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청소년 주일)] (루카 9,11ㄴ-17)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을 가슴 깊이 새기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예수님께서 성목요일에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과, 사제가 거행하는 성체성사로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현존을 기념하고 묵상한다. 전통적으로 삼위일체 대축일 다음 목요일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로 지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목적 배려로 주일로 옮겼다.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과 성혈 축일이 따로 있었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함께 지내 오고 있다.
한국 교회는 해마다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청소년 주일’로 지낸다. 청소년들이 우정과 정의, 평화에 대한 열망을 키우며 자라도록 도와주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에게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을 전함으로써 교회가 그들과 함께하며, 세계의 정의와 평화를 위하여 그들과 함께 노력하겠다는 교회의 다짐이기도 하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1985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세계 젊은이의 날’을 제정하였는데, 우리나라는 1989년부터 5월의 마지막 주일을 이날로 지내 오다가 1993년부터 ‘청소년 주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하느님의 사제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을 축복하고, 아브람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준다. (창세 14,18-20)
그 무렵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9 그는 아브람에게 축복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아브람은 복을 받으리라. 20 적들을 그대 손에 넘겨주신 분,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바오로 사도는 주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만찬 때에 빵과 잔을 나누어 주시며,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시킨다. (1코린 11,23-26)
형제 여러분, 23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24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5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6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복하시어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다. (루카 9,11ㄴ-17)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11 하느님 나라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고 필요한 이들에게는 병을 고쳐 주셨다. 12 날이 저물기 시작하자 열두 제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마을이나 촌락으로 가서 잠자리와 음식을 구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있는 이곳은 황량한 곳입니다.” 13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니, 제자들은 “저희가 가서 이 모든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사 오지 않는 한, 저희에게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4 사실 장정만도 오천 명가량이나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대충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게 하여라.” 15 제자들이 그렇게 하여 모두 자리를 잡았다. 16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들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나 되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창세14,18-20)
"그 무렵 살렘 임금 멜키체덱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18)
'살렘 임금'으로 번역된 '멜레크 살렘'(mellek shallem)에서 '살렘'은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살렘에 그분의 초막이, 시온에 그분의 거처가 마련되었네." (시편76,3)
'살렘'은 '예루살렘'의 예스런 명칭인데,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당연히 당시 예루살렘을 다스리던 통치자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는 본문의 '살렘'을 지명을 나타내는 고유명사로 보지 않는다. 즉 '살렘'(샬렘)을 '화친하다', '배상하다'(탈출22,6)로 번역된 동사 '샬람'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서 살렘 임금을 '화친하기 위해 나아온 임금', '항복하고 배상하는 임금' 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문맥상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살렘 임금 멜키체덱은 패자의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당당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하며, 또한 아브라함도 그에게 전리품의 일부를 바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멜키체덱이 가져온 빵과 포도주는 아브라함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아브라함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와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선물로 볼 수 있다.
'멜키체덱이'로 번역된 '우말르키 체디크'(umallki tsedeq)에서 '멜키체덱'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말르키'를 '멜레크'(mellek; 임금,왕)와 1인칭 어미가 합쳐진 말로 보며, '체데크'를 신(神)의 이름으로 여겨 '나의 임금은 체데크신(神)'으로 보는 견해이다.
둘째는 '마르키'를 신(神)의 이름으로 여기고, '체데크'를 문자적 의미인 '정의'(正義)로 보아서 '마르키신(神)은 정의로우시다'로 번역하는 것이다.
셋째로 두 단어를 모두 문자적으로 번역하여 '나의 임금은 정의로우시며'라고 보는 견해이다.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 견해를 취하면, 멜키체덱은 가나안의 우상을 섬기는 사제가 된다.
그러나 본문에 이어지는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라는 내용을 볼 때 이 두 견해를 도저히 취할 수가 없다. 따라서 세번 째 견해가 합당할 수 있으며, 이것은 그의 정의로운 성격을 잘 대변하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 번역된 '코헨 레엘 엘르욘'(kohen leel ellyon)에서 '지극히 높으신'으로 번역된 '엘르욘'은 '오르다'(창세49,4 ; 신명5,5)란 의미가 있는 '알라'(alla)에서 유래하며 '가장 으뜸됨','가장 존귀함'(2역대7,21; 시편89,28; 에제42,5)이란 의미를 지닌다.
특히 이 단어가 본문에서처럼 하느님께 대해 사용될 때는 다른 존재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초월성과 탁월성을 보여준다(시편7,18; 57,3).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과 견줄 존재가 아무도 없음을 알고, 오직 하느님만을 유일신으로 섬겨야 한다.
"그래서 당신의 이름 주님이심을 당신 홀로 온 세상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그들이 깨닫게 하소서." (시편83,19)
한편 성경에서 740회 등장하는 '코헨'(사제)이란 단어가 본절에 처음 나온다. 인간들에 대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변자 역할을 하는 예언자와 달리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중재자(중보자) 역할을 하는 사제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탈출기 28장에 비로소 나온다. 즉 모세의 형인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의 사제로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 등장하는 멜키체덱은 이방인이며 아론과도 전혀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키체덱은 당시 사람들을 대표해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렸던 자인만큼은 분명하다.
이러한 멜키체덱은 임금이며 동시에 사제로서 장차 오시게 될 만왕의 왕이시며 완전한 사제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시편110,4 ; 히브7,1-17). 즉 '정의의 임금'(멜키체덱의 뜻)이며 '평화의 임금'(살렘 임금의 뜻)으로서 멜키체덱은 이상적인 신정정치(神政政治)의 통치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아론의 계통이 아니고 시작도 끝도 없는 사제로서의 멜키체덱은 영원한 중재자(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사제인 멜키체덱을 등장시킴으로써 이천 년 이후에나 이 땅에 오시게 될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게 하셨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모든 성경이 태초부터 계시며 영원히 인간의 중재자(중보자)가 되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영원히 사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십니다. 따라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며 그들을 위해 밀어 주십니다." (히브7,24.25)
"아브람은 그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 (창세14,20ㄷ)
성경에 처음 나오는 십일조(十一租)에 대한 기록이다. 십일조 규정은 모세에 의해 명문화되었지만(레위27,30-33), 본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 이전에도 이미 시행되고 있었다.
이브라함이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마아세르'; maaser ; a tenth; tithe)을 멜키체덱에게 준 것은 멜키체덱을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로 인정한 것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긴 것이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께 드린 십일조는 아브라함 자신의 모든 소유는 물론, 자기 자신도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신앙의 성숙한 고백인 것이다.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시편24,1)

성체성사는 생명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저녁에 빵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새로운 생명의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시는 빵의 기적은 육적인 양식을 주시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그 기적은 영원한 생명의 양식에 대한 예표입니다(요한 6,54 참조).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고 계십니다. 매일 미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하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분의 현존과 생명을 느낍니다. 그 생명은 우리 삶 안에서 살아 숨 쉬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고 다시 얻으셨습니다(요한 10,17 참조).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셨습니다(요한 15,12 참조).
우리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그분의 크나큰 사랑을 받아 모십니다. 이로써 벗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자라게 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성사는 우리를 나눔과 섬김의 삶으로 이끕니다. 우리는 세상의 온갖 것을 사랑으로 대하게 됩니다.
성체성사는 믿음의 성사입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두지 않은 유다인들은 생명의 양식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믿음 없이는 성체성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인 믿음 안에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기념하며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모든 교우 믿는 교리, 빵이 변해 성체 되고, 술이 변해 성혈 된다.”
<성체성사>송영진 모세 신부
1)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을 내어주시는 일이고,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성체성사는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한 몸이 되는) 성사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성체를 받아먹는
것, 그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고, 우리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고, 또 성체를 통해서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함께 계시는 것’ 자체가 바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2) 성체성사는 ‘이웃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
물론 우리가 미사 중에 먹는 성체는 여러 개로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영성체는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는 일입니다. ‘예수님’이라는 하나의 빵을.~~
그래서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이웃과 하나가 됩니다.
이웃 안에 계시는 예수님과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신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이웃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사랑’입니다.
3) 성체성사는
‘식사’입니다.
식사는 ‘생존’과 직결된 일입니다.
성체성사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우리를 살리는) 식사입니다.
물론 미사 중에
먹는 작은 성체로 배가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체를 먹는 것은 육신의 배부름을 위한 일도 아니고,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일도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일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4).”
세속의 연인들은 흔히 사랑을
고백할 때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사랑을 고백하는 그 마음은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약속입니다.
‘영원’은 인간의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영원’이라는 시간이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는 그 ‘영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식사입니다.
4) 성체성사는 에덴동산의
회복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는 먹었지만 생명나무 열매는 못 먹었습니다(창세
3,22).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신 다음에 ‘천사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창세 3,24).
아무도 생명나무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시민은 누구나 자유롭게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묵시 22,2).
그런데 성체성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을
먹는 일이기 때문에 그 생명나무 열매를 지금 먹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직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워 주심으로써 미리 그 생명나무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수 있으니
에덴동산이 완전히 회복된 것과 같습니다.
에덴동산이 회복되었다는 것은 조상들이 잃어버린 기쁨과 행복이 회복되었음을
뜻합니다.
5) 그래서 성체성사는
‘희망’이고,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에덴동산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또는 하느님 나라의 식사를 미리 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임을 믿게 해 주는 일이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지치지 않게 해 주는 힘을 얻는 일입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
이웃과 하나가 되는 것,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은 모두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이 기쁨과 행복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서
생기는 것인데, 동시에 더 큰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따라서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없이 성체를 먹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7-29).”
성체는 먹기만 하면 영생을 누리게 해 주는 마법의 음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랑 안에서(요한 15,10) 먹을 때, 그때 비로소 생명의 양식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