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1주일]죄 많은 여자 용서 (루카 7,36-8,3)

나탄이 다윗에게,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차지한 사실을 꾸짖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다윗은 죄를 수긍한다. (사무하 12,7ㄱㄷ-10.13)
그 무렵 7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세우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해 주었다. 8 나는 너에게 네 주군의 집안을, 또 네 품에 주군의 아내들을 안겨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안을 주었다. 그래도 적다면 이것저것 너에게 더 보태 주었을 것이다.
9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너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다. 10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3 그때 다윗이 나탄에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나탄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주님께서 임금님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임금님께서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편 32(31),1-2.5.7.11(◎ 5ㄹ 참조)
◎ 주님,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소서.
○ 행복하여라, 죄를 용서받고 잘못을 씻은 이! 행복하여라, 주님이 허물을 헤아리지 않으시고, 그 영에 거짓이 없는 사람! ◎
○ 제 잘못을 당신께 아뢰며, 제 허물을 감추지 않았나이다. “주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나이다.” 당신은 제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셨나이다. ◎
○ 당신은 저의 피신처. 곤경에서 저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환호로 저를 감싸시나이다. ◎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음 바른 이들아, 모두 환호하여라. ◎
바오로 사도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며,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신다고 말한다. (갈라 2,16.19-21)
형제 여러분, 16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되려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9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살려고, 율법과 관련해서는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21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죄인인 여자가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향유를 붓자 사람들이 못마땅해한다. 예수님께서는 더 많은 빚을 탕감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며, 여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평안히 가라고 이르신다. (루카 7,36―8,3)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8,1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2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3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참회하는 다윗~~^*^
연중 제11주일 제1독서 (2사무12,7ㄱㄷ-10.13)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너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다. 너는 그를 암몬 자손들의 칼로 죽였다." (9)
'주님이 보기에'로 번역한 '뻬에노'(beeno)는 '눈'(eye)을 의미하는 명사 '아인'(ain)의 복수형에 '안'(in)이라는 의미의 전치사 '뻬'(be)와 3인칭 단수 접미어가 각각 결합된 형태로서 '그의 눈 안에'(in his eyes)라는 의미이다.
원문이 주님을 3인칭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다윗의 범죄가 객관적 기준에서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죄임을 보다 확실히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악한 것'으로 번역된 '하라으'(harah)의 원형 '라으'(rah)는 '감정을 상하게 하다', '불쾌하게 하다'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이것을 통해 '악'(evil)은 하느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윗이 유부녀 밧 세바를 간음하고, 그녀가 임신함에 따라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전쟁터에 내몰아 죽인 것은 명백히 하느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한 악이었던 것이다.
'너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에서 '너는 ~ 쳐 죽이고'에 해당하는 '히키타'(hikita)의 원형 '나카'(nakah)는 여기처럼 사역형으로 쓰일 때 '치다', '쳐서 죽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바로 우리야를 죽인 살인범임을 분명히 하셨다.
반면에 '암몬 자손의 칼로 죽였다' 에서 '죽였다'에 해당하는 '하라그타'(haragta)의 원형은 '죽이다', '학살하다'라는 의미의 '하라그'(harag)이다. 이 단어는 모세가 이스라엘 동포를 보호하려고 살인한 것(탈출2,12),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것, 혹은 복수로 살인하는 것 등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서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수행되는 살인을 의미한다.
이렇게 두 동사를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은 다윗이 우리야를 죽인 것과 암몬 자손들이 우리야를 죽인 것의 성격을 구분하여 다윗의 범죄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이다. 즉 가시적으로 볼 때 우리야를 죽인 직접적 주체는 암몬 자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가장 치열한 격전지에 우리야를 투입시켜 암몬 자손들의 손을 빌려 죽인 다윗이 근본 살인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일반 군사들의 눈에는 우리야의 죽음이 전쟁에서 흔하게 있을 수 있는 전사(戰死)로 보였을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야의 죽음이 다윗의 계획에 의한 암살임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군사들은 우리야의 마지막 최후의 모습만을 볼수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다윗이 악한 마음을 품고 요압에게 편지를 써 살인을 교사한 것을 다 지켜보고 계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어도, 온 우주에 충만하시며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의 눈을 속일 수 없었던 것이다(2역대15,9 ; 시편139,2-12 ; 예레17,10 ; 묵시1,14).
사무엘 하권 12장 9절은 우리야의 전사 장면을 기록한 사무엘 하권 11장 24절과는 다르게 보인다. 사무엘 하권 11장 24절에서 우리야는 암몬 군대의 궁수들이 성벽 위에서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한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사무엘 하권 12장 9절에서 하느님께서 나탄 예언자의 입을 통해 우리야가 칼에 맞아 죽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는 두 구절 중 어느 한 쪽이 틀리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확실히 우리야는 화살에 맞아 숨을 거두었고, 사무엘 하권 12장 9절의 '칼'은 비유적으로 죽음을 불러오는 모든 상황을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압이 보낸 전령으로부터 우리야의 전사 소식을 들은 다윗도 "칼이란 이쪽도 저쪽도 삼켜 버릴 수 있으니"(2사무11,25)라고 말했는데, 이 표현속의 '칼'도 죽음을 불러오는 전쟁의 모든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나를 무시하고,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데려다가 네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다." (10)
하느님께서는 사무엘 하권 12장 9절에서 다윗의 범죄의 성격 및 내용을 지적하신 후 사무엘 하권 12장 10절~12절에서는 이같은 흉악 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다윗에게 내릴 엄중한 징계를 예언하신다.
과거와 대조되는 바로 이 시점을 가리키는 '앗타'(athah; now)로 시작되어 그 징계가 엄중할 것을 암시하며, '그치지 않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로 타쑤르'(lo thasur)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로(lo) + 미완료 구문' 으로서 다윗이 이 징계를 영원히 안고 살아야만 할 것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네 집안에서는 칼부림이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징계로 죽음이 항상 그 가문 위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우선 다윗의 생존 당시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다.
즉 밧 세바와의 간음으로 낳은 아들이 죽었으며(2사무12,16-23), 다윗의 딸 타마르가 다윗의 장자 암논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것으로(2사무13,1-22) 말미암아 타마르의 오빠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했으며(2사무13,23-30),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살해당하는 등 죽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2사무15,1-18; 18,9-15).
그러나 '영원히' 라는 표현대로 다윗에 대한 하느님의 징계는 다윗 당대로만 그치지 않았다. 다윗이 죽고난 뒤 그의 넷째 아들 아도니야가 왕위 찬탈을 꾀하다가 동생 솔로몬에 의해 처형되었고(1열왕2,1-25), 솔로몬이 죽고난 뒤 통일 왕국이 남북 왕조로 분열되기까지 하였다.
그뿐 아니라 남부 유다와 북부 이스라엘 사이에는 분쟁이 그치지 않았으며, 두 왕국은 수많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다가 결국 앗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모두 멸망당하고 말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느님께서 다윗 가문에 보내신 징계의 칼은 다윗 자신이 악을 행하기 위해 사용한 칼에 대한 응보였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을 징계하시면서 그가 심은 대로 그대로 거두게 하셔서 악의 씨를 뿌린 대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영원히 잊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갈라6,7참조).
이미 사무엘 하권 12장 9절에서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주님이 보기에 악한 짓을 저질렀느냐?" 는 말씀이 나오는데, 사무엘 하권 12장 10절에 "네가 나를 무시하고" 가 또 반복된다.
주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해서 사무엘 하권 12장 7절에서 '그런데 어찌하여'에 해당하는 '맛두아으'(maduah)라는 의문사를 이용해서 다윗이 하느님 대전에 죄를 지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도 주님의 말씀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너는 ~무시하고'에 해당하는 '빠지타'(bazita)의 원형 '빠자'(baza)는 '가볍게 생각하다', '멸시하다', '과소 평가하다'의 의미이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범죄의 근본 원인이 바로 당신의 말씀을 멸시한 데 있음을 재차 밝히시는 것이다.
사무엘 하권 12장 9절에서 '말씀'에 해당하는 '떼바르'(debar)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는 주님을 강조하는 '예흐와'(yehewah)의 수식을 받고 있으므로 특별히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신탁으로 주신 말씀을 가리킨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을 섬기는 인간이 경외심을 가지고 지켜 행해야 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이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왜곡되고 변질되는 인간의 지식과는 달리 시공을 초월해서 항상 의롭고 진실된 것이며, 거룩하신 하느님의 속성을 그대로 표명해 주는 표지이다.
따라서 다윗이 주님의 말씀을 무시했다는 것은 곧 바로 주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겼다는 것이다.
공의로우신 주님을 이처럼 멸시하고 업신여겼으며, 다윗은 주님의 계명이 명시적으로 금하는 간음죄과 살인죄를 저질렀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회개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다윗은 일시적으로 자신의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을 행동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나탄으로부터 '주님의 말씀을 무시했다'는 지적을 받고, 이제 사무엘 하권 12장 10절에서 다시 한번 다윗의 범죄의 근본 동기가 바로 주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긴 데 있음을 지적당한다.
다윗의 범죄는 인간의 윤리 가운데 있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죄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범죄의 동기가 주님을 무시하고 업신여긴 데서 비롯한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했다는 데에 가장 큰 문제가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다윗 역시 하느님의 징계 선언을 듣고,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참회의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시편51,6)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2사무12,13)
연중 제11주일 복음 (루카7,36-8,3)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6)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7)
루카 복음 7장 46절에는 이중 대구 구조가 나타난다. 즉 '기름'에 해당하는 '엘라이오'(elaio; oil)와 '향유'에 해당하는 '뮈로'(myro; ointment; perfume), '머리'에 해당하는 '텐 카팔렌"(ten kephalen; head)과 '발'에 해당하는 '투스포다스'(tus podas; feet)가 대칭되는 개념이다.
'기름'과 '향유'는 모두 기름의 일종이지만, '향유'('뮈로')는 그 앞에 종종 '값비싼'이라는 형용사가 붙는 것처럼 매우 값진 기름이다.
반면에 '기름'은 때로는 램프의 기름이나 병자를 치료하는 약, 때로는 머리와 몸에 붓거나 바르는 등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기름이다. 이것은 당시 올리브 나무로 뒤덮였기 때문에 붙여졌던 '올리브산'이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값싼 물건이었다.
당시 '향유'를 부을 때에는 일반적으로 머리에 부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값싼 '기름'조차도 붓지 않은 바리사이 시몬과 값비싼 향유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머리에 붓지 못하고 예수님의 발에 부은 여인을 비교하심으로써 그녀의 겸손과 헌신을 칭찬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원문은 '호티 에가페센 폴뤼'(hoti egapesen poly; for she loved much)이다. 여인의 사랑과 헌신적 행위가 죄를 용서받게 된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죄의 용서는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 결코 하느님께서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고 이것을 반대하는 학자들이 있어 논란이 되는 구절이다.
그래서 여기의 '호티'(hoti)를 '내가 너에게 말한다'로 번역된 '레고 소이'(lego soi; I tell you)에 걸리는 종속절로 보아서 '내가 그녀의 많은 사랑함에 대해 말하는데'로 번역하여 '호티'(hoti)이하의 절을 그녀의 많은 죄의 용서의 근거가 아니라 죄의 용서를 선포하는 근거로 보기도 한다.
루카 복음 7장 47절과 48절에 '죄를 용서받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용서받았다'에 해당하는 '아페온타이'(apheontai; are forgiven)라는 새로운 단어이다.
이 단어의 원형은 '아피에미(aphiemi)인데, 이것은 '보내다'라는 뜻의 '히에미'(hiemi)에 '~로 부터'를 의미하는 전치사 '아포'(apo)가 합쳐진 형태로서, '~로부터 떼어 보내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여인이 자신을 억누르던 죄('하마르티아이'; hamartiai; sins)와 이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주위의 비난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음을 표현한다.
과거의 허물과 실수, 죄악이 현재나 미래에 미치는 결과까지 완전히 백지화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 '아피에미'(aphiemi)를 통해서 여인은 죄인의 신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고, 이러한 공적인 선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죄의 용서의 권한과 권세를 갖고 있는 분이심을 드러내신 것이다
<죄 많은 여자를 용서하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오해하기가 쉬운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사람은 많이 용서하시고, 어떤 사람은 적게 용서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고, 똑같이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
하느님의 용서가 똑같다고
해도,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은 ‘많은 죄’를 용서받고
‘적은 죄’를 지은 사람은 ‘적게’ 용서받는 것이 아닌가?
(‘많은
죄’를 짓고 ‘많은 죄’를 용서받는 것이 더 좋은 일인가?
‘적은 죄’를 짓고 ‘적게’ 용서받는 것이 더 좋은 일인가?)
이런 질문은
인간 쪽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죄를 많이 지어도, 적게 지어도, 하느님의 용서는 똑같습니다.
(큰 죄를 지어도, 작은 죄를
지어도...)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이 여자는 자기가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크게 감사했다.
그러나 자기가 적게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게 감사한다.”
이 말씀 앞에 채권자와
채무자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루카 7,41-42)”
이 말씀에서 채권자는 하느님, 채무자는 죄인, 빚은 죄, 탕감은 용서를
뜻합니다.
채권자가 두 사람의 빚을
모두 탕감해 준 일은 하느님의 용서는 똑같다는 것을 뜻합니다.
빚이 오백 데나리온이든지 오십 데나리온이든지, 즉 죄가 크든지
작든지, 용서받은(탕감 받은) 결과는 똑같습니다.
(물론 빚이 더 많은 사람은 탕감 받은 금액이 더 크지만, 우리는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라는 말씀은, “누가 더 고마워하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시몬이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7,43).”
하느님의 용서는
똑같기 때문에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는 말은, ‘더 많이 탕감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빚의 크기는 겉으로 표시가
나고, 탕감 받은 금액의 차이도 겉으로 드러날 수 있지만,
죄의 크기와 양은 남들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잘 모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일은 결국 각자 자기가 받은 은총의 크기를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용서에 대한 감사는 회개로
이어집니다. (용서받았음을 고마워한다면 당연히 회개해야 합니다.)
죄가 크든지 작든지 간에 크게 고마워하는 사람은 많이
회개하고, 작게 고마워하는 사람은 적게 회개합니다.
그래서 작은 죄를 짓고서도 많이 회개하는 사람이 있고, 큰 죄를 짓고서도
적게 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예 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똑같은 사랑을
주시는데 그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됩니다.
크게 감사드리는 사람은 그 사랑을 많이
받아들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랑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적게 감사드리는 사람은 그 사랑을 적게
받아들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사랑을 적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예 고마워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 경우에는 사랑받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은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와 베드로 사도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셨고, 똑같이 용서하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유다의 배반과
베드로의 부인 가운데 어떤 것이 더 큰 죄인가? 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지만, 회개하지는 않고 자살해 버렸습니다(마태 27,3-5).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닫자 즉시
회개했습니다(마태 26,75).
유다가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왔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받아주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유다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지 않았던 것 같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고마워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믿었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용서에 크게 감사드렸을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 사도의 회개는 평생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회개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늘의 해는 온 세상을
똑같이 비추지만, 해를 등지고 돌아선 사람과 그늘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은 햇빛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탓은
하지 않고 해만 탓하는 경우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