활 신앙입니다. 그로 인해 머지않아 다가올 죽음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홀가분하게 이 세상을 떠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힘든 순간이 있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 발단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했고 분노로 치가 떨렸습니다. 단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다보니 몸과 마음도 점점 병들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게 마음먹고 내가 먼저 뒤로 물러났습니다. 내가 먼저 용서했습니다. 내가 먼저 자세를 낮췄습니다. 한 마디로 내가 죽었습니다. 일종의 작은 죽음의 체험이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가지 특별한 일이 생겼습니다. 죽기보다 지기 싫어 죽지 않았는데, 내가 죽으니 그때에 내가 부활할 수 있었습니다. 여유가 생겼고 조금 숨을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일상 안에서도 죽음을 통한 부활이 지속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언젠가 결정적인 순간에 부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우리네 일상 안에서 부활을 체험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 숨 쉬며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때 우리가 죽어있는 순간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해 어둠 속에 파묻혀 있는 순간입니다. 누군가와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우울과 낙담, 절망 속을 헤맬 때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져 죄 속에서 방황할 때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내 뜻만 찾을 때입니다. 그 순간은 어떤 면에서 목숨이 붙어있지만 죽어있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부활신앙이 꼭 필요할 때입니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크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남을 통해 가능합니다. 죄에서 하느님께로 돌아설 때 가능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먼저 헤아릴 때 가능합니다. 죽기보다 힘든 용서지만 죽을 각오로 내가 먼저 용서할 때 가능합니다.

 

때로 완벽해 보이는 이승의 삶이지만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이승의 삶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맞이하게 될 또 다른 삶에 비교하면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상은 한낱 서곡에 불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안정과 평화 기쁨이 무척이나 커 보이지만 언젠가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맞보게 될 영원한 삶, 부활의 삶에 비교하면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자질구레한 우리들의 일상사 안에서도 작은 부활을 맛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 언젠가 또 다른 생을 맞이한 때 다가올 결정적인 부활에서도 제외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마르(12,18~27) 부활 논쟁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탈출3;6)


후손에 관한 규정 (신명기25장 5-6)

5 “형제들이 함께 살다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들 없이 죽었을 경우, 죽은 그 사람의 아내는 다른 집안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없다. 남편의 형제가 가서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여, 시숙의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6 그리고 그 여자가 낳은 첫아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받아, 그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지워지지 않게 해야 한다. 


부활 논쟁 (마태 22,23-33 마르12,18-27 ; 루카20,27-40

30 부활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 

31 그리고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해서는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 보지 않았느냐?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33 군중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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