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고향에서 설교 (루카4,21-30)
(해외 원조 주일)
한국 교회는 해마다 1월 마지막 주일을 ‘해외 원조 주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3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해외 원조 사업에 대한 올바른 홍보와 신자들의 의식 강화를 도모하고자 ‘해외 원조 주일’을 정하였다. 오늘 특별 헌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지의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원조에 쓰인다.
예레미야를 당신의 예언자로 부르시는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가 당신의 말씀을 믿지 않으려 하는 임금들과 사제들과 백성에게 맞서야 하겠지만, 그들 앞에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느님께서 그를 보내시고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4-5.17-19)
요시야 시대에, 4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5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17 그러므로 이제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바오로 사도는 어떤 은사보다 뛰어난 것이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예언도 지식도 사라지겠지만 사랑은 스러지지 않는다. 언젠가는 우리도 그분을 온전히 알고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코린토전서 12,31─13,13)
형제 여러분, 31 여러분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3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4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8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9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합니다. 10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11 내가 아이였을 때에는 아이처럼 말하고, 아이처럼 생각하고, 아이처럼 헤아렸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이 적의 것들을 그만두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3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설교하실 때, 사람들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한다. 그러나 그분을 요셉의 아들로 알고 있는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믿기 어려워한다.(루카 4,21-30)
그때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21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24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연중 제4주일 제1독서 (예레1,4-5.17-19)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선별하였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5)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직접 예언자의 소명을 주셨음을 밝힌 예레미야서 1장 4절에 이어지는 예레미야서 1장 5절 ~ 10절에서는 예레미야의 예언자로서의 소명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예레미야와 하느님 사이의 대화체 형태의 문장들이 소개된다.
본절에서는 하느님께서 직접 화법을 사용하여 예레미야의 예언자 소명을 계획과 선택의 관점에서 밝힌다.
예레미야가 소명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소명이 하느님의 계획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계시하시므로 그에게 확신을 심어준다.
한편 시간적 관점에서 볼 때,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와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그를 아시고 예언자로서 성별하셨으며, 그것에 근거해서 그를 지으시고 나오게 하셨다는 의미, 즉 시간의 진척과 함께 하느님께서 예레미야에 대해 계획하신 바를 구체화시키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한다.
여기서 '모태에서 너를 빚기전에'란 표현은 성경상의 용례를 감안할 때(이사44,24; 갈라1,15), 문자적으로 단순히 모태에 수태되기 전을 의미하기 보다는 영원 전에 이루어진 하느님의 계획과 결정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즉 하느님께서는 태초부터 예레미야를 아셨던 것이다.
그리고 '너를 알았다'로 번역된 '예디으티카'(yedihthika)의 원형은 '알다'(창세3,7), '깨닫다'(탈출34,29), '간섭하다'(창세39,6), '선택하다'(창세18,19), '동침하다'(창세4,1)라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 동사 '야다으'(yadah) 이다.
이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며, 사실 관계에 대한 피상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하여 얻어진 본질에 대한 확실한 앎을 의미한다(창세3,7).
본문에서 이 단어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예레미야에 대하여 머리카락 하나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신(마태10,30) 만큼 온전히 아셨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그와 얼마나 친밀하고 가까운 분이신지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풀이된다.
'태중에서 나오기 전에 내가 너를 성별하였다'
'너를 성별하였다'에 해당하는 '히크따쉬티카'(hiqdashithika)는 '거룩하게 하다','거룩히 구별하다','거룩하고 깨끗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다쉬'(qadash)의 사역형(Hiphil)으로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사명을 위해 예레미야를 거룩히 구별하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사역형 동사가 사용된 것은 행동의 주체가 바로 하느님이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자신의 사명을 위해 예레미야를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선언은 그가 활동 내내 계속되는 생명의 위협(예레11,18)과 감금(예레38,6 ;39,15),매국노라는 오해와 모욕을 견디며 예언자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끝까지 완수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聖徒) 즉 '거룩한 무리'로 선택을 받아 부르심을 입었다는 거룩한 성별 의식을 가질 때, 신앙 생활 가운데서 어떠한 시련과 유혹, 고난과 역경이 닥칠지라도 성도의 본분과 사명을 꿋꿋하게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민족들의 예언자로 내가 너를 세웠다'
여기서 예레미야의 예언자 직무가 남부 유다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만국에까지 미친다는 사실이 명시된다.
'세웠다'라는 의미의 '네탓티카'(nethatihka)는 '주다'(창세1,29), '놓다'(창세15,10), '세우다'(창세17,2)라는 의미의 동사 '나탄'(nathan)의 원형이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내가 세울 것이다'라는 의미인 '나탄'(nathan)의 미완료형 '에텐카'(ethenka)를 사용하지 않고 완료형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예레미야의 예언자 임명이 이미 하느님의 결정 사항으로서 확정되었으며, 절대 불변할 것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마치 거룩한 임직식을 거행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만국의 예언자로 임명하시되 천상의 왕이신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자신의 충성스런 대사로 임명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세상의 어떤 핍박이나 유혹, 회유에 대해서 타협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자신을 예언자로 세우신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결정에 순명하는 것만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한 임직에 대한 확신은 오늘날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봉사자로 일하는 이들 모두가 반드시 가져야 하며 결코 이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한결같이 충성스런 소명자로 서게 하는 굳건한 토대가 될 것이다.
한편, '민족들'로 번역된 '꼬임'(goim)은 단수형 '꼬이'(goi)로 사용될 때에는 '민족'(창세12,2), '사람들'(2열왕6,18), '무리'(욥기1,6) 등의 집합적인 개념을 가진다.
그러나 본문처럼 복수형으로 사용되면, '인류'(이사42,6), '이교도'(에제5,6-8), '이방민족'(탈출34,24) 등의 집합적인 의미가 보다 강조된다.
따라서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웠다는 표현은 예레미야의 활동의 범위가 어디에까지 이르는 것인지를 나타내준다. 예레미야는 남부 유다 뿐만 아니라 이방 나라에 대해서도 예언자로서 활동해야 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인생 후반기에 몇 년 동안 이집트에서 살았던 것 외에 외국에 간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레미야서 46장~ 51장의 여러 나라들을 향한 신탁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그의 예언이 유다를 포함하여 많은 나라들에도 영향을 미치는 예언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해 하느님의 심판과 멸망을 선포했을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심판과 멸망을 예언하였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가 선포한 예언대로 모든 것을 행하시고 이루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민족들의 예언자로 임명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유다에만 국한되는 지역神 이나 자기 백성도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한 神이 아니라 민족들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전 우주적인 주권자이심을 나타내준다.
아울러 남부 유다 멸망 당시 대표적인 예언자인 예레미야를 가리켜 이처럼 민족들의 예언자로 세우셨다는 표현은 구원사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함축한다.
즉 선민의 나라인 남부 유다가 멸망당하고, 하느님의 백성들의 약속의 상속인 가나안 땅이 아닌 이방 땅에 흩어져 살지만, 그들이 흩어져 사는 이방 땅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시며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고 계심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연중 제4주일 제2독서 (1코린12,31-13,13)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12)
코린토 전서 12장 11절과 12절은 10절의 '그러나 온전한 것이 오면 부분적인 것은 없어집니다' 에 대한 예언이며, <사랑의 영원성> 에 대한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주어진 구절이다.
본절에서 바오로는 '지금은'(arti ; 아르티)와 '그때'(tote ; 토테)란 상반된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를 통해, <은사의 현재성>과 대비되는 <사랑의 영원성>을 매우 명확하게 드러낸다.
말하자면, 코린토 교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재적 실존>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체험하게 될 <미래적 실존> 사이에는 분명히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거울의 비유를 통해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거울'로 번역된 '에솦트루'(esoptru)의 원형 '에솦트론'(esoptron)은 '~안에' 란 뜻의 전치사 '에이스'(eis)와 '보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 '옵타노마이'(optanomai)의 합성어에서 파생하며, '안에 보이는 것' 이란 문자적 뜻을 가진다. 이것은 오늘날의 유리와 수은으로 만든 거울(mirror ; glass)과는 달리, 청동에 광을 낸 거울을 뜻한다.
이것은 코린토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이었으나 고가품이었으므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거울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에는 코린토 지방의 거울이 다른 지방의 거울보다 질이 좋은 것으로 여겨졌으나, 이것 역시 오늘날과 같이 잘 비치는 거울이 아니었다. 따라서 거울이 희미하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식적인 지적일 뿐이다.
'희미하다', '어렴풋하다' 라고 번역된 '아이니그마티'(ainigmati)의 원형 '아이니그마'(ainigma)에서, '수수께끼', '불가사의한 일' 을 뜻하는 '에니그마'(enigma)라는 말이 파생되었다는 것은 당시에 거울을 보는 것이 얼마나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반면에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이다' 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종말의 때에는 완전하게 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2코린5,7) 이러한 비유의 결론으로서, 바오로가 현재는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전지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과 같이 온전히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 알지만' 으로 번역된 '기노스코'(ginosko)가 현재형인 반면에,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이다' 로 번역된 '에피그노소마이'(epignosomai)는 생각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피'(epi)와 '기노스코'(ginosko)의 합성어인 '에피기노스코'(epiginosko)의 부정(不定) 과거형이다. 여기서 접두어로 사용된 '에피'(epi)가 강조적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 행동을 나타낼 때 쓰이는 부정 과거형이 사용된 것은 하느님께서 온전히 아시며, 하느님께서 아시는 지식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지 않는 온전하며 절대적인 지식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도의 지식 또한 종말의 때에 그처럼 분명해 질 것이라는 뜻을 드러낸다.(Now I know in part ; then I shall know fully, even as also I am fully known.)
그런데 본문에는 종말의 때에 성도가 확실하게 알게 되는 대상이 무엇인지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적으로 표현하지 않음으로 인해, 성도가 알게 되는 대상이 더욱 넓고 크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규명할 필요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13장 2절에 나와 있는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 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의 전지하심(omniscience)이 포괄하는 앎의 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사업의 진리를 말한다고 봄이 좋다. 즉 종말의 때가 되면 그때까지는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던 구원사업의 진리에 대하여 확연히 알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13)
본절은 <사랑의 찬가> 로 불리워지는 13장 전체의 최종적 결론으로서 <사랑의 영원성과 우월성>에 대한 선언이다.
바오로의 서간 어디에서도 본절과 같이 이렇게 분명하게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표현을 결합시킨 적이 없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오로의 전반적인 사상에서는 이 세가지를 한데 묶는 경향이 농후하고, 이 세 가지를 그리스도교의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들로 여기는 경향이 드러난다.(콜로1,4.5 ; 1테살1,3 ; 5,8)
한편 바오로는 '그러므로 이제' 로 번역된 '뉘니 데'(nini de)로 본절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강조점은 시간적 의미의 현재에 있다기 보다는 논리적인 결론의 도출에 있다.
즉 바오로는 13장 8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예언, 신령한 언어, 지식 등의 여러 개별적 은사들은 사라질 것이지만, 이와 반대로 믿음, 희망, 사랑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계속됩니다' 로 번역된 '메네이'(menei ; remain)는 '남아 있다', '머물다' 라는 뜻을 지닌 '메노'(meno)의 현재형이다. 희랍어에서 현재 시제는 현재의 사실과 더불어 지속되는 사실을 나타낼 때도 쓰이므로 본문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현 세대 뿐만 아니라 오는 세대에서도 지속될 것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공통적으로 그리스도 재림으로 완성될 하느님 나라와 밀접하게 관계되는 종말론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계속 된다'(항상 있다) 라는 것을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오로는 시간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계속됩니다' 란 표현은 극복된 시간, 곧 영원을 언급한 것이다.
영원은 결코 시간의 범주에 포괄되지 않는 영역이다. 영원은 끝없이 계속 연장된 시간의 지속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묵시록 10장 6절에서 '영원무궁토록' 이란 말로 언급하고 있듯이,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분을 두고, 하늘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땅과 그 안에 있는 것들, 바다와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창조하신 분' 에게만 적용되는 신의 영역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은 시간과 반대되는 영역이다.
한편,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모두 종말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면, 바오로는 왜 유독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셋중에서 사랑이 으뜸이라고 말하는가? 여기서 '으뜸은'으로 번역된 '메이존'(meizon ; the greatest)는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뜻이다.
사랑은 믿음과 희망을 산출하는 근거와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으면 믿음과 희망의 근거가 없어지며, 더 이상 믿음과 희망이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랑의 우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믿음과 희망은 자신을 위한 것이나, 사랑은 타인을 위한 덕목이라는 데서도 사랑의 우월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사랑이 하느님의 속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교적 삶을 시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지속하게 하는 필수 조건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 자체는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 될 수 없다. 즉 그것은 하느님 스스로에게 요구되는 속성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은 희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의 희망이 하느님의 영원하심과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 스스로는 희망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시간 안에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이시지만, 그 자신 스스로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으신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 스스로가 희망하신다면, 그는 더 이상 우리들이 믿는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더 이상 우리들의 하느님이 아닌 것이다.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가장 위대한 것이다.(갈라5,5.6)
사랑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오래 지속되기 때문에 으뜸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기 때문이며, 나아가 그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닮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4,7.8)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요한4,12) 사도 요한은 사랑이 믿음과 희망에 비해 독보적인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연중 제4주일 복음 (루카4,21-30)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1)
아마도 성경 봉독 후 예수님께서 하신 교훈의 말씀이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깊었으며, 내용도 풍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루카 복음 4장 21절과 18절, 19절의 내용만으로도 예수님께서 베푸신 가르침의 요지를 전달하기에 충분하므로, 루카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 4장 21절로 압축 요약해서 전달하였다.
21절에서 '이루어졌다'로 번역된 '페플레로타이'(peplerotai; is fulfilled)는 구약 예언의 완성과 성취를 드러내는 전문용어인 '플레로오'(pleroo)의 수동태 완료로서 이사야서 61장 1~2절의 예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회당의 청중들에게 이미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즉 이사야서 61장 1~2절에 나오는, 주님의 영을 받은 의로운 종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며, 당신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 이미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증명하는 중요한 예언으로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앞으로 계속 성취될 예언이기도 한 것이다.
즉 가난한 이들이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 죄와 죽음의 권세에 잡혔던 이들이 자유롭게 되며, 영적으로 눈먼 이들이 진리를 보게 되고,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희망 가운데 기쁨을 회복하며, 주님께서 베푸실 구원의 은혜로운 해가 도래하는 등의 일들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생명, 자유와 평화, 그리고 치유와 하느님의 의로운 통치를 동반하고 육화(강생)하신 천주 성자 제2위 하느님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고, 또한 성취되어 가는 이같은 일들은 오늘날에도 지구촌 곳곳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이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으며, 예수님 재림때까지 끊임없이 진행될 것이다.

평소에는 전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아서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이, 뜻하지 않은 좋은 말이나 선행을 보일 때 당연히 의아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뭔가 다른 이유가 있고 보이지 않는 손익 계산이 분명해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지 하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 사람이 혹시라도 마음을 고쳐먹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도, 변덕스러운 사람이기에, 얼마 안 가서 본심을 드러내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갖고 있는 선입견과 판단이 이렇게 눈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인 나자렛에 오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으로 그분께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니, 과연 소문대로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면서도, 그분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그들은 이 놀라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못합니다. 한낱 목수의 아들인 그분에게서 그런 말씀들이 나오는 것이 뜻밖이며 의아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어떤 기적을 행하신다면 믿어 보겠다는 자세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태도로는 기적을 베풀어 주어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느님을 뵙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5,8 참조).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놀라운 일은 놀라운 일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보고 깨닫게 되어 신앙에 도달하여 우리도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루카 4,22)."
예수님께서 나자렛에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셨을 때,
사람들은 그 복음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안 믿었고,
또
회개하는 것이 싫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을 좋게 말하며'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뜻입니다.
'은총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은총을 주는 말씀', 즉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의 복음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정했음을 나타냅니다.
(처음에
잠깐 동안만...)
'놀라워하였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경탄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보잘것없게 보이는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놀랐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는 말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가
나중에 알아보게 되었음을
나타내는데,
앞의 '놀라워하였다.' 라는 말과 연결하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본 다음에
"요셉의 아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라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마태 13,57; 마르 6,3).
나자렛 사람들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
따위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놀라면서 기분 나빠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삶'을 보지 않고 겉모습만 본다면,
그래서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출신, 학력, 직업, 외모
등을 문제 삼아서
그를 배척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도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반역하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사도행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사도 4,13)."
세속의 눈으로만 보면,
예수님과 사도들은 모두 무식하고
평범하고 천한 시골 사람들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가난한 시골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최고의회의 수장인 대사제였다면,
사람들의 반응이 달랐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그를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어느 날
헤로데가 연설을 하자 사람들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라고 외칩니다(사도 12,22).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아부하느라고 그런 말을 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외쳤을
것입니다.
(요즘에도 겉모습만으로 사람들을 홀리는 가짜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겉모습만 그럴듯한 정치인들도 같은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사람들에게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십니다(루카 4,25-27).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믿고, 믿음을 실천하는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루카 4,28-29).
(그들
자신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회개하는 것도 싫고, 말씀을 실천하는 것도 싫어서 그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어떻게 살든지, 무슨 죄를 짓든지
무조건 구원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 약속은 구약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충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한다면 구원해 주시겠다는 약속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있었고,
그 자만심 때문에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루카
3,8)."
이 말은 그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닌 것처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무조건 천당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믿기만 하면' 천당
간다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일은 '내부 박해'입니다.
다른 종교를 거부한 일이 아니라,
자기들이 믿는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정의 실현을 위해서 일하다가,
또는 교회 지도자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다가 내부 박해를 받는 일이
많습니다.
박해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믿으니까 그러겠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나자렛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