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쟁기를 손에 잡고 (루카 9,51-62)

2016. 6. 26. 오전 5: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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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3주일.교황주일]쟁기를 손에 잡고 (루카 9,51-62)

 프란치스코 교황님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이나 이날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엘리야가 자신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엘리사를 부르자, 그는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고기를 구워 사람들을 먹인 다음 엘리야를 따라나선다.(열왕상 19,16ㄴ.19-21)
그 무렵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16 “아벨 므홀라 출신 사팟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네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워라.”
19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20 그러자 엘리사는 소를 그냥 두고 엘리야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엘리야가 말하였다. “다녀오너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
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들었다.


바오로 사도는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으니 육의 욕망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라고 가르친다. (갈라 5,1.13-18)
형제 여러분,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3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15 그러나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한다면, 서로가 파멸할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16 내 말은 이렇습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17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 18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신다. (루카 9,51-62)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57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제1독서 (1열왕19,16ㄴ,19-21)

 엘리야는 그곳을 떠나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열두 번째 겨릿소는 그 자신이 부리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19) 

아합의 처 이제벨을 피하여 무기력하게 숨어 있던 엘리야를 찾아오신 하느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세 가지 사명을 부여해 주신다(1열왕19,9-18 ;19,15-16). 그리고 오늘 독서 열왕기 상권 19장 19-21절에서는 엘리야가 세 가지 사명 가운데 엘리사를 제자로 부르는 일을 수행한 사실을 보도한다. 

엘리야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즉시 호렙산을 떠나 엘리사를 만나러 갔다. 열왕기 상권 17장 19절에 나오는 "엘리야는 ~ 떠나" 에 해당하는 '와이예레크'(waiellek)'만났다'에 해당하는 '와이므차'(waimtsa)에 모두 행동이 즉시 이어짐을 보여주는 '와우'(wau) 계속법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새로이 사명을 부여받은 후, 다시 이전과 같이 하느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한편 엘리야가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 엘리사는 열두 쌍의 소를 겨리를 지워 밭을 가는 중이었다.  여기서 '겨릿소를'에 해당하는 '체마딤'(tsemadim ;yoke of oxen)기본적으로 '두 개를 하나로 묶은 한 쌍'(이사21,7)을 의미하는 '체메르'(tsemer)의 복수형으로, 여기서는 한 멍에를 나란히 멘 한 쌍의 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열 두 겨릿소'는 곧 24마리의 소를 말한다. 

그런데 당시 24마리의 소를 이끌고 밭을 갈았다는 것은 엘리사가 상당한 부잣집 자제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그에게'로 번역된 '엘라이우'(ellaiu)'~에게', '~곁에'라는 뜻의 전치사 '엘'(el)3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이다. 

개신교 성경은 '그의 위에'로 번역하여 마치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엘리사의 몸이나 머리 위로 던진 것처럼 오해할 수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겉옷'이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내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진 것이었다. 

따라서 엘리야가 그의 겉옷을 엘리사에게 던진 행위는 자신의 뒤를 이어 예언자 직무를 대신하고 계승하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사도 엘리야의 행동에 담겨진 그런 의미를 제대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엘리사 역시 그러한 엘리야의 행동에 대하여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다(1열왕19,20.21절).




프란치스코 교황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송영진 모세 신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의 일행이 자기네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유대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사마리아인들은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행을 모욕하고 박해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그 마을을 불살라 버리고 싶어 합니다.
인간적인 감정에(복수심에) 사로잡혀서 복수를 하고 싶어 한 것입니다.
(두 사도의 말은 하느님께 천벌을 내려 달라고 청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를 꾸짖으셨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살라 버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들이 올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달라는 기도.)


이 말에 대해서,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불행을 예고하신 일과
모순된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심판 때에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루카 10,13-15).”
이 말씀에 나오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마을이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많이 행하신 마을입니다.
또 이 말씀은 지금 당장의 불행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고,
심판을 받기 전에 회개하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고,
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는 ‘사랑의 말씀’이기 때문에 모순되지 않습니다.


2) 어쩌면 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권한과 권능을
한 번 사용해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 그들에게 이르셨다.
...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1-5)”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것을 경고하는 표시로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두 사도는(다른 사도들도) 경고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아예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기도 전에
자기들이 먼저 심판의 권한을 사용하려고 한 것이 되고,
당연히 그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가 됩니다.
(자기들이 권한을 사용하려고 한 것이 아니더라도,
즉 하느님께 천벌을 내려 달라고 청하기만 하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심판과 천벌을 청하는 것도 죄가 되는 일입니다.)


우리도 두 사도와 같은 감정에 사로잡혀서 두 사도처럼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또는 인간들의 악행을 보았을 때,
하느님께서 천벌을 내려 주시기를 바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 종교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사용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박해를 받던 시절에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그 ‘영향력’을
지금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서 큰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세 시대의 종교재판이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그 ‘힘’을 사용하고 싶어 하는 것도 유혹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잊으면 안 됩니다.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5-26).”
종교는 세상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으로 변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타락이고 변질입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에 미치는 진정한 영향력은 바로 그 ‘섬김’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당연히 ‘섬김’과 ‘사랑’이라는 방식으로 영향력이 행사되어야 합니다.
권력자가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사용하면 안 됩니다.


종교는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함께 회개하고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동반자가 될 뿐입니다.
사실 최후의 심판 날이 되면 종교 자체도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루카 12,47).”


연중 제13주일 (교황주일) 복음 (루카9,51-62)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4)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걸어야 할 인생의 여정의 알고 계셨고, 그 계획을 따를 의지를 가지고 계셨다.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면, 계속해서 당신을 시험하고 비난하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루카5,21.30; 6,2.7.11)에 의해 필연적으로 고난을 받으신다는 것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느님의 계획을 따를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루카 복음9장 51절'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그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그 얼굴을 고정시켰다'가 된다. 

'그는 ~그 얼굴을'에 해당하는 '아우토스 토 프로소폰'(autos to prosopon; he - his face)은 한글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 쪽을 향하고 있는 예수님의 비장한 마음을 드러내는 표현이다.

또한 '마음을 굳히셨다'는 의미로 번역된 '에스테리센'(esterisen; resolutely set; stedfastly set)의 원형 '스테리조'(sterizo)는  어떤 사물을 흔들리지 않도록 확고하게 고정시키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이며, 비유적으로는 마음을 변치 않도록 확고히 하는 것을 가리킨다(루카22,32).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남겨진 길을 위해, 비록 그 길이 당신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하더라도 좌우를 향해 고개를 돌리시지 않았다. 

오로지 당신이 가야 할 길에 꽂혀 있는 표지를 향해 얼굴을 고정시켜 거기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시는 당신의 걸음을 어느 누구도, 어떤 세력도 방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한다. 

그것은 십자가 이후에 당신에게 이루어질 부활과 영광스런 승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히브12,2).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이제 유다 지방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신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요르단강 동편으로 상당히 우회해야 하므로 적어도 며칠을 더 걸어야 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한 마을에 숙박하기 위해 제자들 중 몇을 심부름꾼으로 보내셨다.

사마리아인들은 B.C.722년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한 북부 이스라엘과 아시리아 사이에 생긴 혼혈족인데, 그들의 기원은 열왕기 하권 17장 24~41절에 나온다.

바빌론 유배 이후에 느헤미야와 즈루빠벨이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재건할 때 사마리아인들도 동참하고 싶어했지만, 종교적 순수성을 내세운 유대인들은 그들의 도움을 냉정하게 거절하여 그때부터 그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경원시하게 되었다.

유대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에서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사마리아인들은 독자적으로 주님께 제사드리기 위해 가리짐산 위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했다(요한4,20).

그러나 그 성전마저도 마카베오 시대때 요한 힐카누스(J. Hyrcanus)가 파괴함으로써, 유대인들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반목은 더해 갔다.

루카 복음 9장 53절'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고 나온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과 그 일행을 갈릴래아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는 종교 순례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던 것이다.

사마리아인들은 종교적 피해 의식이 큰 사람들이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들 지역을 통과하는 모든 갈릴래아의 유대인들을 싫어했으며 통과시키지도 않았다.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Josephus)에 의하면, 그들은 심지어 자기 지역을 통과하기를 원하는 여행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한다.

한편, 사마리아인들의 배척은 주님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의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옛날 능력의 예언자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1열왕18장)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해서 원수들을 멸망시킬 것을 예수님께 요청했다.

예수님께서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의 보아네르게스라는 별명을 붙여 주신 것(마르3,17)도 이러한 충동적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불과 얼마 전에 타볼산에서 엘리야를 본 적이 있는(루카9,28~36) 야고보와 요한은 과거 아합 시대에 바알 예언자들과 카르멜 산에서 싸우던 엘리야를 염두에 두고 이러한 말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말속에는 하느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즉시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과 예수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고자 하는 그들의 충성심이 담겨 있다고 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사명의 성격이 어떤 것인지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원수를 심판하는, 그것도 불로 무자비하게 태워버리는 것만이 그들을 배척하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속된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으며 (마태5,43.44),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명백히 말씀하셨던 것이다(요한12,47). 

주님께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결여된 지나친 충성은 주님의 의도와 정반대로 행해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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