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루카 10,25-37)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은 아주 가까이 너희의 입과 마음에 있기에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고 한다.(신명 30,10-14)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0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 율법서에 쓰인 그분의 계명들과 규정들을 지키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11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2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 13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바다 저쪽으로 건너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 하고 말할 필요도 없다.
14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모상이요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로 만물 가운데 으뜸이시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콜로 1,15-20)
그리스도 예수님은 15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16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7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18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 그리하여 만물 가운데에서 으뜸이 되십니다. 19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누가 내 이웃이냐고 묻는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응답하신다. (루카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연중 제15주일 제1독서 (신명30,10-14)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11)
신명기 30장 15-20절에서 율법에 대한 순종을 촉구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명기 30장 11-14절까지 마지막으로 율법을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때문에' 라는 뜻을 가진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는 본문은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지키도록 요구하시는 율법은 지키기 어렵거나 일상 생활로부터 괴리된 낯선 것이 아님을 밝힌다.
여기서 '너희에게 명령하는'으로 번역된 '메차웨카'(metsaweka)는 '명령하다'는 뜻을 가진 '차와'(tsawa) 동사의 강조형 분사 능동태와 2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말로서, '너에게 명령하고 있는' 이라는 뜻이다.
분사형은 행동의 계속됨을 나타내기 때문에 여기의 '명령'은 과거에 모세가 내린 어떤 명령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까지 계속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든 율법의 말씀을 가리킨다.
한편, '힘든 것도'로 번역된 '니플레트'(niphlleth)는 '능가하다', '특별하다'라는 뜻을 가진 '팔라'(phalla) 동사의 수동형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 '놀랍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리고 '너희에게'로 번역된 '밈메카'(mimmeka)는 '~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민'(min)과 2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전치사구로서 '너에게'라는 뜻이다. 따라서 '로 니플레트 히 밈메카'(lo niphlleth hi mimmeka)는 '그것은 너의 영역 밖에 있을 만큼 어려운 것이나 놀라운 것이 아니다'로 이해할 수 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고 있는 명령 즉 율법은 그들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명기 29장 28절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한다. "감추어진 것은 주 우리 하느님의 것이지만, 드러난 것은 영원토록 우리와 우리 자손들의 것이니, 우리는 이 율법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즉 율법은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영구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이라는 말이다(It is not hidden from you).
그리고 '멀리 있는 것도'로 번역된 '레호카'(rehoqa)의 원형은 '라호크'(rahoq)인데, 거리적으로 이스라엘로부터 멀다는 의미보다는 이스라엘이 도달할 수 없을 만큼 율법이 결코 난해하거나 심오하지 않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표현이다.
따라서 신명기 30장 11절은 율법이 우리가 지키기에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과 더불어 율법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전한다.
연중 제15주일 제2독서 (콜로1,15-20)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20)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시어 만물로 하여금 당신 자신과 화해하게 된 것에 대해 기뻐하셨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평화를 이룩하시어'로 번역된 '에이레노포이에사스'(eirenopoiesas)의 원형 '에이레노포이에오'(eirenopoieo)는 '평화'를 뜻하는 '에이레네'(eirene)와 '행하다', '~되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포이에오'(poieo)의 합성어로서 신약에서는 이곳에서만 쓰였다. 그 의미는 '평화를 만들다'(make peace)이며, 본절에서는 하느님께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의 구속사업을 통해 하느님과 만물 및 만물안의 모든 생명체 상호간에 평화를 이루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상은 사도 바오로의 다른 서신인 로마서 5장 10절과 에페소서 2장 15절과 16절 등에도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원수되었던 인류가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하느님께 대한 순종으로 인해 하느님과 평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무죄하신 성자 그리스도께서 죄는 인간들이 지었기 때문에 인간의 몸을 취하고 이 땅에 내려오시어 흠없으신 당신 몸을 자원으로 희생하여 대속의 피를 흘리는 것이었다.
본문의 전치사 '디아'(dia)는 '~을 통하여'(through)라는 의미로서 평화를 이룩하는 데에 십자가의 피가 도구로 사용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무죄하신 당신 독생 성자의 피를 흘리게 하셔야만 했는가? 이것은 이 땅에 첫 사람의 교만과 불순종으로 계명을 어겨 죄가 들어오고, 모든 인류가 첫 사람안에서 죄를 지어 죽음으로 치닫게 된 이후로 그 죽음을 막는 유일한 원리가 바로 '피흘림'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 마음이 아프듯이, 피조물인 인간이 하느님의 뜻이 들어있는 계명을 어겨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며, 그 선성(善性)에 누를 끼치고 성성(聖性)을 모독하며, 공의(公義)를 거스려 일어나게 된 하느님 아버지의 의노는 당신과 위격과 레벨이 같은 하느님만이 풀어 드릴 수 있고, 죄는 인간이 지었기 때문에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속죄를 하셔야만 했던 것이다.
이 원리는 하느님 아버지 당신 자신이 세우셨다. 즉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피가 그 생명으로 속죄하기 때문이다'(레위17,11; 히브9,22)고 선언하셨다.
구약 시대에 수없이 흘려지고 뿌려졌던 양과 송아지의 피는 해당 제사 그 한가지 죄에 대해서만 죄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불완전한 제사였지만(히브7,27), 저주의 십자가 상에서 피를 흘리신 무죄하신 그리스도의 제사는 그 단 한번으로 영원하고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여 죄사함 및 화해를 위한 더 이상의 피흘리는 제사가 필요없도록 만드신 것이다(히브10,10.11).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원문은 새 성경의 번역과 조금 다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성혈의 구속 공로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게 되었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셨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죄를 범한 인류와 화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간절한 희망이요, 기쁨이었다.
여기서 '화해시키셨습니다'로 번역된 '아포카탈락사이'(apokatallaksai)의 원형'아포카탈랏소'(apokatallasso)는 끝마침과 완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아포'(apo)라는 전치사와 그 자체로 이미 '화해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카탈랏소'(katallasso)의 합성어이다. 사도 바오로는 '화목하게 하다', '화해시키다'라는 의미를 전달할 때 주로 '카탈랏소'(katallasso)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로마5,10; 2코린5,18.20).
그러나 여기 콜로새서 1장 20절과 22절, 에페소서 2장 16절에서는 '아포카탈랏소'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완전한('아포'; apo) 화해('카탈랏소'; katallasso)의 개념을 나타내는 단어로서 '카탈랏소'보다 그 의미가 훨씬 강하다. 여기서는 죄를 범하기 이전에 가졌던 평화의 관계로 완전히 되돌아가는 것을 말하기 위해 이같은 강조형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과의 완전한 화해를 기뻐하시며 간절히 희망하셨던 것이다.
한편 '유도케센'(eudokesen)이라는 단어는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신다'는 뜻인데, 원문에는 콜로새서 1장 19절에 기록되어 있으며, 한글 새성경에는 '기꺼이'로 번역했다. 이 단어의 원형 '유도케오'(eudekeo)는 '잘하다', '좋다'라는 뜻의 부사 '유'(eu)와 '생각하다'(마태3,9), '여기다'(2코린11,6)란 뜻의 동사 '도케오'(dokeo)의 합성어로서 '좋게 생각하다', '기쁘게 여기다'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이것은 기대하는 것이 충족되었을 때에 행복해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낸다 (마태3,17; 갈라1,15.16).
이 단어는 인간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 인간과 다시 화해하게 되기를 얼마나 바라셨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느님의 이러한 바람이 그리스도의 육화(강생)과 십자가상 대속적 죽음을 가능케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1) 착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일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한 일”입니다(루카 10,27).
사마리아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자,
마치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그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지금 ‘하는 것처럼’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아마도 분명히 그 사마리아인은
그 일은 자기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서 했을 것입니다.
사랑 실천은
바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거창한 명분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 그냥,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랑
실천은 ‘원수’를 사랑한 일입니다.
(원수에게 이웃이 되어 준 일입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와도 같은
관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셨을 때,
그 여자는 물을 드리기는커녕
유다 사람이 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마실 물을 청하느냐고 말했습니다(요한 4,9).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 물 한 모금도 주기 싫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을 배척했을 때,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그 마을을 불살라 버리자고 말했습니다(루카 9,54).
그것은 두
사도만의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은 불살라도 된다는 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증오하고
적대감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와준 일은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일이 됩니다.
(따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강도당한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등장시키신 것은 의도적으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다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그러니 민족, 인종, 종교, 신분, 직업, 사상 같은 것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원수’란 원래
없습니다.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만 있을 뿐입니다.
3)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강도당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해 준 것과 같다.” 라고 표현하시지 않고,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라고 표현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예수님을 사랑하듯이 도와주어야 한다.”가 아니라,
“지금
곤경에 처한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니 당연히 도와드려야 한다.”입니다.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외면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외면한 일이 되어버리고,
그러면 신앙인의 자격을 스스로 버리는 일이
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형제들을 꾸준히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
학대받는
사람들이 있으면 여러분도 같은 학대를 받고 있는 심정으로
그들을 기억하십시오(히브 13,1-3.공동번역).”
여기서 ‘나그네’는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뜨내기’를) 뜻합니다.
‘천사’는 사실상 하느님을 뜻하는 말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대접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창세 18장).
4) 강도당한 사람을 바로
‘나’로,
착한 사마리아인을 예수님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잘한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나에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나에게 뭔가를 바라셔서 그러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나를 사랑하니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사랑에는 사랑 말고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인데,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는 명확합니다.
받은 대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면 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그 사마리아인이 사랑을 실천한 것은
‘가엾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루카 10,33).
의무감 때문에 한 일도 아니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닙니다.
아마도 그는 충분히 도움을 준 다음에는 말없이 떠났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강도당했다가 사마리아인의
도움을 받은 그 사람은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 사람이 그 뒤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이
말씀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루카 10,29)”
라고 물은 율법학자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강도당한 사람에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해도 됩니다.
사실 우리는 누구나
도움을(사랑을) 주고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실천한 선행과 사랑은 바로 잊어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자기가 받은 은혜와 선행과
사랑은 잊으면 안 됩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받은 하느님(예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가 베푼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대단히 크고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 실천’은
자신이 받은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일입니다.

사랑이 보낸 편지
안녕?
내 이름은 사랑이야.
너희들이 하는 말 중에서 나에 대한 말이 가장 많지.
그러나 나에 대해서 참으로 말하는 사람은 얼마 없어.
그리고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특히 현대인들은.
오늘도 예수님께서 나에 대해서 말씀하셨어.
어찌 보면 예수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나를 증언하기 위한 삶이었다고도 볼 수 있지.
그분이 오늘 하신 말씀은 그분 주장의 요약일지도 몰라.
그분 주장의 요약이 뭐냐고?
그래, 말해 줄게.
첫째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거야.
그리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이지.
하지만 너희들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손톱만큼도 듣지 않고 있어.
너희들이 마음과 목숨과 힘과 생각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은 오직 돈뿐이야.
내 말이 맞지?
그뿐인 줄 아니?
너희들에게는 이제 이웃이라는 단어는 사라졌어.
오직,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고,
이웃이 반쯤 죽어가도 자기 갈 길만 가며,
자기가 손해 보는 일이 있으면
어려움을 당하는 이웃을 보고도 그냥 피해서 지나가버리지.
너희들이 사랑하는 것은 오직 돈과 자기뿐이야.
그러면서도 너희들은 성당에 앉아
“사랑이 주님의 으뜸 계명이며,
하느님과 네 이웃을 사랑하자.”고 노래 부르고 있지.
정말, 웃기는 거야.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 알아?
너희처럼 입술로만 나를 찾고,
몸으로는 나를 저버리는 사람들이야.
갑자기 사도 야고보의 말이 생각난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이.
마찬가지야.
행동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야.
오늘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는 한
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독임을 명심하라고.
찔린다고?
당연히 찔리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너희들의 작은 희생이 나를 웃게 할 거야.
너희들의 작은 봉사가 나를 벌떡 일으킬 거야.
나는 정말 살고 싶어.
나를 살리는 길은 단 한 가지.
네 이웃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거야.
있잖아 이건 비밀인데,
나를 발견하면 너는 무지무지 행복할거야.
아무쪼록 날 많이 아껴줘.
입술로가 아닌 온몸으로 말이야.
꿈속에서도 나를 만나면 더욱 좋겠지.
그지?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나와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게 말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써 사랑할 때,
우리의 마음은 사랑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야말로 오늘을 사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과 두려움을 봅니다. 자신의 삶 안에서 늘 마주치는 불확실성과,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인간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은 이 두려움을 이겨 내려고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 하고,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처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찾던 하느님의 모습은 큰 변화를 겪게 됩니다. 하느님을 “절대적 타자”, 곧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으로 인식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분과의 계약, 곧 율법에 충실함으로써 구원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바칠 만한 절대적 충실함은 오히려 인간에게 더 큰 짐을 지워 줍니다.
반면, 우리에게 다가오신 메시아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 아니고, 하느님의 모상이시면서 동시에 완벽하게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 드려야 할 봉헌도 율법 안에서의 완벽함이 아니라, 우리 일상에서 만나는 이웃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무시와 경멸을 당하는 사람이었지만, 종교적으로 거룩한 직분을 가진 이들이 그냥 스쳐 지나갔던 그 가엾은 사람에게 다가가 치료해 주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쉴 곳을 마련해 줍니다. 모든 것에 앞서 그의 근본적인 선택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너무 쉬우면서도 너무 어려운 것
반영억라파엘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