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 대축일]성령을 받아라 (요한 20,19-23)
오늘은 부활 시기를 마무리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할 수 없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성령의 은사로 언제 어디서나 공동선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합시다.
오순절에 성령이 내리자 사도들은 저마다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고,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유다인들이 놀라워한다. (사도행전 2,1-11)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들은 1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2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 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4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5 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6 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 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
7 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9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 엘람 사람,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다와 카파도키아와 폰토스와 아시아 주민, 10 프리기아와 팜필리아와 이집트 주민, 키레네 부근 리비아의 여러 지방 주민, 여기에 머무르는 로마인, 11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그리고 크레타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인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
바오로 사도는,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고,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말한다. (코린토 1서 12,3ㄷ-7.12-13)
형제 여러분, 3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5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6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7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12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13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성령 송가>
오소서 성령님 주님의빛 그빛살을 하늘에서 내리소서.
가난한이 아버지 오소서 은총주님 오소서 마음의빛.
가장좋은 위로자 영혼의 기쁜손님 저희생기 돋우소서.
일할때에 휴식을 무더위에 시원함을 슬플때에 위로를.
영원하신 행복의빛 저희마음 깊은곳을 가득하게 채우소서.
주님도움 없으시면 저희삶의 그모든것 해로운것 뿐이리라.
허물들은 씻어주고 메마른땅 물주시고 병든것을 고치소서.
굳은마음 풀어주고 차디찬맘 데우시고 빗나간길 바루소서.
성령님을 굳게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 성령칠은 베푸소서.
덕행공로 쌓게하고 구원의문 활짝열어 영원복락 주옵소서.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를 빌어 주시고 두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신다. 그러고는 숨을 불어넣으시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신다. (요한 20,19-23)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사도2,1-11)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4)
'그들은 ~성령으로 가득차'로 번역된 '에플레스테산'(eplesthesan)은 루카 복음에는 7번, 그리고 사도행전에는 본문까지 포함해서 5번 나오는 등, 오직 루카의 문헌에만 12번 사용된 단어이다.0-
이것는 '(정한 날이) 다 차다'(루카1,23: 2,6: 21,22) '(어떤 감정의 상태가) 가득하다'(사도3,10: 5,17: 13,45: 루카4,28: 5,26;6,11)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본문에서는 '프뉴마토스 하기우'(pneumatos hagiu : the Holy Spirit)와 함께 쓰여 '성령이 충만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도행전 4장 31절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에플레스테산'의 단수형인 '에플레스테'(eplesthe)의 경우에는 루카 복음 1장 41절과 67절 등에서도 '성령 충만을 받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위의 용례를 종합하면, '에플레스테산'의 원형 '플레토'(pletho)는 어떤 상태가 가득 찬 상태를 나타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단어가 본문에서와 같이 성령과 관계되어 사용되면, 성령이 가득하여 어떤 다른 생각이 전혀 침범할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성령께 사로잡히면 성령께서 원하는 일만 하게 된다.
이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의의를 살펴본다. 오순절 이전에는 성령께서 사람안에 내주하시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대해서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에서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다. 이 고백을 코린토 전서 12장 3절의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한 내용과 비교하면, 베드로가 성령에 의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오순절 이전에 성령의 역사가 없었다고 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성령께서는 마리아를 잉태케 하셨고(마태1,18),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리던 시메온 위에도 임재해 계셨었다(루카2,25). 따라서 오순절 성령 충만의 사건의 의의는 최초성이 아니고 특유성이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은 개별적이거나 한시적 봉사를 위한 성령의 역사와는 달리 총체적이고 집단적 봉사를 위한 사건이었다.
이런 점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이전의 어떤 성령의 역사와도 비교될 수 없고, 그 이후에 임하는 어떤 성령 충만의 사건과도 비교될 수 없는 특유의 사건이다.
성령께서 구약 시대나 예수님 당시나(루카1,13~15) 또한 오늘날에도 충만하게 역사를 하시지만, 오순절의 성령 충만 사건은 다른 어떤 사건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교회 설립을 위한 유일한 사건인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구속 사업에 이어서 이루어진 것으로 미리 예언되었고(요한 14,16~18. 26~27; 루카 24,49) 그 예언에 따라 성취된 구원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러한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은 두 가지 면으로 나누어서 이해해야 한다. 바로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와 성령 충만이다. 오순절날에는 성령께서 강림함으로써 이 두 가지 일이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여기서 개신교에서는 7성사를 인정하지 않으므로 '물세례'를 '성령 세례'라고 부르며 '성령 충만'과 구분하지만, 우리 가톨릭은 '성세성사'가 있으므로 '성령 충만'을 '성령 안수' 내지는 '성령 세례'라고 부른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기서는 편의상 개신교의 용어때문에 헷갈릴 수 있기에 개신교의 편의를 따른다. 하지만,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와 성령 충만은 반드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는 일회적이고, 성령 충만은 반복적이라는 데서도 밝혀진다.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가 죄로 인해 단절된 상태에서 회복된 관계로 전환되는 새로운 시작을 표시하므로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를 받은 자에게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상태로 나타날 수 있는데, 이는 한 번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될 수 있다(사도 4,8. 31; 에페5,18).
또한 성령 세례(물세례; 성세성사)는 죄사함과 구원을 위한 것이고(38.40.41절), 성령 충만은 그리스도인다운 삶과 교회 선익을 위한 봉사를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성령 임재와 충만의 증거를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가시적이고 가청적인 증거로 보여 주셨고(사도2,2~3), 성령이 임한 후에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각국의 언어로서의 방언을 행하게 하셔서 성령 충만의 외적인 표지을 보다 확실하게 또 다시 보이신 것이다.
오순절날의 새로운 외국어를 말하는 방언과 바오로의 서신들에 나오는 사람들이 알아 듣지 못하는 방언은 동일한 면과 다른 면을 가지고 있기에 잘 식별되어야 한다. 동일한 면은 두 방언이 모두 성령의 은사로 나타나며, 방언을 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즉 오순절의 방언의 경우, 사도 2장 13절을 보면,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조롱하였고, 코린토 전서 14장 23절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들이 미쳤다고 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이 두 방언의 차이점은, 오순절날의 방언은 실제 사용되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으로서 그 외국어를 알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지만, 바오로 서신의 방언은 실제 사용되는 외국어가 아니므로, 해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해석하여 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성령, 일치,
용서>송영진 모세 신부
"...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신 일과
오순절 날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내린 일이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구분되는지 확실하지 않은데,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고,
오순절 날에는 성령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에 관한 말씀을 하셨을까?
성령께서 하시는 일 가운데 가장 첫 번째 일은 '사랑'이고,
우리 안에서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먼저 용서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면 용서할 것입니다.
용서 없이는 사랑도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 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일치를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사람들이 모두 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해서 하나가 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금 인간 세상의 모습을 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사랑과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스스로, 능동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성령의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도 용서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기가 정말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노력하지도 않고, 서로 남 탓만 한다면,
성령께서 도와주셔도 우리가 그 도움을 안
받겠다고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 '용서할 권한'과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에게 '매고 푸는 권한'을
주신 말씀과 같습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교회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권한은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
안에서만 행사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따라서 '용서할 권한'과 '용서하지 않을 권한'도
하느님과 예수님의 뜻 안에서만 행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에 관해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또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그러므로 구원받기를 원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찾는 이들을,
또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구원하려고 하시는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용서할
의무만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사도들에게 용서하지 않을 권한도 주셨을까?"
예수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어떠한 죄를 짓든,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을 하든 다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마태 12,31-32)."
이 말씀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어떤 죄를 짓든지 회개하면 다 용서받겠지만,
스스로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용서받기를 거부하면 용서받지 못한다."입니다.
따라서 스스로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용서할 권한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그 경우에는 용서하지 않을 권한이 적용될 뿐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면서 '용서'를 말씀하신 것은
사도들 자신들이 먼저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먼저 모범을 보이면 교회 공동체가 모두 따라 하게 될 것이고,
교회 공동체가 먼저 모범을 보이면 세상 사람들이
감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참으로 하나가
된다면 모두가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서로 용서하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남 탓 하지 말고, 남에게 미루지
말고, '내가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세계 평화도, 남북통일도 용서와 사랑 없이는 이루어지기가 어렵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도들이 설교를 했을 때,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설교를 알아들었다는 것은(사도 2,7-12)
그들의 마음이 하나로
통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그날 그곳에서는 일치와 평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비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사도 2,13).
자기 스스로 받기를 거부하면 성령의 은사도, 말씀의 은총도 받지 못합니다.
오순절은 밀 수확을 끝내고 하느님께 맏물을 바치는 추수 감사절입니다. 이 축제 중에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모세에게 주신 사건’을 경축하기도 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을 완성시킨 예수님께서는 오순절에 불꽃 모양으로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로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이에게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업적의 핵심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없애 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다섯 상처’를 보여 주시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승리하였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성령은 ‘사랑의 불꽃과 숨결’입니다.
성령께서는 죽음 앞에서 땅의 먼지처럼 힘없는 인간에게 새로운 생명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치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고백합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필요한 신앙의 열정과 은사, 불사불멸의 생명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생명력이 우리 마음과 영혼 안에 스며들고 퍼지도록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에 오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