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일] 과부위 외아들을 살리다 (루카7,11-17)

2016. 6. 5. 오전 7:3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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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0주일] 과부위 외아들을 살리다 (루카7,11-17)

예수께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Jesus Raises a Widow’s Son.jpg


엘리야가 머물던 집의 주인인 과부의 아들이 죽자,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아들을 살려 주신다. (열상 17,17-24)
그 무렵 17 집주인 여자의 아들이 병들게 되었는데, 병이 매우 심해져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18 여자가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하느님의 사람이시여! 어르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저한테 오셔서, 제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19 엘리야는 여자에게 “아들을 이리 주시오.” 하며, 과부의 품에서 아이를 받아 안고 자기가 머무르는 옥상 방으로 올라가서, 자기 잠자리에 누였다.
20 엘리야는 주님께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제가 머물고 있는 이 집 과부에게까지 재앙을 내리시어 그 아들을 죽이셨습니까?”
21 그리고 그는 아이 위로 세 번 자기 몸을 펼친 다음 주님께 다시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22 주님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고 그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하시자, 아이가 다시 살아났다. 23 엘리야는 그 아이를 안고 옥상 방에서 집 안으로 내려와, 아이 어머니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 아들이 살아 있소.”
24 그러자 여자가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제야 저는 어르신께서 하느님의 사람이시며, 어르신 입으로 전하신 주님의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며,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다고 고백한다. (갈라 1,11-19)
1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혀 둡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12 그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입니다.
13 내가 한때 유다교에 있을 적에 나의 행실이 어떠하였는지 여러분은 이미 들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교회를 몹시 박해하며 아예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15 그러나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당신의 은총으로 부르신 하느님께서 기꺼이 마음을 정하시어, 16 내가 당신의 아드님을 다른 민족들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바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17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갔습니다.
18 그러고 나서 삼 년 뒤에 나는 케파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보름 동안 그와 함께 지냈습니다. 19 그러나 다른 사도는 아무도 만나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만 보았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내시자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느님을 찬양한다. (루카 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연중 제10주일 제1독서 (1열왕17,17-24)


그는 아이 위로 세 번 자기 몸을 펼친 다음 주님께 다시 이렇게 부르짖었다.

 "주 저의 하느님,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21)

 

'아이 위로 세 번 자기 몸을 펼친 다음'

 

엘리야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취한 행동이다.

'몸을 펼친'에 해당하는 '와이트모데드'(waithmoded)의 원형 '마다드'(madad)

기본적으로 '측량하다', '재다'(민수35,5)라는 뜻인데, 본문처럼 재귀형으로 쓰이면

'뻗다'(stretch)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측량하게 위해서 자와 같은 물건을 그 위에 펼치듯이,

엘리야가 자신의 몸을 누운 아이 위에 포갰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없다.

 

열왕기 상권 17장 17절에 보면  아이는 완전히 죽었는데,

아마도 이러한 행동은 하느님의 능력이 자신의 몸을 통해 죽은 아이에게 전달됨으로써

그 아이가 소생되기를 바라는 엘리야의 신앙적 행동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엘리야가 왜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기도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다만 '3'이란 숫자가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상징하는 수이기 때문에

오직 하느님의 완전한 능력에 의해서만 그 아이가 살 수 있다는

엘리야의 믿음이 표현된 것이라고 추론한다.

 

이와 비슷한 예를, 수넴 여자의 아들을 살린 엘리사(2열왕4,34.35)와

트로아스에서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를 듣다가 삼층 창문 틀에서 떨어진

에우티코스라는 청년을 살린 바오로 사도의 경우(사도20,9.10)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아이 안으로 목숨이 돌아오게'

 

'안으로'로 번역된 '키르뽀'(qirbo)의 원형 '케레브'(qereb)는 일반적으로

'몸', '신체'를 뜻하는 '께셈'(qeshem)과 달리 '내부' '인체의 내부',

'내장', '배 속'(욥기20,14)이나 '그들 가운데에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들', 

'인간 집단의 내부'(민수11,4)를 뜻하는 단어이다.

 

이 구절에서 이미 죽어 떠나 있는 '목숨'으로 번역된 '네페쉬'(nephesh)

열왕기 상권 17장 17절에서 '숨'으로 번역된 '네샤마'(neshama)와 동일한 단어로

'생명' 이나 '목숨', '혼'을 의미한다.

 

엘리야는 이미 죽어 떠나 있는 혼으로 하여금 다시 그 아이의 인체 내부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부르짖어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혼은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는데, 오로지 하느님만이 능히

그 혼을 불러가실 수 있을 뿐 아니라 다시 돌아오게 하실 수 있다.

 

여기서 떠났던 혼(목숨)이 몸으로 돌아오게 해 달라는 엘리야의 기도는

곧 죽은 아이를 다시 살려달라는 뜻이다.

 

 

오늘 제1독서의 열왕기 상권 17장에서 사렙타에 사는 과부의 아들을 엘리야를 통해

하느님께서 살려주시는 이야기가 선포되는 것은, 오늘 루카 복음 7장 11~17절에서

나인 지방의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과부에 대한 가엾은 마음이 들어 스스로 다가가 살려주시는

예수님께서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예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에서 거론되는 주제는 무엇일까?

 

구약의 '하느님의 가난한 사람들' 즉 '아나빔'(anawim)에 속하는

'고아, 과부, 나그네' 중에 속하는 과부는 유다와 같은 종교 율법적인 사회에서는

가장 소외된 계층에 속하는데, 복음에서 사회적으로 별 볼일 없는

가장 소외된 계층에 속하는 과부의 외아들의 장례 행렬에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는 사실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분명히 그 과부 뿐만 아니라 그들 중에 그 누구도 죽은 외아들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과부 자신이 어렵고 소외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얼마나 고을 사람들의

아픔같은 궂은 일에 가족처럼 함께 하는 덕성스러운 삶을 살았으면, 그 고을 사람들이

그 과부의 외아들의 죽음을 자신들의 가족의 애환처럼 생각하고 함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과부의 평소 착한 삶이 착하신 예수님을 부르게 하고, 가던 길을 멈추게 하며

측은지심으로 과부의 외아들의 시신에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즉 선이 선을 부르고, 사랑이 사랑을 부르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을 관련지으면,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아픔에 가엾은 마음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과 예수님의 마음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며, 인간의 생사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분인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고, 그것이 구약에 이미

엘리야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의 소생 사화에 이미 예언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측은지심(연민의 정과 동정심)이 반영되고 일치하고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6월 예수 성심 성월에 깊이 묵상하고 닮으며, 우리도 과부와 같은 어려움이 있을때

우리의 어려움을 결코 모르는 체 하지 않으시는 예수 성심께 간없이 매달리고 의탁해야 한다는 것을

교회가 선포하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연중 제10주일 복음 (루카7,11-17)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3~14)

 

루카 복음사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직접 예수님께 대해 '주님', 곧

'퀴리오스'(kyrios)를 사용한 것은 이곳이 처음이다.

 

그 전에 사용된 '퀴리오스'(kyrios)다른 이들의 고백이나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 사용한(루카6,5) 것들이다.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 7장 11~17절에 이르는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그전까지 행하신 기적 가운데 가장 절정에 달한 것이며,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처음으로 '퀴리오스'(kyrios)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까지도 다스리는 주권자요,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분임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여기에 해당하는 '에스플랑크니스테'(esplangchnisthe; he had compassion)의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gchnizomai)'창자까지 뒤틀려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번역은 '그의 마음이 동정으로 흔들렸다', '가슴앓이를 했다'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한 과부로 인해 가슴앓이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이 과부가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루카 복음 7장 13절죽음까지도 다스리시는 권세를 가진 예수님께서

과부로서의 고달픈 삶을 살아온 한 여인이 자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뼛속 깊이 동감하시고 계시는 장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나인이라는 고을에서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리신 사건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데, 루카 복음사가는 이것을 통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2위 천주 성자이심과 동시에 불완전하며 연약한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친히 겪고 이해하실 분이심을 보여 주면서

예수님의 인성(人性)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회당장 아이로의 딸이나 라자로의 소생 사건에서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모습이다.

 

단 하나의 희망이었던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과부를 보시며,

창자까지 뒤틀려질 정도로 깊게 공감하시며 먼저 다가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의 인간적인 감정, 특히 소외되고 불쌍한 자들에 대한 뜨거운 연민과

인간애를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관에 손을 대시자'

 

상여를 멘 자들이나 과부가 예수님을 부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몸소 그들을 보시고 그들에게 가까이 나아가셨다.

 

그리고 죽은 젊은이의 시체가 들어 있는 관에 손을 대셨다.

하지만 유대인의 정결법에 있어서, 죽은 시체나 무덤 또는 주검에

관계된 것에 접촉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다(레위22,4; 민수19,11.16).

 

유대인의 관념으로는,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에 죽은 이에게

손을 대는 것 자체만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 부정한 것에 손을 대시면서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기에 딱하고 안쓰럽게 여기신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미 율법에 대하여 초월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말의 '관'시체가 들어있는 사방이 닫혀 있는 나무 상자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에 해당하는 '소루'(soru; bier; coffin)의 원형 '소로스'(soros)

시체를 지탱하는 '들것'(bier)이나 작은 버들가지로 만든 뚜껑이 없는

'위가 뚫린 관'(open coffin)을 의미한다.

 

그래서 15절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을 때 사람이 따로 관 뚜껑을 열 필요가 없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4)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12절에 '죽은 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는 '테트네코스'

(tethnekos)라는 완료 분사로 쓰인 이미 '죽은 이'와 이야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이미 죽은 시체를 향해 '젊은이야'

(네아니스케; neaniske; young man)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 시체를 향해 '너에게'('소이'; soi; to you),

곧 살아있는 인격체에게 쓰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미 죽은 이에게까지도 생명의 주님의 되신 예수님의 말씀의

신적 능력이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013년 6월 9일 다해 연중 제10주일

구약 시대부터 신약 시대를 넘어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약자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들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살 수 없는,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는 그런 이들을 상징하는 성경의 인물입니다.
엘리야도 예수님도 과부가 의지해 온 아들의 죽음을 묵과할 수 없었던 인간적인 이유는 ‘측은지심’ 때문이었지만, 실상 과부의 아들을 죽음에서 불러일으키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죽음이나 고통, 슬픔, 좌절에 인간을 머물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다시 일으키시고, 치유하시고, 위로하시며 희망을 심어 주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던 자신의 잘못된 신념을 버렸습니다. 선택된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따로 뽑으시어…… 그분을 내 안에 계시해 주셨습니다.”라는 고백처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실천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돌보는 이웃 사랑에 있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하지만 생각처럼 실천이 잘 안 되는 이유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을 너무 멀리서 찾기 때문입니다. 얼마간의 기부금을 내는 정도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지 말고, 혹시 내 가족 가운데, 내 가장 가까운 친구와 교우들 가운데, 나와 무관하다고 여겨 온 내 이웃들 가운데 아들을 잃은 과부의 슬픔을 안고 있는 이들은 없는지 살펴볼 때입니다.


마리오 민니티, 나인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 Mario Minniti, 1577-1640, Miracolo della vedova di Naim, Olio su tela, 245 x 320 cm, Provenienza -Chiesa dei Cappuccini. 이탈리아 카푸치니 성당.jpg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


“바로 그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루카 7,11-12).”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을 때 장례 행렬과 마주치게 되는데,
겉으로 보기에는, 또는 우리가 보기에는 ‘우연히’ 마주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관점에서는 ‘우연’이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일은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 일로 믿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려고, 또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계시하시려고
의도적으로 그곳에 가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과부의 외아들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상황 설명이 아닙니다.
그 과부가 대단히 딱하고 불쌍한 처지에 놓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
하느님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
메시아의 자비와 구원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자비’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메시아의 복음 선포와 구원 활동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외아들을 잃은 그 과부는,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루카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 이렇게 선포하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나인이라는 고을의 그 과부는 아마도 가난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과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명사였습니다.)
또 아들을 잃은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으니 ‘잡혀간 이’ 라고 말할 수 있고,
슬픔 때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도, 볼 수도 없었을 테니
‘눈먼 이’ 라고 말할 수 있고, ‘억압받는 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그런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해방 선포’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과부는
죽음이라는 이별 때문에 슬프게 울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합니다.
누구나 살면서 그 이별을 겪지 않을 수는 없으니,
그 과부는 곧 ‘우리(나)’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루카 7,13-15).”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라는 말은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타냅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을 지도 모릅니다.
라자로가 죽어서 울고 있는 마리아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처럼(요한 11,35).
(예수님은 우리가 울고 있을 때 함께 우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울지 마라.” 라는 말씀과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우시는 분이지만,
무기력하게 울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근본적으로 없애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울지 마라.” 라는 말씀은,
“내가 너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다시는 울지 않게 해 주겠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21,3-4).”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라는 말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 빠져 있는 그 어머니에게 기쁨을 돌려주셨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를 살리신 일에 초점을 맞춰서 이 이야기를 해석하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 사람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분”
이라는 가르침이 됩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서 수명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는 정도의 권한이 아니라,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권한입니다.


과부에게 기쁨을 주신 일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은 울고 있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나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분”이라는 가르침입니다(묵시 21,4).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했던 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루카 7,16).” 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하느님이신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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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복음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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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ㄴ-22)16.06.19조회 70[연중 제11주일]죄 많은 여자 용서 (루카 7,36-8,3)16.06.12조회 63[연중 제10주일] 과부위 외아들을 살리다 (루카7,11-17)16.06.05조회 219[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청소년 주일)] (루카 9,11ㄴ-17)16.05.28조회 180[삼위일체 대축일]진리의 영 (요한 16,12-15)16.05.22조회 61[성령 강림 대축일]성령을 받아라 (요한 20,19-23)16.05.14조회 62[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16.05.08조회 558[부활 제6주일.생명의날] 평화 (요한 14,23-29)16.05.01조회 61[부활 제5주일]새 계명 (요한 13,31-33ㄱ.34-35)16.04.24조회 351[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27-30)16.04.16조회 99[부활 제3주일]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요한 21,1-19)16.04.10조회 58[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16.04.02조회 61[27주일 (백) 예수 부활 대축일 ] 부활(요한20,1~9)16.03.27조회 335[20 일(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춘분](루카 22,14―23,56)16.03.19조회 64[사순 제5주일]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 (요한 8,1-11)16.03.13조회 560[사순 제4주일] 돌아온 탕자의 비유 (루카 15,1-3.11ㄴ-32.)16.03.05조회 132[사순 제3주일] 무화과나무 비유 (루카 13,1-9)16.02.28조회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