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은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선포하신 자비의 특별 희년을 보내며,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 자비의 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우리가 믿고, 그렇게 믿어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기록된 복음서를 읽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합시다.
사도들을 통하여 표징과 이적이 일어나자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늘어난다.(사도행전 5,12-16)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13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14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15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16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
시편 118(117),2-4.22-24.25-27ㄱㄴ(◎ 1)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또는 ◎ 알렐루야.)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
○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
파트모스 섬에 갇힌 요한은 성령에 사로잡혀 환시를 보고, 이를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목소리를 듣는다.(요한묵시록 1,9-11ㄴ.12-13.17-19)
9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10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
12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13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17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일어나는 일들과 그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 주신다. 만져 보고야 믿겠다며 의심하던 토마스도 예수님을 뵙고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한다.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 (사도5,12-16)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15)
'그리하여'에 해당하는 본문은 '호스테 카이'(hoste kai)이다. 접속사 '호스테'(hoste)는 '그러므로'라는 뜻으로 본문에서는 결과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즉 '호스테'는 사도들이 행한 표징과 이적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떠한 반응과 결과를 나타내게 했는지를 결론적으로 진술하고 있음을 가리켜 준다.
여기서의 '호스테'는 앞의 사도행전 5장 12절과 13절의 내용과 연결하여 사도들의 표징과 이적이 많이 일어났고, 이것은 백성 가운데 사도행전 5장 15절과 16절의 결과를 낳게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즉 사도들이 행한 표징과 이적으로 말미암아 심지어 사람들이 베드로의 그림자만 스쳐 지나가도 치유될 것으로 믿고 나올 정도가 되었고, 실제로 사도행전 5장 16절에서는 병든 자들이 모두 나음을 얻은 것으로 결론을 맺고 있다.
이것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돌보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의 위대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절에서 베드로의 그림자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유사한 경우를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이나(마태9,20-22 ;마르코6,56) 사도 바오로의 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해서 병이 낫고 악령들이 물러나는 경우(사도19,11.12)에서도 볼 수 있다.
당시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의 경우 그 사람과 관련된 사소한 것을 통하여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의 이러한 소박한 믿음을 실제로 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구원할 여건을 조성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의 그림자나 수건등을 통해서라도 병을 치유받고자 했던 사람들의 모습은 다른 한편 그 당시에 얼마나 많은 병자들이 제대로 된 의사들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살았는지를 암시한다.
별다른 희망이 없었던 그들 앞에 치유자가 나타나자 그들은 지금 치유받지 않으면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린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주어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주일 복음(요한20,19~31)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요한 복음 1장 34절에서 세례자 요한이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라고 한 외침이나, 요한 복음 1장 49절에서 나타나엘이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한 고백과 함께 요한 복음 2장 28절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담겨진 신앙 고백이다.
특히 요한 복음 2장 28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된 문맥에서 고백된 내용이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요한 복음사가는 요한 복음 1장 1절에서 본서의 첫 시작을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하였고, 본서의 종결부인 요한 복음 20장 28절에 와서는 '저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
이것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개개인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요한 복음의 강조점을 드러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8절에서는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가 예수님께 대하여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이 하느님의 진정한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는 '~이시며'와 '~이십니다'로 번역되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관사 '호'(ho)가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 천주성)이 더욱 강조된다.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런 뉘앙스를 살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My Lord and my God)라고 번역했다.
토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게 되자 창자국와 못자국을 직접 만져 볼 필요도 없이(요한20,28) 그의 모든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기보다는 놀라움에 찬 탄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토마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놓았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9)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 없는 자'('아피스토스'; apistos)와 '믿는 자'('피스토스'; pistos)가 서로 대조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헤오라카스 ~ 페피스튜카스'; 'heorakas ~pepisteukas)과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 '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이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의 선택은 당시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서의 일차 독자들인 초대 교회 신도들이나,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도 계속해서 던져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들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 다다르지 못한, 수준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루카24,10.11).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들이다.
코린토 1서 15장 5절과 6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은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서야 믿은 자들이다.
얼핏 보기에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더 복있는 사람들인 것 같지만, 요한 복음 20장 29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더 복된 사람들이다.
'믿음 없는 자'(apistos)보다는 보고서라도 믿은 자들이 더 복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들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고, 또한 지금도 직접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근거하여 이 부활의 진리를 믿는, 예수님 승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더 복된 사람들인 것이다(로마10,9).
<토마스> 송영진 모세 신부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요한 20,19)."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뒤에
사도들은 어딘가에 숨어 있었습니다.
박해가 두려워서 숨은 것이지만,
충격, 절망, 슬픔에 사로잡혀서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기만 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 뒤에 놀랍게
변화된 사도들의 모습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하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사도들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는 말씀이 됩니다.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만으로
바람과 파도를 고요하게 하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실제로' 평화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평화' 라는 말은,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게 된 사람들의 은총 상태를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사도들에게 보여 주신 일은(요한 20,20),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이
같은 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신 일은(요한 20,23)
그들에게 '새 힘'을 주신 일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은 일에 대해서
요한복음의 내용과 사도행전의 내용을 구분해서 생각한다면,
사도들은 처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받았고,
오순절 날에는 성령의 은사를 충만히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할 권한'과
'죄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것은
그들에게 구원 사업의 임무를 맡기신 일입니다.
권한은 책임(사명)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구원받을 수 있도록 그 사람을 인도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의 죄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도들이 마음대로 판단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 쪽에서 용서와 구원받기를 거부할 경우에
사도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복음 선포는 구원을 선포하는 일이지만,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멸망을 선포하는 일이 됩니다(마태
10,13-15).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토마스 사도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일종의 상황 설정으로 생각됩니다.
하여간에 다른 사도들의 증언만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하는
토마스 사도의
입장은 오늘날의 우리의 입장과 같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의 증언만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상처들을 직접 보고
손을 넣어 보아야만 믿겠다고 말하는데(요한 20,25),
이 말에 대해서 너무 의심이 많았다고
비판하거나,
너무 지나친 말을 했다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토마스 사도만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사도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24,39).
복음서에는 기록이 없지만,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예수님을 만져 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 사도의 말은
"나도 당신들이 한 것처럼" 그분을 만져 보아야겠다는 말이 됩니다.
복음서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다른 사도들은 믿었는데 토마스 사도만 믿지 않고 의심한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했을
때
사도들 모두가 그 말을 안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마르 16,11)."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 사도만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열한 사도를 모두 꾸짖으셨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토마스 사도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일은(요한 20,26-27)
그에 대한 특별한 사랑과 배려라고
생각됩니다.
그에게 하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라는 말씀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라는 말씀은
그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보았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증언만 듣고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자기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만져 본 다음에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마자 바로 믿었고,
바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그의 신앙고백은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말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한 첫 번째 사도로서
대단히 중요하고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도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기록한 책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믿으면 살
것이고(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안 믿으면 멸망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당시 제자들은 유다인들을 피해 한곳에 숨어 있었지요.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겠습니까? 사형 선고 받으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도망쳐 버린 죄책감,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체포될까 두려운 나머지 공포심이 짓누르고 있었지요. 한마디로 예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시어 평화를 주십니다. 이어 숨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제자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가 어떤지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의식하며 사는지? 그저 기계적이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닌지?
이를 위해 토마스 사도를 눈여겨보고 싶습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에, 자신은 눈으로 본 것만을 믿겠다고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다고 말하기를 거부한 것이지요. 토마스는 미지근한 신앙생활보다는 한번 제대로 의심해 보고, 그 뒤 의심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고자 한 것입니다.
그의 또 다른 장점은 일단 확신을 얻으면 주저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반신반의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토마스 사도의 단호한 신앙 고백은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됩니다.
부활 제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알렐루야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부활은 하나의 기억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지만 자식들은 아버지를 기억합니다. 특히 어머니는 더 자주 아버님을 기억합니다. 가족들에게 아버지는 기억되고 있으며, 이는 곧 부활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인류의 모든 문명과 문화는 ‘상상력, 신화’들의 기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말씀, 표징, 삶이 우리들의 삶과 믿음 안에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삶과 말씀 그리고 표징을 우리의 삶 안에서 기억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부활은 매년 찾아오는 연중행사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이제 두려움과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박해와 시련에 대한 공포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닫았던 문을 열었고 거리로 나가서 주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기 전에 사도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렇게 내세울 것도 없었고, 주님의 수난 현장에서는 모두 무서워 도망갔었고,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었습니다. 그래도 막달레나와 다른 여자들은 주님의 무덤을 찾아가서 주님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을 위해 한 번 더 울려고 했는데, 사도들은 모두 무서워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변했습니다. 그래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런 일들은 하기 시작합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기도 하고,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유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힘이 있고, 확실한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도 하지 않았던 일들도 하게 됩니다. 한 번의 연설로 수천 명을 세례 시키게 됩니다. 정말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은 놀라운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사도들이 나약한 모습에서, 배반자의 모습에서, 무서워 숨던 모습에서 그렇게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였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주님을 배반했고, 무서워 숨어 지냈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시며 사랑의 성령을 주십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은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께 대한 열망을 깨웠습니다. 그들 안에 있던 가능성을 깨웠습니다. 사도들은 이제 예전의 나약하고, 무서움에 떨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변화시킨 것은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고, 못 자국을 만져보아야만 믿겠다고 했던 토마의 불신앙까지도 감싸 안아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주님 부활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봐야 하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고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눈으로 보지 않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았어도 주님의 부활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복되다고 이야기 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만으로도, 주님께서 보여주신 치유의 은사와 그분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길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칭찬은 돼지도 나무에 오르게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진실한 말 한마디, 따뜻한 말 한마디, 사랑이 담긴 말 한마디는 그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부활 하신 주님께서는 무슨 커다란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웃과 가족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셨으면 합니다.
주님 부활의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