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생명의날] 평화 (요한 14,23-29)

2016. 5. 1. 오전 7:58:16

글자

 http://cafe.daum.net/roma3/HgBR/426 
 

[부활 제6주일.생명의날] 평화 (요한 14,23-29)


해마다 5월의 첫 주일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죽음의 문화’의 위험성을 깨우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게 하는 ‘생명 주일’이다. 한국 교회는 1995년부터 5월 마지막 주일을 ‘생명의 날’로 지내 오다가, 주교회의 2011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이를 ‘생명 주일’로 바꾸며 5월의 첫 주일로 옮겼다. 교회가 이 땅에 더욱 적극적으로 ‘생명의 문화’를 건설해 나가자는 데 뜻이 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문제로 혼란이 일어나자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회의를 열어 몇 가지 필수 사항을 정해 안티오키아 교회에 전한다.(사도행전 15,1-2.22-29)
그 무렵 1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내려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고 형제들을 가르쳤다. 2 그리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람과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분쟁과 논란이 일어나, 그 문제 때문에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신자들 가운데 다른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
22 그때에 사도들과 원로들은 온 교회와 더불어, 자기들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뽑아 바오로와 바르나바와 함께 안티오키아에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뽑힌 사람들은 형제들 가운데 지도자인 바르사빠스라고 하는 유다와 실라스였다. 23 그들 편에 이러한 편지를 보냈다.
“여러분의 형제인 사도들과 원로들이 안티오키아와 시리아와 킬리키아에 있는 다른 민족 출신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24 우리 가운데 몇 사람이 우리에게서 지시를 받지도 않고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 가지 말로 여러분을 놀라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25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뽑아 우리가 사랑하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여러분에게 보내기로 뜻을 모아 결정하였습니다. 26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27 우리는 또 유다와 실라스를 보냅니다. 이들이 이 글의 내용을 말로도 전할 것입니다. 28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29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요한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본다. 거기에는 성전도 해도 달도 없다. 하느님과 어린양이 성전과 등불이 되어 주신다. (요한 묵시록 21,10-14.22-23)

10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 11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2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3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 있었습니다. 14 그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22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23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남기고 가시며,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복음 14,23-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3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24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28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9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6주일 제1독서 (사도15,1-2.22-29)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8-29) 

'성령과 우리는 ~ 결정하였습니다' 

'결정하였습니다'로 번역된 '에독센'(edoksen)사도행전 15장 22절과 25절에도 그대로 나오는 단어이다. 이것은 '좋게 여겼다'(It seemed good to the Holy Spirit and to us~)는  기본적인 뜻과 더불어 '결정했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방인에게 할례가 불필요하다는 결정은 사도들과 원로들뿐만 아니라 성령까지도 뜻을 함께한다는 사실이 본문에 나타나 있다. 특히 여기서 '성령'을 언급하는 것은 이 결정이 단순히 인간의 뜻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의 인도로 된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지혜의 영이신 제3위 성령 하느님까지도 이방인에게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뜻을 나타냄으로써 사도들과 원로들이 그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못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원로들이 어떻게 성령의 뜻을 알았을까 하는 것사도행전 15장 6-21절까지 기록된 회의 진행 과정에서 성령께서 나타나  그 뜻을 밝혔다는 진술은 보이지 않지만, 사도행전 저자가 기록하지 않았을 뿐, 사도들과 원로들은 성령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느님께 진지하게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다.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몇 가지 필수 사항'으로 번역된 '에파낭케스'(epanangkes)는 신약 성경에서 여기 밖에 쓰이지 않는 단어로 '부득이','불가피한' 등의 의미이다. 이것은 이방인이 지켜야 할 네 가지 기본적인 금기 사항(20절)을 불가피하게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쓰여진 단어이다.

이것은 이방인 구원의 조건으로서가 아니라 유다인 출신 신자들과의 거리낌 없는 친교와 이방인들 주변에 있는 디아스포라(Diaspora; 교포와 같은 의미로 흩어져 있는 유다인 공동체)를

복음으로 이끌어들이는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조치였다. 그리고 네 가지 기본적인 금기 사항(20절)은 5월 2일 독서의 말씀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네 가지 필수 금기 사항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짐'으로 번역된 '바로스'(baros)는 원래 '무게'(weight)를 의미하는 단어였는데, '무거운 것' '짐'(burden) 또는 무거움 때문에 느끼는 '고통'(suffering)이라는  단어로 발전하였다. 

우상의 제물, 피,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은 이방인들에게 심적 부담과 고통이 되지 않지만,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행하고 모세 율법 전체를 지켜야만 하는 것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요, 고통이라는 사실이 본문에 잘 드러나고 있다. 

복음의 진수를 바로 깨닫고 있는 사람은 구원을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과 심적 부담을 주지 않으나 하느님 은총의 복음의 진수와 그 깊이를 깨닫지 못하고 편견과 독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구원을 조건으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큰 부담과 고통을 안겨 주게 되는 것이다. 

바오로는 갈라디아 신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가르쳐 주었지만(갈라5,1-4), 콜로새 교회에 이단을 퍼뜨렸던 어떤 자들은 사람이 감당치도 못할 금기 사항을 주장해 그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는 것(콜로2,21)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스스로 삼간다'는 것은 이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번역된 '유 프락세테'(yu praksete)에서 '프락세테''행하다'(do)는 의미를 지닌 '프랏소'(prasso)의 미래 능동형으로서 '행할 것이다'라는 의미이고, '유'(yu)'잘'(well)이라는 의미이다.  즉 '잘 행할 것이다' 라는 뜻이다. 

이것은 곧 제반 신앙 생활을 잘 수행하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맺어나갈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예수님 믿기 전에 행해 오던 악습을 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신앙의 성장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송영진 모세 신부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이 말씀은, 어떤 제자가(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요한 14,22),
그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4장 21절의 말씀을 반복하신 말씀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그 제자의 질문은 초대 교회 신자들의 의문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만 나타나시고,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안 나타나신 것일까?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신다면
그들도 금방 믿게 될 텐데... (선교활동이 아주 쉽게 될 텐데...)"


예수님의 말씀에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라는 말씀은,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하느님(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 라는 말은, 하느님의 삼위일체를 암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간단하게 줄이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나를 알아보게 된다."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신자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신자들만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안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더라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우리 눈으로는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약속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과거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멀리 떨어진 곳, 즉 하늘에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를 보면,
처음에는 예수님을 '낯선 나그네'로만 생각했습니다(루카 24,15-18).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0-31ㄱ).
그랬는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고,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루카 24,31ㄴ).
예수님께서 사라지셔서 보이지 않게 된 다음에 두 제자의 모습을 보면,
그들은 놀라거나 당황하지도 않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예수님을 만났다는 감동과 기쁨 속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루카 24,32-33).
그리고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언합니다(루카 24,35).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도 거의 같습니다.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생각했습니다(요한 20,15).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시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요한 20,16).
그랬는데 제자들에게 가서 당신의 부활 소식을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지시하시자
예수님 곁을 떠났고,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증언합니다(요한 20,18).


엠마오의 두 제자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떠나셨고,
마리아 막달레나의 경우에는 마리아 쪽에서 떠났지만, 사실상 같은 상황입니다.
몸으로는 함께 있지 않게 되었지만,
영적으로는(신앙적으로는) 함께 있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의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상시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눈으로 직접 보느냐 못 보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느냐, 아니냐?,
또는 느끼느냐, 아니냐?, 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을 가능하게 해 주는 열쇠는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사랑한다는 것이 막연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말장난'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어떤 물증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워도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
예수님께서 자기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 믿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에서도 '깨달음'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체험과 느낌과 깨달음이 저절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말씀들을(계명들을) 충실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먼저 사랑하여라."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십니다.


부활 제6주일 복음 (요한14,23-29)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6)

요한 복음 14장 26절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의 역할을 명백히 보여 주시는 중요한 말씀이다.

첫째로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에 해당하는 '판타'(panta; all things)가르치실 것이다.

'가르치시고'에 해당하는 '디닥세이'(didaksei; will teach)'디다스코'(didasko)의 미래 시제로서, 미래에 성령께서 계속해서 믿는 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실 것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가르치는 교사로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실 것임을 말씀해 주신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진리의 영이시므로, 우리를 언제든지 하느님의 완전한 뜻 가운데로 인도하실 수 있다 (1코린2,10).

성령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인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많이 내게 되는 이유가 이것이다(갈라5,22,23).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의 감화나 감동하심에 민감해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를 일깨워 알게 하시는 것은 물론, 주의와 경고에 대해서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이다 (1테살5,19).

둘째로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계속 기억시키신다.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에 해당되는 '휘폼네세이'(hypomnesei; will remind)'휘포밈네스코'(hypomimnesko)의 미래 시제로서 '계속해서 회상시키실 것이다', '계속해서 깨우치실 것이다'라는 뜻을 전달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 이 땅에 남아 있어 구원의 길을 보여줄 것이며,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의 활동임을 보여 준다.

요한 복음사가가 여기서 특히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당시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지만, 성령 강림 이후에는 그 말씀의 의미를 밝히 깨달았음을 기억하여, 초대 교회 신도들도 성령의 역사(役事)에 힘입어 말씀의 의미를 밝히 알게 된다는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이다.

               


   오늘의 묵상

오래된 교회 전승에 따르면, 요한 사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침대에서 끊임없이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내 자녀들아,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을 우리에게 전해 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것입니다. 그만큼 사랑의 계명은 중요합니다. 도처에 폭력과 전쟁이 가득한 이 세상에 더욱 절실한 계명입니다.
사랑의 다른 이름은 평화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화가 강한 힘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강한 힘에서 오지 않고 그분의 사랑이 꽃피운 십자가의 영광으로부터 옵니다. 용서와 희생과 자기 비움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옵니다.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신 스승님께서는 제자들이 안쓰러우셨습니다. 제자들을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깨닫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싸여 있던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로 바뀐 것입니다. 자신들이 생각해도 놀라운 변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부활에 대한 확신과 열정을 느꼈습니다. 우리도 사도들처럼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갖도록 합시다.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일복음강론

목록 전체보기 →
[성령 강림 대축일]성령을 받아라 (요한 20,19-23)16.05.14조회 62[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16.05.08조회 558[부활 제6주일.생명의날] 평화 (요한 14,23-29)16.05.01조회 61[부활 제5주일]새 계명 (요한 13,31-33ㄱ.34-35)16.04.24조회 350[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27-30)16.04.16조회 98[부활 제3주일]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요한 21,1-19)16.04.10조회 58[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16.04.02조회 60[27주일 (백) 예수 부활 대축일 ] 부활(요한20,1~9)16.03.27조회 335[20 일(홍)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춘분](루카 22,14―23,56)16.03.19조회 64[사순 제5주일]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 (요한 8,1-11)16.03.13조회 560[사순 제4주일] 돌아온 탕자의 비유 (루카 15,1-3.11ㄴ-32.)16.03.05조회 132[사순 제3주일] 무화과나무 비유 (루카 13,1-9)16.02.28조회 57[(자) 사순 제1주일]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다 .(루카 4,1-13)16.02.14조회 1,001[(녹) 연중 제5주일] 고기잡이 기적을 보고 (루카 5,1-11)16.02.07조회 59[연중 제4주일]고향에서 설교 (루카4,21-30)16.01.30조회 136[연중 제3주일]은혜의 해 선포 (루카 1,1-4; 4,14-21)16.01.22조회 59[2016년 1월 17일 연중 제2주일] 가나의 혼인잔치(요한2,1- 11)16.01.16조회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