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주일 (백) 예수 부활 대축일 ] 부활(요한20,1~9)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화답송 후렴). 주일이 한 주간의 절정이듯, 예수 부활 대축일은 전례주년의 절정을 이룬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죽음과 악의 세력을 이겨 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가장 큰 기쁨이며 희망이다. 오늘 예수 부활 대축일은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 부활의 은총에 감사드리는 날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사도들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 기쁨을 전하며,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신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합시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베드로 사도는 “우리는 그분께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이라며,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상기시키고, 예수님의 부활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고 증언한다.(사도행전 10,34ㄱ.37ㄴ-43)
그 무렵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였다. “여러분은 37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 일어난 일과, 38 하느님께서 나자렛 출신 예수님께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신 일을 알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하시고 악마에게 짓눌리는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39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40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41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42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43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시편 118(117),1-2.16-17.22-23(◎ 24)
◎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또는
◎ 알렐루야, 알렐루야, 알렐루야.
○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 “주님이 오른손을 들어 올리셨다! 주님의 오른손이 위업을 이루셨다!” 나는 죽지 않으리라, 살아남으리라. 주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 ◎
○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 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권고한다.(콜로새 3,1-4)
형제 여러분, 1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2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3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4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파스카 희생제물 우리모두 찬미하세.
그리스도 죄인들을 아버지께 화해시켜
무죄하신 어린양이 양떼들을 구하셨네.
죽음생명 싸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신
불사불멸 용사께서 다시살아 다스리네.
마리아, 말하여라, 무엇을 보았는지.
살아나신 주님무덤 부활하신 주님영광
목격자 천사들과 수의염포 난보았네.
그리스도 나의희망 죽음에서 부활했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보고,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도 달려가 보고 믿는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요한 20,1-9)
1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2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3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4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5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6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7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8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9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 부활 대축일 제1독서(사도10,34ㄱ.37ㄴ~43)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39ㄴ-40)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본문은 베드로가 이방인 백인 대장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증언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구속 사업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갈라디아 3장 1절에서 바오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묘사에 있어서 신명기 21장 23절을 인용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스스로 저주받은 몸이 되시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습니다. 성경에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모두 저주받은 자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장 39절의 '나무에 매달아'에 해당하는 '크레마산테스 에피 크쉴루'(kremasantes epi chsylu; hanged on a tree)도 신명기 21장 23절의 문장 형태와 유사하다.
"죽을 죄를 지어서 처형된 사람을 나무에 매달 경우, 그 주검을 밤새도록 나무에 매달아 두어서는 안된다. 반드시 그날로 묻어야 한다.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상속 재산으로 주시는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신명21,22-23)
베드로는 바오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나무에 매달리심을 신명기 21장 23절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신명기에 따르면, 사람이 범죄하여 처형당할 경우에 그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경계의 표본으로 삼았는데, 시체가 나무에 매달린 것은 그가 저주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베드로가 예수님의 죽음을 말하면서 '십자가'라는 표현이 아닌 '나무'라는 표현을 쓴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저주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저주는 장차 인간들이 당할 모든 저주에서 인간들을 건지는 대속적 저주였다.
베드로는 '나무'라는 단어를 통해 바로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베드로 전서 2장 24절, "그분께서는 우리의 죄를 당신의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죄에서는 죽은 우리가 의로움을 위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의 상처로 여러분은 병이 나았습니다." 에서도 예수님의 죽음을 '(십자)나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한편 '매달아'로 번역된 '크레마산테스'(kremasantes)는 '걸다', '~에 달려있다'를 의미하는 '크레만뉘미'(kremannymi)의 부정(不定) 과거 분사로서 '매단후에' 라는 뜻이다. 즉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매단 이후에 죽였다는 사실이 이 부정 과거 분사형 단어에 나타나있다.
유대인들은 범죄자를 처형할 때 돌로 쳐서 죽였다. 때로 그들은 형을 집행하여 이미 죽은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수치스러움과 저주 받았음을 나타내고,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범죄자를 산 채로 십자가에 매달아 형을 집행하였으며, 본문의 시제는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로마인들에게 십자가 처형을 요구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40)
사도행전 10장 40절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실패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 대한 언급이다. 원문의 뉘앙스를 가지고 번역하면, '하느님께서는 일으키셨다. 그리고 그분은 공공연히 보이도록 그를 내주셨다' 가 된다.
'일으키시어'에 해당하는 '에게이렌'(egeiren; raised up)은 '에게이로'(egeiro)의 부정(不定) 과거 3인칭 단수이다. 고전 희랍어에서 '에게이로'(egeiro)는 세가지 기본 개념으로 쓰였다.
첫째는 '깨우다', '자극시키다'이고, 둘째는 '일으켜 세우다', 셋째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 라는 의미이다. 본절에서는 세번째의 개념인 '죽은 자를 다시 살리다'는 의미로 쓰였다.
한편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로 번역된 '에도켄 아우톤 엠파네 게네스타이'(edoken auton emphane genesthai; caused him to be seen)에서 '엠파네'(emphane)는 '명백한', '보이는'을 뜻하는 형용사 '엠파네스'(emphanes)의 목적격이다.
이 단어는 '나타내다', '전시하다' 를 의미하는 '엠파니조'(emphanizo)와 관련되며 신약에 단 두번 나타난다. 본절은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는 뜻이다.(로마10,20참조).
베드로 사도가 이러한 단어를 사용해서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부활 이후 그를 공공연히 나타나게 하셨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코르넬리우스 집안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들이 이방인들이고,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는 유대인들이 퍼뜨린 헛소문(마태28,13)을 들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일으키셨다(다시 살리셨다)는 말에 이어서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주일 예수 부활 대축일 복음(요한20,1~9)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7)
여기서 '수건'으로 번역된 '수다리온'(sudarion)은 요한 복음11장 44절에서 라자로가 죽음에서 깨어나 무덤에서 나올 때 얼굴에 감싸인 채 있던 수건과 동일한 단어인 것을 볼 때, 장례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수의의 일부분이다. 예수님의 몸을 쌌던 아마포와 얼굴(머리)를 쌌던 수건은 약간 떨어진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아마포'(flax)에 해당하는 '오토니아'(othonia)는 '고운 베' 또는 '세마포'(linen) 라고도 하는 천으로서 이집트(1열왕10,28)나 시리아(에제27,16)로부터 수입되어 팔레스티나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만남의 천막 재료(탈출26,1)나 사제의 의복 재료(탈출28,5~8)로 사용되었다. 이 아마포는 눈처럼 흰색을 가지고 있어서 장례용 수의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요한 복음 19장 40절에는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몸을 감싸는 데 사용한 천으로 나온다. 이것은 비싼 천이었으므로 만일에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면, 이 아마포도 당연히 가져갔을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부활의 간접적 증거가 된다.
또한 '개켜져'로 번역된 '엔테튈리그메논'(entetylligmenon; wrapped; was folded up)의 원형 '엔튈릿소'(entyllisso)는 우리말 '개키다'가 갖는 '잘 포개접다'의 의미가 아니고, 둥그렇게 말려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즉 수건으로 머리와 턱을 동여맸던 상태 그대로 놓여 있던 것이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볼 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면서 부활하신 몸이 신비스런 방법을 통해 수의나 머리를 감싼 수건으로부터 저절로 빠져 나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비유가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수의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 몸만 빠져 나간 것과 같은 모양이다.
그러니 만일에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면, 시신에서 아마포와 수건을 일일히 벗겨내거나, 벗겨냈다 할지라도 그것을 가지고 가지 않고 다시 개켜 놓은 뒤에 시신만 훔쳐 갔을리가 만무한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빈무덤 사화를 부활의 첫 메세지로 선포함으로써 역사의 예수님을 믿음의 그리스도, 생명의 주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받아들이고 믿기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부활의 기쁜 소식이 오늘 교회 안에 울려 퍼집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기고 일어나셨고,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대낮보다 더 밝은 이 밤에’ 창조주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아들, 나자렛 예수님을 영생의 삶으로 불러내십니다. 부활은 죽음에 대한 승리이며, 생명이 다시는 파괴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결과라면,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이 부활로 실패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가 희생과 속죄, 구원의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증명이고, 우리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입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의 첫 번째 증거는 빈 무덤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고,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부활이란 자신을 둘러싼 돌을 치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 생명을 향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의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은 뒤에 새롭게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증오와 죽음, 폭력과 이기심을 버리고, 새로운 삶, 새로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얻게 된 새 생명은 훨씬 풍요하고 기쁘며, 충만하다는 것을 온 세상에 증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과제입니다.
<부활>송영진 모세 신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심판관으로 임명하셨다는
것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사도 10,39-42)."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다음에는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가운데 더러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야고보에게, 또 이어서 다른 모든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8)."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없습니다.
(빈 무덤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의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은 자기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고 증언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다고
고백했고, 자신들의 믿음을 복음으로(기쁜 소식으로) 선포했습니다.
그 증인들의 증언을 믿을 수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삶과 죽음'을
보면, 그들의 증언은 믿을 수 있는 증언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그들이 거짓 증언을 했다면, 자기들의 거짓말을
증명하려고 그렇게 목숨을 바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믿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목숨으로 증명했습니다.
순교자들도 모두
그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친 분들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사도들의
증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고, '죽음' 다음에는 뭔가가 더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즉 이 세상 다음에는 다른 세상이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희망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이 진실이기를 바라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믿으라고 하니까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으니까 기뻐하면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희망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서 부활하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다음 세상을
희망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인간의 인생이 죽는 것으로 끝나버리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부활을 희망하지 않을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다고 해도 안 믿을 것입니다. 아니면 부활 자체를 거부해버릴 것입니다.
사실 믿음과 희망은
하나입니다. 믿기 때문에 희망하지만, 희망하기 때문에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만 나타나신
이유입니다.
그들만 편애하셔서 그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도 자기들이 유령이나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7-19)."
이 말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자들에게 한
말인데,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핵심은 '부활'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모두 헛된 것이 되고, 신앙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됩니다.
이 말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로 바꿔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덧없고 죄에서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산다면, 인간은 다른 동식물들과 다를 것 없는 허무하고 불쌍한 존재일 뿐입니다."
부활도 없고 내세도 없다면, 인간은
하루살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는 존재라면, 역사책에 이름이 기록되고 후손들이 기억해 준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역사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집니다. 내세가 없다면, 그런 사람들의 인생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의 인간 세상을 보면, 아무런 종교도 없고 신앙도 없이, 다음 세상의 목적지도 없이 그저 바람과
파도에 시달리며 떠다니는 풀잎처럼 살다가 허무하게 인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 부활에 동참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하기 위해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부활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믿는다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콜로 3,1-2)."
위에 있는 것을(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은 위로(하느님 나라로) 갈 것이고, 땅에 있는 것만(현세적이고 허무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