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은혜의 해 선포 (루카 1,1-4; 4,14-21)
오늘 독서와 복음은 모두 하느님 말씀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에즈라는 유배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읽어 준다. 백성은 그 말씀을 들으며 참회의 눈물을 흘리지만, 에즈라는 그들에게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힘을 내라고 격려한다.(느헤미야 8,2-4ㄱ.5-6.8-10)
그 무렵 2 에즈라 사제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모든 이로 이루어진 회중 앞에 율법서를 가져왔다. 때는 일곱째 달 초하룻날이었다. 3 그는 ‘물 문’ 앞 광장에서, 해 뜰 때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수 있는 이들에게 그것을 읽어 주었다. 백성은 모두 율법서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4 율법 학자 에즈라는 이 일에 쓰려고 만든 나무 단 위에 섰다. 5 에즈라는 온 백성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으므로, 그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책을 폈다. 그가 책을 펴자 온 백성이 일어섰다. 6 에즈라가 위대하신 주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 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였다. 그런 다음에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하였다.
레위인들은 8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은 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9 느헤미야 총독과 율법 학자며 사제인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이 온 백성에게 타일렀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율법의 말씀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울었기 때문이다. 10 에즈라가 다시 그들에게 말하였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 술을 마시십시오. 오늘은 우리 주님께 거룩한 날이니, 미처 마련하지 못한 이에게는 그의 몫을 보내 주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바오로 사도는, 같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은사와 직분을 주신다고 전한다.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것도 하느님께서 세워 주시는 직분이다.(코린토 1서 12,12-30)
형제 여러분,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14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15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6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서,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17 온몸이 눈이라면 듣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온몸이 듣는 것뿐이면 냄새 맡는 일은 어디에서 하겠습니까?
18 사실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각의 지체들을 그 몸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19 모두 한 지체로 되어 있다면 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20 사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21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고, 또 머리가 두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
22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23 우리는 몸의 지체 가운데에서 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별히 소중하게 감쌉니다. 또 우리의 점잖지 못한 지체들이 아주 점잖게 다루어집니다. 24 그러나 우리의 점잖은 지체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자란 지체에 더 큰 영예를 주시는 방식으로 사람 몸을 짜 맞추셨습니다. 25 그래서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고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26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27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28 하느님께서 교회 안에 세우신 이들은, 첫째가 사도들이고 둘째가 예언자들이며 셋째가 교사들입니다. 그다음은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들, 그다음은 병을 고치는 은사, 도와주는 은사, 지도하는 은사,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29 모두 사도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예언자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교사일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기적을 일으킬 수야 없지 않습니까? 30 모두 병을 고치는 은사를 가질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모두 신령한 언어를 해석할 수야 없지 않습니까?>
루카 복음서 첫머리에서 저자는 복음서가 작성된 과정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첫 설교는, 구약의 예언이 당신 안에서 이제 성취됨을 선언하시는 말씀이 중심이다.(루카 1,1-4; 4,14-21)
1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는 작업에 많은 이가 손을 대었습니다. 2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입니다. 3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때에 4,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루카. 1,1-4; 4,14-21)
선포되는 말씀의 은혜 강길웅 신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셨을 때 사람들은 감동했으며 그분 말씀의 위력에 크게 감탄했습니다. '말씀'은 실로 말씀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성서를 보면 말씀은 그냥 예사 말씀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생성과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분의 말씀 한마디로 이루어집니다.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나병환자가 그 즉시 깨끗해지고 죽은 자가 벌떡 일어섰으며 온갖 종류의 병자들이 완쾌되었습니다. 말씀은 실로 보통 말씀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하느님의 말씀을 경외해야 합니다. 한 집안에서도 어른의 말씀에 순응할 때 평화와 기쁨이 있듯이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말씀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 말씀에 따라 실천해야 합니다. 거기에 백성의 평화가 있고 열린 미래가 있으며 또한 소망의 성취가 있습니다. 말씀을 무시하면 백성은 여지없이 짓밟혔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모습을 여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존재와 그 역사의 과정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백성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의 흥망성쇠는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바빌론의 유배는 그에 대한 백성의 눈을 환하게 뜨게 해 줬습니다. 그들은 노예생활을 통해서 말씀의 소중함과 위대함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사제 에즈라가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말씀 을 읽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타락된 생활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있는지 조차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바빌론에 끌려 가 종살이를 하는 동안 뉘우치고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유배생활에서 돌아왔을 때 에즈라와 느헤미야의 주도로 성전 재건 운동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을 다시 짓고 성곽을 쌓는 데는 백 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사가 완공되고 보니 너무나?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이제 하느님 앞에 체 면이 좀 서는 듯 했습니다. 그때는 마침 초막절이라는 명절이었는데 사제 에즈라가 백성들 앞에서 하느님의 법전을 꺼내어 읽자 백성들 이 너무도 감격해서 울었습니다. 말씀에 불충실했던 과거의 죄악 때문에 울었으며 그렇게 좋은 말씀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축제의 잔치를 벌였습니다.
백성들은 그때 다짐을 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자고.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고 율법을 소중하게 간직하자고. 바로 그때부터 율법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율법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 에즈라는 바로 첫 번 째 율법학자인 셈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나 백성도 뭔가 실패해서 약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말씀에 눈을 뜬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약한 자 안에서 강하게 드러납니다.
오늘 2독서에서도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몸이요 서로가 그 지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몸 가운데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더 요긴하다고 했으며 중요하지 않은 부분을 조심스럽게 감싸고 보기 흉한 부분을 보기 좋게 꾸민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들이 화장을 할 때도 얼굴에서 가장 취약 되는 부분을 더 신경 써서 꾸민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약한 것에 관심 을 더 기울여야 합니다. 이것은 의사의 마음이 건강한 자보다도 병든 자에게 있는 것과 같으며 하느님의 사랑도 죄 없는 사람보다는 실패한 사람, 죄 중에 허덕이는 사람에게 더 가까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신이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구약에서 말한 모든 것이 당신 안에서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죄 많은 세상이 이제 구원을 만났습니다.
모든 말씀은 예수님으로 집약이 됩니다. 거기서 완성이 되고 거기서 구원이 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 슬퍼하는 이들, 그리고 병자와 약자들 안에서 그분의 말씀이 힘을 줍니다. 하느님은 진정 실패한 자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래서 그 말씀을 믿고 존경해야 합니다. 세상에 말들도 많고 좋다는 말씀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주는 말씀, 우리를 구원하시는 말씀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따라서 그 말씀을 소중히 간직합시다. 그리고 말씀대로 실천합시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는 지혜요 힘입니다.
<오늘>송영진 모세 신부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 이 모든 일을 처음부터 자세히 살펴본 저도 귀하께 순서대로 적어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는 귀하께서 배우신 것들이 진실임을 알게 해 드리려는 것입니다(루카 1,3-4)."
'테오필로스' 라는 사람은
가상 인물일 수도 있고, 실제 인물일 수도 있는데,
실제 인물이라면 예비신자였거나 새로 입교한 새 영세자였을 것입니다.
하여간에
'테오필로스'는 예수님에 대해서, 또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더욱 자세한 것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지금 루카복음서
저자는
이 복음서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고 '진실'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진실'이라는 말을 '진리'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읽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해서 배우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은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요한 20,31).
나자렛으로 가신 예수님께서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루카 4,18-19).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사실상 '해방 선포'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온갖 억압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해방'을 선포하신 직후에
하신 말씀이니
이 말씀은, "오늘 너희는 해방되었다." 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지만 "해방이 이루어졌으니
너희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해방'은 감옥 문을 열어 주신 일과 같습니다.
그 문을 열고 감옥
밖으로 나가는 일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어떤 여자가 간음하다
붙잡혀서 끌려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라고
말씀하셨고,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냥 떠나버렸습니다(요한 8,9).
그래서 예수님과 여자만 남게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이 말씀을 '해방'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나는 너를 죄의 감옥에서 풀어 주겠다. 참된 자유를 찾아서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그 감옥으로 들어가지
마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처벌하지 않으시고, 해방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해방과 자유를 참으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일은
그 여자 자신이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또다시 죄를 짓는다면,
예수님께서
주신 해방과 자유를 자기 스스로 버려서 잃게 될 것입니다.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쳐 주신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이 말씀도 '해방'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자, 내가 너를 '병'이라는 감옥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너는 '더 나쁜 감옥'으로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죄' 라는 감옥은 '병'이라는
감옥보다 '더 나쁜 감옥'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는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밀고함으로써 죄를 지었습니다.
'병'이라는 감옥에서 나와서
'죄' 라는 감옥 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은혜로운 해',
즉 '희년'도 선포하셨기 때문에,
'희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희년'은 모든 것이 원상
복구되는 때입니다(레위 25장).
노예들이 해방되고, 모든 빚이 탕감되고, 저마다 자기 소유지를 되찾고...
율법대로 제대로
시행되었다면,
'희년'은 분명히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의 해', '은혜로운 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부자들에게는
'억울한 해'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 착한 부자들은 억울하다고 하지 않고 함께 기뻐했겠지만...)
실제로 희년이 얼마 안 남은
때에는
이자율이 대폭 높아지거나, 아니면 아예 돈을 빌리기도 힘들었습니다.
희년이 가까워질수록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힘들게 살아야만
했습니다.
율법에도 무엇을 팔거나 살 때, 희년에서 몇 해가 지났는지,
또는 희년까지 몇 해가 남았는지를 헤아려서
가격을
매기라고 되어 있으니(레위 25,15.),
희년이 모두에게 꼭 '기쁨의 해'가 되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실천하지 않으면 희년 선포는 말장난 같은 일이 되어버립니다.)
지금 우리는 교황님께서
선포하신 '자비의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이 선포는 '자비의 실천'을 촉구하는 선포입니다.
지금 세상이 너무나도 무자비하고, 서로
용서할 줄 모르고,
증오심만 키우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런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처방으로 '자비'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희년'을 선포했다고 해서
온 세상이 저절로 자비로운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스스로 실천해야 선포가 말로만 끝나지
않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증오심과 복수심을 버리고,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고, 사랑하고...)
다시 예수님의 복음
선포(해방 선포)로 돌아가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라는 말씀을,
"이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면,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부터 실천하여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사실상
'지금'입니다.)
나중에 해도 되는 일이 아니고, 전에 했다고 안심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지금, 이곳에서, 내가" 실천해야 합니다.
주일 미사 못 가면 죄인인가요[서공석 신부] 1월 24일(연중 제3주일) 루카 1,1-4; 4,14-2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어느 안식일에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성서를 낭독하신 이야기입니다. 낭독하신 것은 이사야서(61,1-2; 58,6)의 몇 구절입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낭독을 들은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고,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첫머리에서 복음서 저자는 말합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그분의 제자 되어 그분의 말씀을 전파한 사람들이 기록으로 남긴 문서들이 있었고, 자기는 그 기록 외에도 자기 자신이 따로 ‘살펴본’ 자료를 ‘순서대로’ 엮어서 복음서를 집필하였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기록으로 혹은 구전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정리하여 집필한 역사적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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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펼치는 예수', 제임스 티소.(1886) | ||
루카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이 복음 선포를 당신의 고향인 나자렛에서 시작하게 엮었습니다. 그는 나자렛에서도 유대교 회당을 첫 복음 선포의 장소로 택했습니다. 유대교를 모태로 발생한 예수님의 복음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복음 선포를 시작하게 한 것은 그 예언서의 말씀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잘 부합한다고 저자가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 곧 이 세상의 실패자들과 불행한 이들에게 메시아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선포하는 내용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식민지로 오랫동안 전전하면서 메시아가 오면 그들의 국권을 먼저 회복해 주고, 그들의 적을 “질그릇 부수듯이.... 짓부수어서”(시편 2,9) 이스라엘이 세상 만방을 다스리게 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상상하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일상의 모든 일 안에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손길을 읽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햇볕, 곡식을 자라게 하는 비, 들에 핀 꽃, 밭에 익어 가는 곡식, 이 모두가 그분에게는 하느님이 하시는 은혜로운 일들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생각할 때도 자기중심적입니다. 이스라엘은 식민지 신세를 면하게 해 주는 메시아를 기대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를 시험에 합격시켜 주고, 사업을 성공시켜 주는 하느님을 찾습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 높은 사람, 강한 사람 편에 서신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도 아니고,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그런 하느님은 우리의 소원을 들어 주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합니다. 그 하느님은 몇몇 사람에게 권위와 성공을 보장해 주는 분입니다.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 내는 하느님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으셨다는 이사야서의 구절들은 하느님의 영이 내리자 모든 불행한 이들이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체험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는 말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선포하는 예수님이 인류역사 안에 나타난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는 예수님 안에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보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들은 그 은혜로우심을 사람들에게 알리며 스스로 실천하였습니다.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셨습니다.
우리는 한 가지를 긍정하면, 그것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쉽게 부정합니다. 흑백 논리입니다. 유대교는 율법 지키기를 권장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모두 단죄하였습니다. 율법은 본시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자각하며, 그분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여, 하느님이 인간 안에 살아 계시게 사는 데에 필요한 지침이었습니다. 유대교는 성전에 제물을 바치라고 강조하면서 제물 봉헌을 하지 못하는 이들 모두를 죄인으로 매도하였습니다. 제물 봉헌은 본시 자기가 얻은 것을 하느님 앞에 가져와서, 베푸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에게도 그것이 은혜롭게 나누어지게 하는 의례였습니다.
우리는 결혼을 신성한 것이라 말하면서, 결혼 생활에 실패한 이들을 쉽게 외면합니다. 우리는 주일 미사가 중요하다 생각하면서, 그것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관행입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성공과 실패의 흑백 논리로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는 잘못을 범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알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성공과 실패에 구애받지 않고,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자각하고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의 성공과 실패가 하느님을 알아보는 기준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자비와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카 6,36)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부모도 성공과 실패를 기준으로 자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낭독하였다는 이사야서가 나열하는, ‘가난한 이’, ‘잡혀간 이’, ‘눈먼 이’, ‘억압받는 이’는 모두 실패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게 하느님이 은혜롭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런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자주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성공과 실패의 흑백 논리가 우리를 두려워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논리가 주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논리를 벗어나서 해방하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유일한 화두가 있다면, 그것은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은혜로움을 실천하지 않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을 잊어버리면, 잊어버린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과 무관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잊어버린 유대교 기득권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당신네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마태 21,31) 세리와 창녀는 율법 준수에 실패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도 내리셔서 우리도 성공과 실패라는 우리의 논리에서 벗어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서 우리도 자비롭고 은혜로운, 참으로 자유로운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서공석 신부(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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