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3주일] 제 십자가를 지고 (루카14,25-33)
지혜서의 저자는 하느님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하느님의 뜻을 알겠냐고 고백한다. (제1독서. 지혜서 9,13-18)
13 어떠한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14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저희의 속마음은 변덕스럽습니다. 15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고, 흙으로 된 이 천막이 시름겨운 정신을 짓누릅니다.
16 저희는 세상 것도 거의 짐작하지 못하고, 손에 닿는 것조차 거의 찾아내지 못하는데, 하늘의 것을 밝혀낸 자 어디 있겠습니까?
17 당신께서 지혜를 주지 않으시고, 그 높은 곳에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보내지 않으시면, 누가 당신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18 그러나 그렇게 해 주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길이 올바르게 되고, 사람들이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배웠으며, 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시편 90(89),3-4.5-6.12-13.14와 17(◎ 1)
◎ 주님, 당신은 대대로 저희 안식처가 되셨나이다.
○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당신은 말씀하시나이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
○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
○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
바오로 사도는 필레몬에게 옥중에서 얻은 아들 오네시모스를 부탁하며 종이 아니라 형제로 맞아들여 달라고 한다. (제2독서. 필레몬 9ㄴ-10.12-17)
사랑하는 그대여, 9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10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2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3 그를 내 곁에 두어, 복음 때문에 내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그대 대신에 나를 시중들게 할 생각도 있었지만, 14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대의 선행이 강요가 아니라 자의로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5 그가 잠시 그대에게서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마도 그를 영원히 돌려받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16 이제 그대는 그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돌려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나에게 특별히 사랑받는 형제라면, 그대에게는 인간적으로 보나 주님 안에서 보나 더욱 그렇지 않습니까?
17 그러므로 그대가 나를 동지로 여긴다면, 나를 맞아들이듯이 그를 맞아들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고 제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신다. ( 루카복음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연중 제24주일 제2독서 (필레몬9ㄴ-10.12-17)
"이러한 내가 옥중에서 얻은 내 아들 오네시모스의 일로 그대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11)
나는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12)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사목을 돕는 이들 가운데 몇몇을 향하여 '아들'이라고 불렀다. 티모테오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고(2티모1,2), 티토를 믿음에 따라 착실한 아들이 된 자라고 했다(티토1,4).
옥중에 갇힌 상태에서 얻은 아들이라고 지칭한 오네시모스 역시 사도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거듭났으며, 그의 사목을 많이 도왔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얻은'이란 의미로 번역된 '에겐네사'(egennesa; I have begotten)의 원형 '겐나오'(gennao)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가리키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전존재의 변화를 나타낸다. 전에는 죄를 짓고 도주한 노예였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변화되어 새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표현인 것이다.
당신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조직 안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으로 부권(父權)의 개념을 사용했는데, 사도 바오로는 그들과 달리 랍비문헌과 쿰란 문헌에서 발견되듯이 제자들에 대한 영적 스승으로서의 부권을 가지고 오네시모스를 대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오네시모스를 영적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 안에서 갖게 되는 스승(교사)과 제자(학생)와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오네시모스'는 '유익한 자'라는 뜻으로 당시 노예들 가운데 흔한 이름이었다. 오네시모스는 콜로새 출신의 필레몬의 이교도 노예였다. 당시 콜로새 출신의 노예에 대한 좋지 않은 평판이 많았고, 게다가 자신의 집에서 물건을 훔쳐서 도주한 오네시모스의 행위는 주인 필레몬의 노여움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따라서 이 편지를 접한 필레몬은 이렇게 오네시모스라는 이름을 대했을 때 깜짝 놀랐을 것이다. 즉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도망자 노예가 사도 바오로의 영적 아들로 거듭 났다는 소식이 그를 놀라게 했을 것이다.
'내 심장과 같은 그를'(12)
'심장'으로 번역된 '스플랑크나'(splangchna; bowels; heart)는 7절에서 '마음'으로 번역된 단어로서 본래는 '창자', '내장'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이 내장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 단어는 긍정적인 감정 즉 친절, 자비심, 동정심, 연민의 정과 같은 추상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인의 마음에 이러한 긍정적인 감정을 갖도록 해주는 종이나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를 지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당시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를 가리켜서 자신의 '스플랑크나'(spllangchna)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자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오네시모스에게 이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에게 끓어넘치는 사랑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이것은 친자녀 이상으로 자신의 심장처럼 극진히 사랑하는 자이며 심복이라는 뜻이다.
사도 바오로는 오네시모스가 비록 노예였지만, 회개하고 돌아와 자신을 섬기는 그 모습 속에서 마치 친 아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그러한 극진한 사랑과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회심한 오네시모스는 이미 사도 바오로의 존재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법적으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주인 필레몬으로부터 오네시모스가 용서를 받아 온전히 회복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으므로, 심장과도 같은 그를 일단 필레몬에게 보내는 것이다
연중 제24주일 복음 (루카14,25-33)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27)
루카 복음 14장 26절에서 '미워하지'에 해당하는 '미세이'(misei; hate)의 원형 '미세오'(miseo)는 단순히 '미워하다'(히브1,9)는 문자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미세오'라는 동사는 셈족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과장법적 표현으로 쓰였고, 실제적으로는 '덜 사랑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마태6,24).
본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37절에 나오는 '더 사랑하다'는 표현 속에서 그 어떤 대상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본절은 마태오 복음 사가의 표현과 관련지어 볼 때에도, 여기에 열거된 사람들을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보다 덜 사랑하라는 셈어적 표현인 것이다.
여기서 '미워하다'는 말이 가리키는 '덜 사랑하다'는 뜻은 상대적으로 가장 우선 순위에 놓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에 우선하여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강조적 표현이다.
그러나 '마세오' 동사는 위의 의미 뿐만 아니라 '근본적 단절'이라는 뜻도 있기에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본절에 열거된 대상들과 단절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도 들어 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무엇보다 우선하여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제자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오히려 예수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미워하라'는 셈어적 과장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루카 복음 14장 27절은 26절에 이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갖추어야 할 두번째 조건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짊어지고'에 해당하는 '바스타제이'(bastazei; bear; carry)의 원형 '바스타조'(bastazo)는 '옮겨가다', '참다', '짐을 지다'는 뜻으로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의 고난의 모습을 다각도로 묘사한다.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마태오 복음 10장 38절에서는 '취하다'는 뜻의 '람바노'(lambano) 동사를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루카 복음 14장 27절의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표현 대신에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니까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마태오 보다 루카 복음사가가 더욱 더 강한 어조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감수해야 함을 당시 로마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 방법이었던 십자가 처형까지 예를 들면서 강조하신 것이다.
<버림과 따름>송영진 모세 신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여기서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 신앙인이 될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내가 주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 자매”는 세속적인 인간관계를 가리키고, ‘자기 목숨’은 ‘영원한 생명’의 반대쪽에 있는 육신의 목숨을 가리킵니다.
‘미워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집착(애착)을 버리지 않으면”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가족을 미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성가정을 이룰 의무가
있습니다.
가족은 우리가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고, 신앙 여정의 동반자입니다.
결코 미워하면 안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신 것은, 세속적인 애착심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가정을 이루고 가족과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가족과 함께 호의호식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됩니다.
(가족과 함께
주일미사 참례를 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야외로 놀러갈 것인가?
무엇이 더 가족을 행복하게 하는 일인가? 무엇이 더 가족을 위한
일인가?)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면,세속적인 것들과 현세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애착)을 버려야
한다.”입니다.
그런데 그 ‘버림’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27).”
이 말씀의 뜻은, “누구든지 내가 주는 구원을 받기를 바란다면, 어떤 고난과 시련도, 죽음까지도 다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입니다.
여기서 ‘십자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 고난, 박해, 시련 등을 모두 가리킵니다.
물론 이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십자가만 있는 길은
아닙니다.
가다 보면 편안한 길도 나오고 힘든 길도 나오는데, 편안한 길만 걸으려고 하고 힘든 길은 피한다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힘들거나 편안한 것을 따지지 말고,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루카
14,28-30).”
이 말씀은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런 경우라면 예수님의 말씀은, “신학교를
다니다가 중간에 그만둘 거라면 처음부터 입학하지 마라.” (또는 “수련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그만둘 거라면 처음부터 입회하지
마라.”)
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꼭 성직자나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2) 전체 신앙인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면...
이 말씀은, “끝까지 갈 수 있도록 전력을 다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간에 냉담하게 될
거라면 처음부터 세례를 받지 마라.” 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또 모든 사람에게 세례를 주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마태 28,19).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의지나
열정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떻든 여러 가지 이유로 냉담자가
많이 생기는 것이 현실인데, 중간에 신앙생활을 그만두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고,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생활을 안 한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협력자 가운데
‘데마스’ 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의사 루카와 데마스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콜로 4,14).”
루카의 이름 뒤에 데마스의
이름을 바로 기록한 것은 그가 루카에 버금가는 협력자였음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그 데마스라는 사람은 나중에 바오로 사도를 버리고
떠납니다. “데마스는 현세를 사랑한 나머지 나를 버리고 테살로니카로 가고... (2티모 4,10)”
그가 현세를 사랑해서 바오로
사도를 떠났다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신앙생활을 중단했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님보다 현세를 더 사랑했다는 것은, 믿음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데마스라는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한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무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자기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다는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와 함께 간다는 마음가짐도
필요합니다.
자기보다 약한 형제들을 도와주는 것은 당연히 할 일이고, 동시에 자기보다 강한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것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 길은 혼자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늙은 모습과 감옥에 갇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이 더욱 실감납니다.
“죽어야 할 인간의 생각은 보잘것없고”, “썩어 없어질 육신이 영혼을 무겁게” 하는 인간의 면모가 생각납니다.
위대한 사도이지만 자신의 약점을 자랑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 애쓰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의 제자 됨은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겠다는 선택입니다. 그분처럼 자신을 낮추고, 포기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지닌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삶이 두려워 그것을 회피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은 몹시도 힘든 길이며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그러한 길을 걸어가셨기에, 우리도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집과 욕망을 하나씩 버리게 됩니다.
십자가의 길 여정 안에서 우리는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게 됩니다. 이러한 연약함은 우리가 날마다 지고 갈 십자가의 일부가 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주님과 분리될 동기가 되지 않고 오히려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걷는 십자가의 작은 희생과 고통들을 구원의 열매로 바꾸어 주십니다.
일상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변모됩니다. 우리가 가지는 작은 용기를 통해 교회는 건설됩니다.
우리가 지니는 전적인 신뢰와 헌신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자라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