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 (요한 8,1-11)

2016. 3. 13. 오전 6: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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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 (요한 8,1-11)


사순 시기의 막바지입니다. 지난 일들을 생각하지 말고 주님께서 시작하시려는 새 일을 알고 주님을 찬양합시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린 바오로 사도처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합시다. 간음한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않기로 다짐하며, 우리 뒤에 있는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내달립시다.

이사야 예언자는 당신 백성을 위하여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주님을 선포한다.(이사야43,16-21)
16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길을 내신 분, 17 병거와 병마, 군대와 용사들을 함께 나오게 하신 분. 그들은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고, 꺼져 가는 심지처럼 사그라졌다.
18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20 들짐승들과, 승냥이와 타조들도 나를 공경하리니, 내가 선택한 나의 백성에게 물을 마시게 하려고, 광야에는 샘을 내고, 사막에는 강을 내기 때문이다. 21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


시편 126(125),1-2ㄱㄴ.2ㄷㄹ-3.4-5.6(◎ 3 참조)
◎ 주님이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주님이 시온을 귀양에서 풀어 주실 때, 우리는 마치 꿈꾸는 듯하였네. 그때 우리 입에는 웃음이 넘치고, 우리 혀에는 환성이 가득 찼네. ◎
○ 그때 민족들이 말하였네. “주님이 저들에게 큰일을 하셨구나.”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기에 우리는 기뻐하였네. ◎
○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
○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모든 것을 버린 바오로 사도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린다고 고백한다.(필리 3,8-14)
형제 여러분, 나는 8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10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11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이미 그것을 차지하였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습니다. 14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엘 2,12-13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데려와 예수님을 떠본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말씀에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떠나간다. 예수님께서도 여자를 단죄하지 않고 이르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1)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온 백성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3 그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4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6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 7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사순 제5주일 제1독서 (이사43,16-21)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18-19)

 

18-21절까지는 하느님께서 선택된 백성을 위해 베푸실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예고하는 내용이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느님께로부터 새로운 은혜를 받을 것을 기대하며, 과거의 기억을 버리라는 명령이다. 

'예전의 일들' 해당하는 '리쇼노트'(rishonoth; the former things)는 복수형 명사로서 과거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사건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Forget the former things, do not dwell on the past.  그렇다면 '예전의 일들'이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탈출>이란 주제로 시작되는 앞의 16-17절의 출애굽 당시의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은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 길을 내신 분, 병거와 병마, 군대와 용사들을 함께 나오게 하신 분, 꺼져가는 심지처럼 사그라졌다." (16-17) 

즉 이스라엘의 맏아들을 구원하시고 이집트의 장자를 죽이신 사건을 비롯해 홍해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시고, 이집트 군대를 수장시켜 버린 사건등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사실 대대로 기억해야 할 일이다(탈출 12,42; 13,10).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기념비적인 일들을 기억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이것은 세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번째는 하느님께서 과거의 출애굽 당시에 행하셨던 구원의 역사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구원하여 주실 것임을 나타낸다.

두번째는 과거의 그 일보다 더 위대한 일, 즉 그 기적을 능가하는 기적 일으킬 것임을 나타낸다.

세번째는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체험할 것이기에  더 이상 과거의 역사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라는 문장은 반어적 수사 의문문이다. 여기에서 '그것'은 앞의 '새 일' 지칭한다.

따라서 이는 새 일 반드시 일어날 것이며,하느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친히 두 눈으로 목격하고, 모두가 그 새 일을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 지니고 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미완료 형태의 동사로서, 장래에 알게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의심하고 믿지 않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질타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본다.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19) 

이것은 출애굽 사건과 다른 방식으로 바빌론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실 것을 보여준다. '광야에 길을'이란 표현은 16절의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 길을 내신' 이라는 표현과 관련되어 있다.

 과거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이끄시기 위해 홍해를 가르고 길을 만드신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에서 가나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시기 위해 그 가운데에 있는 광야에 길을 내실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바빌론에서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 있을지라도 반드시 구원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막에 강을'이란 표현은 바빌론에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내가 나를 위하여 빚어 만든 백성,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21) 

하느님께서 왜 그의 백성을 이방 압제자들의 손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들을 해방하여 고국으로 귀환하게 하시는지, 그 근본 이유를 말해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본래 하느님만을 위한 존재이며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에 해당하는 '암 주'(am zu)' 이 백성은'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문장 성분상 목적어임에도 불구하고 문두에 위치하여 특별히 강조되어 있는데, 많은 백성과 민족 중에서 바로 이 백성만큼은 특별히 하느님 당신을 위해서 만드셨다는 뉘앙스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나에 대한 찬양을 전하리라." (21) 

하느님께서 그의 백성에 대해 기대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찬양을 이방 모든 백성들이 알 수 있도록 만방에 선포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궁극적 목적 바로 이것이다.



 

구에르치노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과 그리스도'


간음하다 잡힌 여자 /유광수신부


그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께서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요한 8,1-11)


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성전에 가셨을 때 온 백성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그분은 앉으셔서 가르치셨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성전에서 온 백성에게 가르치신 내용이다. 그만큼 오늘 복음은 중요하다. 어쩌면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성전이라는 장소와 어느 일부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온 백성이라고 하신 것은 모든 인간 즉 한 사람도 예외 됨이 없이 모든 백성 즉 전체 인류에게 가르치신다는 것이고 앉으셔서라는 표현은 당신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스승으로서 가르치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요한이 사용한 단어는 표현 하나 하나가 의도적인 표현이다.


그렇다면 오늘도 예수님은 성전에서 즉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권위있게 가르치시고 그 가르치신 내용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가르치신 내용이다. 그럼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가르치심의 핵심은 무엇인가?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는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되어 있다. 분명히 이 여자는 현장에서 붙잡혔으니까 율법에 의해 돌을 던져 죽여야할 죄를 지은 여자이다.

그것도 현장에서 붙잡혔으니까 변명할 여지도 없는 현장범인이다. 그뿐인가? 그 때에 내노라고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주장이고 보면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 여자는 꼼짝없이 죽어야할 운명에 처했다

.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의 요구대로 이 여자를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죽이라고 말씀하신다고 해서 잘못하시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법에 있는 대로하라고 한 것이니까 법을 준수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이제부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나 행동은 곧 그들을 가르치시는 내용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학자들과 바라사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율법대로 이 여자를 죽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즉 단죄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것이다. 나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내가 비록 죽을죄를 지었지만 나의 죄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분에게 벌이 아니라 용서를 받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해야할 여자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간음을 했지만 그래서 마땅히 하느님으로부터 돌로 던져 죽임을 당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죽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여인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신다는 것을 깨닫고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여인을 욕하고 비난하고 모욕을 주고 돌로 쳐죽이라고 아우성 치지만 그런 세력 앞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여인을 변호해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이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라."하고 나를 단죄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단죄하는 이들로부터 나를 변호해주시고 감싸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이런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구원이다. 마땅히 죽을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마땅히 돌로 쳐죽임을 당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돌로 쳐죽이게 놔두시는 분이 아니라 그런 이들로부터 여인을 보호해주시고 변호해주시고 단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시는 분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이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여인이 좋은 일을 했고 칭찬 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에 그 여인을 보호해주고 변호해주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를 보호해주시고 변호해주시는 것이다.

여인이 예수님께 와서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청했기 때문에 용서해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 여인이 용서를 청하지 않아도 먼저 그 여인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늘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내가 잘못했건 잘했건 늘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이시고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나의 죄를 먼저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의 용서가 없다면 나는 이렇게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항상 예수님의 용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고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가르침과 다른 점이다. 또 다른 가르침은 가르치시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모세 율법에 따라 여인을 돌로 쳐죽이라고 윽박지르는 그들에게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으시고 "몸을 굽히셔서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무엇을 쓰기 시작하셨다는 것은 그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내용을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남을 단죄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한다. 쓴다는 것은 하나의 의사 표현이다. 즉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그러려면 먼저 잘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고 그것을 정리해서 확신이 설 때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우리가 행동하기 전에 먼저 조금만 생각한다면 남을 쉽게 단죄하거나 모욕적인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남을 단죄할 만큼 그렇게 떳떳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보라. 단죄하고 있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하나씩 떠나갔다."이 말은 자신들의 죄를 생각해 보니까 죄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조금만 성찰해본다면 우리는 그렇게 쉽게 남의 잘못을 단죄 할 수 없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나의 잘못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오늘 나에게 베푸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말씀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가르침을 통해서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이 은혜를 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셔도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기 때문에 여인을 단죄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신다. 그 구원은 여인이 지은 죄를 용서해주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인이 용서를 청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먼저 용서해주시는 것이다.

여인은 다만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는 누구인가? 간음이란 무엇인가? 자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법으로 인정된 것을 벗어나서 불법적인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늘날 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는 누구인가? 우리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 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했다면 그것이 곧 간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겠다고 세례 때에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신다.



사순 제5주일-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오늘의 묵상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오늘 복음 환호송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마지막까지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더라도, 또 인간들이 경솔하게 서로를 단죄하려 해도, 하느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써 생명과 품위와 명예를 되돌려 주시고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간음한 여인은 율법에 따라 중형을 받아야 하고, 바리사이들은 그 상황에 대해 모세의 율법과 하느님의 자비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어느 쪽이든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가려는 인간적 계략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서로를 판단할 수 없는 인간들의 비천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또한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무자비한 심판에서 죄인을 구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메시지를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절망의 상황에 있더라도, 하느님의 메시지는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과거의 잘못들을 모두 지우고 새로운 탈출을 할 수 있다면 진정한 자유가 다가올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조건은 단 하나, 미래를 향한 결연한 각오만을 요구하십니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사순 제5주일 복음 (요한8,1-11)

그들은 주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 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과 그 아내는 주 하느님 앞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창세3,8~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였다." (6)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갑자기 등장한 예수님의 존재는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이루어졌던 성전에서의 매매 행위를  질책하고 단죄하였으며, 안식일 규정까지 어긴 자로 여겨졌다. 그리고 자신들이 갖지 못한 이적을 행하는 권능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가르침과 사회적 입지를 흔들어 놓는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하여 성전 경비병들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요한7,45). 

따라서 이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 이루어진 유능한 이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 결국 파멸케 하려는 계략을 꾸몄다. 이것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가미에 걸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요한8,6ㄱ). 

그들은 예수님을 단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겼기에 이러한 계략은 결국 하느님을 시험하는 불경을 저지른 꼴이 된 것이다. 영적 무지와 종교적 편견으로 가득찬 그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행하겠다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요한 복음 8장 6절의 '쓰기 시작하였다'에 해당하는 '카테그라펜'(kategraphen; started to write)'카타그라포'(katagrapho)미완료 시제로서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 말하자면 '쓰거나 그리기 시작하였다'는 뜻이 된다. 이 동사는 '쓰다'는 뜻 뿐만 아니라 '그리다'(draw figures)는 뜻도 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것예수님께 와서 흥분하며 조급하게 판단을 요구하는 무리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들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을 고소하려는 사악한 음모와 한 여인이 죽을 수도 있는 험악하고도 긴박한 상황 속에서 놀라운 평정심을 유지하시며 땅에 조용히 글을 쓰시는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 흥분된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요한 복음 8장 7절에 나오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는 말씀을 듣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 성서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 쓰신 이 행위가 구약의 예레미야서 17장 13절을 연상시키는 상징적 행위라고 이야기한다. 

요한 복음 8장의 간음하다 잡힌 여자의 이야기에서 요한 복음 8장 6절과 8절에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글을 쓰신 것은 예레미야서 17장 13절을 연상시키는 상징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였다.'(6) '너희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8)

한마디로 '그 여자를 죽이려고 돌을 든 너희들도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당신을 저버린 자는 누구나 수치를 당하고  당신에게서 돌아선 자는 땅에 새겨지리이다.
 그들이 생수의 원천이신 주님을 버린 탓입니다.' (예레17,13)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9) 나이가 많다는 것은 젊은이들보다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젊은이들보다 깨달음과 이해가 먼저 오는, 삶의 경륜과 지혜가 있음을 드러낸다. 동시에 나이가 많다는 것은 오래 살았으니 죄도 많이 지었다는 것이다.


간음한 여인.jpg    

<간음하다 잡힌 여자>송영진 모세 신부


3월 13일의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8장 1절-11절, '간음하다 잡힌 여자'입니다.
그 여자는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이 아니라, 죄를 지은 것이 사실로 밝혀진 사람입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이미 유죄가 확정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 여자를 끌고 간 것은 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벌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예수님의 의견을 물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진짜 관심사는 그 여자를 처벌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고소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사는 당신이 곤경에서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인간들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신다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비와 용서를 강조하셨던 그동안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말을 한다고 비난할 것이고, 여자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면 율법을 안 지킨다고 고발할 것입니다.

또 이 문제를 로마법과 유대법 가운데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로마법에서는 간음죄는 사형죄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신다면
로마법을 안 지킨다고 로마 당국에 고발할 것이고, 여자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면 유대법을 안 지킨다고 최고의회에 고발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질문의 함정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가, 내지 말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함정과 비슷합니다(마르 12,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8,6ㄴ)."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쓰셨는가?" 가 아니라, '침묵'을 지키셨다는 점입니다.
만일에 '무엇'을 쓰셨는가? 가 중요했다면 복음서 저자가 그것을 기록했을 텐데, 기록하지 않은 것을 보면, 복음서 저자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쓰신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목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각자 자신의 양심을 살펴보라는 뜻의(양심 성찰을 하라는 뜻의) 침묵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이 말씀은,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라는 산상설교의 가르침과 같습니다.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께서는(요한 2,25)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를 알고 계셨고, 여자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은 사실상 "돌을 던지지 마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간음죄를 처벌하지 마라."도 아니고 "간음죄는 죄가 아니다."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심판과 처벌은 하느님께서 하실 것이다.
너희는 서로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어라. 너희는 모두 죄인이고 같은 처지이니..."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모세 율법을 폐지하신 것인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17).
사실 죄를 막는 것이(죄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율법의 본래 목적입니다.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그래서 율법의 처벌 규정만 생각하는 것은 율법의 목적을 잊어버린 일이 되고 율법을 미완성 상태로 만드는 일이 됩니다.


구약시대는 죄를 지으면 무조건 처벌했던 시대였을까? 아닙니다. 그때에도 간음죄를 지었지만 사형당하지 않고 용서받은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다윗 왕입니다(2사무 12,13).
다윗은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립니다(요한 8,9).
그들은 말은 안 했지만 행동으로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죄를 인정하는 것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로 회개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들의 숙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자 남은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단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용서하신다는 뜻이지만,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 유예 선고'입니다. 유죄이지만 형의 집행을 유예한다는 것입니다. "가거라."는 "새로운 삶을 향해서 가라."입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는 말씀에는 "다시 죄를 짓는다면 가중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만일에 여자가 회개하지 않고 다시 죄를 짓게 된다면 전에 지은 죄와 다시 지은 죄와 예수님의 용서를 무효화시킨 죄가 모두 합해지게 되니 더욱 엄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돌을 던지지 않고 말없이 떠나버린 사람들과 여자는 모두 같은 숙제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을 우리 자신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용서를 받은 여자를 우리 자신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결론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이고, 우리를 회개시켜서 구원하시는 분인데,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용서와 구원이 우리에게서 완성되려면 우리가 참으로 회개해야 하고, 죄를 안 지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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