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새 계명 (요한 13,31-33ㄱ.34-35)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교회마다 원로를 임명하고 선교 활동을 완수하고 나서,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교회 신자들에게 보고한다. (사도행전 14,21ㄴ-27)
그 무렵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21 리스트라와 이코니온으로 갔다가 이어서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22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리고 교회마다 제자들을 위하여 원로들을 임명하고, 단식하며 기도한 뒤에, 그들이 믿게 된 주님께 그들을 의탁하였다.
2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피시디아를 가로질러 팜필리아에 다다라, 25 페르게에서 말씀을 전하고서 아탈리아로 내려갔다. 26 거기에서 배를 타고 안티오키아로 갔다.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선교 활동을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에 맡겨졌었는데, 이제 그들이 그 일을 완수한 것이다.
27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본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며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신다. (묵시록 21,1-5ㄴ)
나 요한은 1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2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3 그때에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4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5 그리고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며 새 계명을 주신다. (요한 13,31-33ㄱ.34-35)
유다가 방에서 31 나간 뒤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33 얘들아,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바오로와 바르나바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사도14,21ㄴ-27)
그들은 제자들의 마음에 힘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힘을 북돋아 주고'로 번역된 '에피스테리존테스'(episterizontes)의 원형 '에피스테리조'(episterizo)는 더욱 굳게하고 강화하며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에서만 4회 쓰였는데(사도15,32 .41; 18,23), 모두가 사람의 마음과 교회의 신앙심을 확고하게 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이 복음을 전한 리스트라와 이코니온과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의 제자들의 신앙이, 행여 유다인들의 박해와 핍박과 이전 삶의 유혹으로 흔들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의 마음으로, 그들의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몇 마디 격려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마음을 합심해서 기도하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을 것이다.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고 이 환난은 그들만이 아니라 복음을 전수받고 믿기 시작한 성도들에게도 닥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점점 증가하는 박해로 인해 믿음을 버릴 소지가 다분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믿는 이들에게는 필연적으로 환난이 따르며, 그러한 환난을 믿음과 인내로 극복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쳐 그들로 하여금 믿음에 굳게 서도록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에는 '데이'(dei)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것은 '~해야 한다'(must)라는 필연성을 나타내는 동사이다.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는 것이 필연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바오로 당시의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원수인 마귀들이 공중을 다스리는 지배자들로서, 지금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불신자들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에페2,1참조). 따라서 세상의 풍조에 따라살면서 악한 영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환난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 이상하게 여기거나 환난 때문에 신앙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만약 우리가 환난이 두려워 신앙을 버린다면, 하느님의 나라에는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로마서 8장 17절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라고 계시한다. 또한 로마서 8장 18절에서는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계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때문에 환난을 당할 때, 우리를 위해 대신 수고 수난하신 주님의 십자가상 고난과 장차 주어질 놀라운 천상 영광을 바라보며, 더욱 믿음을 굳게 가져야 한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여라.>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1)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이 말씀은, 사랑의
'모범'과 '기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사랑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에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사랑의 모범은 바로 '섬김'입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14)."
예수님께서 종의 모습이 되셔서 제자들을 섬기신 그 사랑을
제자들도(신앙인들도) 서로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는
제자들은(다른 사람들도) 사랑은 곧 '섬김'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랑'과 '좋아하는 감정'을
혼동합니다.
(또는 소유욕과 성욕을 사랑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서로 섬기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새 계명'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방식이 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방식이고,
또 '사랑' 자체도
완전히 새로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섬김'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루카 22,25-26)."
세속의 지배자들을 보면,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면서도 자기는 백성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사랑이란 군림하고 권세를 부리는 방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가장이 식구들을
억압하면서도
자기는 가족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한다면 억압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섬김'을
실천해야 합니다.)
2) "서로
사랑하여라."
'서로' 라는 말은,
사랑이란 개인의 일방적인 실천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실천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며 스승의 입장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실천해야 하는 계명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실천하지
않고 나 혼자서만 실천해서,
마치 짝사랑처럼 된다고 해도, 그래도 다른 사람들을 탓하지 말고
나 혼자서라도 실천해야
합니다.
"왜 나만 실천하는가?" 라고 불평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는데,
그 불평은 '사랑 없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참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불평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사랑이 부족하지나 않은지 반성할 뿐입니다.)
3)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써
신앙을 증명하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실상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사랑 실천'은 자신이 신앙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반대로, 사랑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사이비 신앙인이 됩니다.
교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 실천이 없는 교회는(종교는) 사이비 종교가 될 뿐입니다.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산을 옮기는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사이비 종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결코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여라."입니다.
흔히 "바로 옆에 있는
사람부터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그치고, 사랑이 널리 확산되지 않는다면,
즉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집단 이기주의가 될 뿐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
(마태 5,46-47)"
자기들끼리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만일에 울타리를 쳐 놓고서 그 안에서만 사랑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범죄 집단에서 흔히 말하는 자기들
사이의 의리 같은 것인데,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인류 전체입니다.
당연히 다른 종교 사람들도 모두 포함됩니다.
일부 종파에서는 자기들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다른
종교들을 적대시하고 증오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종교 전쟁은 전쟁이라는
점에서도 죄가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른다는 점에서도 죄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종교 전쟁을 성전(聖戰)이라고
미화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런 것은 '악(惡)'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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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하시려고 진리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른바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으셨지요. 그러기에 내면에서 나오는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서로 사랑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진실한 대화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이나 사랑을 언어로써 표현하지요. 사람의 생각이 말로 표현되는 만큼 마음가짐이 올바른 사람은 언어와 행동마저도 올바릅니다. 그래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품위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과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티끌만 한 것이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사람도 있지요. 문제는 ‘알고 있는 사실이나 말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정직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날 서로에게 신뢰심을 갖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대방의 말을 정확히 전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무의식적이거나 부주의에서 오는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이런 행동은 남을 해치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살릴 수도 있고,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참되고 성실한 대화만이 사랑과 신뢰를 쌓아 가는 지름길임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부활 제 5 주일; Eucaristia (뜻: 감사, 성체, 미사)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인이십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왔지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아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아버지께서 보내신 성령님께서 당신 위에 내리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다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당신을 낮추시고 아버지를 높이십니다. 이것은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돌아가시는 모습입니다. 이 때 당신의 영을 아버지께 돌려드립니다. 이것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다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시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는 실상 아들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시라 아들에게 굳이 감사할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받아주기 때문에 아드님을 사랑하십니다. 나의 사랑을 베풀어 줄 상대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 상대에게 감사한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께서 당신 사랑을 받아주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당신 모든 생명을 불사르셨듯이, 아버지께서도 당신 모든 것을 받아주고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아드님을 위해 당신 모든 것인 ‘영광’을 아드님께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영광이 당신 생명이요 성령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셨다면 아버지께서도 아드님을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 당신 생명을 바치시는 것입니다.
공놀이로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탁구나 테니스를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공이 없다면 두 사람은 굳이 탁구대나 테니스장에서 함께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공을 상대방에게 보내면서 그 오고가는 공에 집중하며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렇게 주고받는 끊임없는 움직임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공을 받아치기를 그만둔다면 공은 땅에 떨어지고 그 공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있던 그들은 다시 관계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사랑은 추억이 아닙니다. 사랑은 현재상황입니다. 사랑은 현재 이 시간에 주고받는 ‘대화’와 같은 것입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결코 주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당신 존재의 이유를 받게 되신 것처럼 사랑은 절대로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성령님’이고 생명이고 특별히 ‘감사’가 될 때 참 사랑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와 한 사랑을 똑같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과 아버지간의 오고가는 사랑이 우리 각자에게서도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리스도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똑같이 되지 않으면 그분의 아버지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대화를 하시기 위해서 말을 거셨고 우리는 감사와 순종으로 응답해 드려야합니다.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방법은 항상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것과 삶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빵을 나누어 주시기 전에 특별히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에서도 적은 양의 음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오천 명이 앞에 있는데 단 두 명이 먹을 음식을 가지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니 그 음식이 모든 사람을 배부르게 먹이고도 남을 정도로 불어났습니다.
이 행위를 규칙적으로 하도록 예수님도 우리에게 예식으로 정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사입니다. 미사는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서 하느님께 제물을 봉헌하고 하느님께서는 그 제물을 우리에게 생명의 빵과 구원의 음료로 되돌려주시는 것입니다.
제대를 사이에 두고 감사와 봉헌과 은총이 서로 왔다갔다 거리면서 하느님과 인간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제대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의 제물과 찬미를 올리고 하느님은 그 제대를 통하여 우리에게 넘치는 은총을 되돌려주십니다. 이 관계가 끊임없이 일어나야 하느님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미사의 어원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희랍어에서 온 것으로 ‘감사’ (Eucaristia)이고 또 하나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파견’ (Missa)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감사만 올리신 것이 아니라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그 감사를 삶으로도 보여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미사 때 감사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도 예수님의 계명을 따름으로써 완전한 응답을 드려야합니다.
결국 하느님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해야 할, 즉 우리가 모든 것을 주어야 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감사’한 마음을 지닐 때, 성체성사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완성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