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일] 주님의 기도 (루카 11,1-13)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파멸시키려고 하자 아브라함이 나선다. 주님께서는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성읍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신다. (창세 18,20-32)
그 무렵 2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시편 138(137),1과 2ㄴ.2ㄱㄷ과 3.6-7ㄱㄴㄷ.7ㄹ-8(◎ 3ㄱ 참조)
◎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
○ 주님,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하나이다. 제 입의 말씀을 들어 주시기에, 천사들 앞에서 찬미 노래 부르나이다. 거룩한 성전 앞에 엎드리나이다. ◎
○ 당신은 자애롭고 진실하시니,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이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세우시니, 제 영혼에 힘이 솟았나이다. ◎
○ 주님은 높이 계셔도 낮은 이를 굽어보시고,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알아보시나이다. 제가 고난의 길을 걷는다 해도, 원수들의 분노 막아 저를 살리시나이다. 당신은 손을 뻗치시나이다. ◎
○ 주님은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시나이다.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리라! 주님, 당신 자애는 영원하시옵니다. 당신 손수 빚으신 것들 저버리지 마소서. ◎
여러분은 세례 때 그리스도와 함께 묻혀 그리스도와 함께 되살아났다고 바오로 사도는 선포한다. (콜로 2,12-14)
형제 여러분, 12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13 여러분은 잘못을 저지르고 육의 할례를 받지 않아 죽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분과 함께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14 우리에게 불리한 조항들을 담은 우리의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에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달라고 하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청하면 받으리라고 하신다. (루카 11,1-13)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5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7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12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연중 제17주일 제1독서 (창세18, 20-32)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3)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4-25)~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6)
'다가서서'로 번역된 '와익가쉬'(waiggash)의 원형 '나가쉬'(nagash)의 기본 뜻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까이 가다'(창세27,27; 2사무1,15), '접근하다'(민수4,19; 사도20,21)이다.
당시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대면하여 서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더욱 하느님 앞으로 다가섰다는 사실은 그가 소돔 성을 향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을 가졌는지를 반영한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친밀함과 기도에 대한 확실한 응답을 얻기 위한 간절함이 들어있는 행동이다.
시편 73장 28절의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 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창세기 18장 23절의 '의인'에 해당하는 '차디크'(tsadiq; the righteous)는 '의로운'(창세20,4; 시편116,5), '옳은'(잠언25,26; 이사41,26)이란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의로움을 지닌 사람'(탈출9,27; 잠언18,17), '옳고 참된 것을 말하는 사람'(이사41,26), 특히 '의롭고 흠없는 사람', '하느님의 법도를 순종하는 사람'(창세6,9; 시편5,13)이란 의미로 쓰였다.
즉 의인의 기준은 성품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고 하느님의 율법을 준행하려는 경건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대로 '악인'에 해당하는 '라샤'(rasha; the wicked) 역시 일차적으로는 '사악함'(시편5,5), '불의'(잠언4,17), '죄악'(시편125,3; 에제7,11)을 뜻하는 말이나 하느님의 성품과 그의 뜻에 위배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쓸어버리시렵니까'에 해당하는 '싸파'(sapa)는 '밀다'(이사7,20), '잡아채다', '빼앗다'(이사40,15), '치다'(1사무26,10)라는 뜻으로서, 어떤 쌓여 있는 사물을 '휩쓸어 파괴시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가 하느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파괴시켜 버리다'(destroy), '쓸어 버리다'(sweep away)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차원에서 창세기 18장 23절은 하느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거나 쓸어 버려서는 안된다는 아브라함의 간절한 호소를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창세기 18장 24절에서 아브라함은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데, 먼저 의인 쉰명에서 시작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의인 열 명이라도 있으면, 동성 연애 때문에 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유보시켜 달라고 간구한다.
그가 이처럼 쉰 명에서 시작한 것은 소돔과 그 인근 성읍(고모라, 아드마, 츠보임, 초아르; 창세기 14장), 즉 다섯 성읍들에서 적어도 한 성읍에 의인 열 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당시 소돔 성의 인구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돔이 비옥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창세13,12) 전체 인구는 많았고, 그 가운데 쉰 명은 지극히 적은 수였기에 이 정도의 의인은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송봉모 신부님의 아브라함에 관한 글에서는 그 당시 소돔 성읍의 인구를 만 명 정도로 본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이렇게 적은 수를 내세워 소돔성의 구원을 호소한 것은 의인 쉰 명이라도 크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혹시 ~있다면'으로 번역된 '울라이 예쉬'(ullai yesh)에서 '울라쉬'는 '아마도' 라는 뜻이며, '예쉬'는 '~이 있다'(there is)란 뜻이다. 직역하면, '아마도'(쉰 명은)있을 것입니다'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심섞인 추측을 반영하는 말이다. 즉 그많은 소돔성의 인구 중에 설마 쉰 명이 없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6)
'용서하다'에 해당하는 '나사'(nasa)의 기본적 의미는 '들어 올리다'(예레4,6; 에제3,14)이고, '(사람의 머리를)들다'(욥기10,15; 즈카2,4)라는 뜻도 있다. 이것은 죄인의 머리를 들게 해주는 것이나 죄벌의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서 들어 올려서 다시 높여 주는 행위가 모두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관련이 있기에, '용납하다', '사유하다', '용서하다'(창세13,6.7; 미카7,18; 탈출10,37참조)란 뜻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곳 전체'에 해당하는 '레콜 함마콤(lekol hammaqom; all the place; the whole place)은 '콜'(kol)이 '모두', '다', '전체'(창세2,2), '모두', '전부'(신명1,22)라는 뜻이 있으므로, 이것은 '의인 뿐만 아니라 악인도 거주하는 모든 성읍(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창세기 18장 26절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제시한 조건(창세18,24)을 기꺼이 수락하고 풍성한 자비를 약속해 주셨음을 보여 준다. 이 약속은 죄인을 징벌하시는 하느님의 공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자비)에 근거한 것이다.
하느님도 아브라함도 여섯 번의 흥정을 통해 이토록 서로 자비에 호소하고 자비를 표출하지만, 기어이 자비를 받아 입을 만한 의인들이 없어 불과 유황의 징벌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원리를 볼 수 있다. 즉 의인으로 말미암아 악인도 구원에 동참하는 길이 열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원리는 단 한 사람 뿐이었던 의인 예수님, 무죄하신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죄인들이 구원받는 십자가 사건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로마5,18; 에페2,8.9).
연중 제17주일 복음 (루카11,1-13)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르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10)
루카 복음사가는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해 11장 5~8절에서 '한밤중에 찾아온 벗의 비유'를 들고, 기도 응답에 대한 보다 분명한 확신을 주기 위해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세로 기도할 때 반드시 응답받으며,하느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내용이 기록된 11장 9~13절을 첨가한다.
11장 9절에 '청하여라'로 번역된 '아이테이테'(aiteite; ask)는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청하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되는 '아이테오'(aite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것은 아들의 신분인 하느님의 자녀가 위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이 동사가 현재 명령법으로 사용되어서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청할 것을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으며, 또한 능동태로 사용되어 자신이 직접 청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단어가 '기도'와 관련해서 많이 사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루카10,13; 마태18,19; 마르11,24).
한편 '주실 것이다'로 번역된 '도테세타이'(dothesetai; it will be given)는 '주다'를 뜻하는 '디도미'(didomi)의 미래 직설법 수동태이다. 희랍어 문법에서 미래 직설법은 미래에 반드시 발생할 어떤 사건에 대한 강한 확신을 뜻하므로, 여기서는 하느님께 청하면 '반드시 응답받는다'는 강한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찾아라'로 번역된 '제테이테'(zeteite; seek)는'발견하기 위해서 애써서 찾는 것'을 의미하는 '제테오'(zeteo)의 현재 명령형이다. '제테오'(zeteo)는 되찾은 은전의 비유(루카15,8), 되찾은 양의 비유(마태18,12)에도 사용되었고, 하느님을 찾는 데도 자주 사용되었으며 (신명2,29; 이사55,6; 65,1; 사도17,27), 천국의 잔치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묘사할 때에도 사용되었다(루카13,24).
따라서 '찾아라'는 것은 단지 성도 개인에게 필요한 것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만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 자신을 찾으라는 의미까지도 포함된다.
한편 '얻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휴레세테'(hyuresete; you will find)는 미래 능동태로서 '너희들이 능동적으로 발견할 것이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이 생겨나는 것을 암시한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예레29,13~14ㄱ)
그리고 '문을 두드려라'로 번역된 '크루에테'(kruete; knock)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는 안되게끔 열성을 다해 간절히 두드린다는 의미를 가진 '크루오'(kruo)의 현재 명령형이다. 이렇게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가 구하는 실제 내용이 하느님께 상달되어 문제에 대한 해결의 문을 하느님께서 반드시 확실하게 열어 주신다는 것이다.
'열릴 것이다'에 해당하는 '아노이케세타이'(anoigesetai; will be opened)는 '열다'를 뜻하는 '아노이고'(anoigo)의 미래 직설법 수동태이다. 이것은 멀지 않은 장래에 반드시 열릴 것이라는 확신을 불어넣어 주고, 또한 수동태로서 그 응답의 비결이 바로 하느님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루카 복음 11장 9절의 '청하여라', '찾아라', '두드려라'는 점점 적극성을 띠는 자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기도의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이같은 집요함과 끈질긴 인내, 그리고 열성이 담긴 기도의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하여 루카 복음 11장 10절에서는 11장 9절의 이유를 밝히는 접속사 '가르'(gar; for; 왜냐하면)로 시작하여 왜 기도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설명해준다. 11장 10절의 원문은 모두 동사가 현재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하느님의 기도의 응답이 먼 미래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일이라는 것을 생동감있고 실감나게 표현해 주고 있다.
<기도>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이 말씀은 기도할 때에
‘인내’가 필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안 주려고 하셨다가도
우리가 줄곧 졸라 대면 마지못해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우리의 사정을 모르시거나, 아니면 우리의 사정에 무관심하셨다가
우리가 청하면 그때서야 알게 되셔서 주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2-33).”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 세상에서는 줄곧 졸라대면 마지못해 주는 일이 많지만,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라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보다 먼저 알고 계시는 분이고,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시는 ‘때’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우리는 그 ‘때’를 모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신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잘 받기 위해서 하는
준비입니다.
(기도란, 안 주려고 하시는 분을 졸라서 받아내는 일이 아니라,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청해서
받아라.” 라는 뜻이 됩니다.
(‘청하는’ 일은 곧 ‘받는’ 일이 됩니다. 주시니까 잘 받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청하지 않는 이’는 ‘받지
않겠다고 하는 이’입니다.
즉 주시는 데도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결과만 보면, 청하지 않는 이에게는 주시지 않는 것이
되는데,
사실은 안 주셔서 못 받는 것이 아니라 안 받으려고 해서 못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기적은,
사람들 쪽에서 배가 고프니까 먹을 것을 달라고 청했기 때문에 행하신 일이 아니라,
예수님
쪽에서 사람들의 배고픔을 먼저 보시고 행하신 일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받아먹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나는 배가
부르니까 안 먹겠다.” 라고 거절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또는 “이 빵은 맛이 없게 보여서 안 먹겠다.” 라고 거절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런 사람은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 줄 때, 그 빵을 달라고 청하지 않았을 것이고,
제자들은 그런 사람에게는 빵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 먹겠다고 하는데도 억지로 먹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그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기적의 빵을 못 먹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청하지 않아서(주는 것을 안 받아서) 못 먹은 사람이지,
안 주었기 때문에 못 먹은 사람은
아닙니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이 말씀에서 ‘성령’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성령이 아니라,
영적인 선물, 또는 영적인 은총으로 해석됩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좋은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마태 7,11).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해로운 것을 주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울고 떼를 써도 주면 안 되는 것은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우리가 나쁜 것이나
해로운 것을 청한다면?
그것도 아주 끈질기게 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기가 무엇을 청하고 있는지 잘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자기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청하더라도 그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
‘좋은 것, 나쁜 것’이라는
말에서 ‘욥’이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욥
2,10.공동번역)”
이 말만 놓고 보면, 하느님은 좋은 것도 주시고 나쁜 것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러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앞의 말과 모순됩니다.
욥이 한 말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인데,
우리가 보기에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나쁜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욥이 아무 이유
없이 겪은 고난과 시련은 ‘나쁜 것’이 아니었나?”
물론 그의 시련과 고난을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 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창세 50,20; 로마
8,28).
그러니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면서 기도를 바칠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생각하면서 바쳐야 합니다.
지금의 인생만 볼
것이 아니라 내세의 하느님 나라에서의 인생도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을 지나가면 부활과 영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인내가 더욱 중요하게 됩니다.
'주님의 기도 성당' 가톨릭 기도문이
개신교 기도문으로 뒤바뀐 것에 대하여
게임에는 룰(규칙)이 있고 장사에도 상도의가 있습니다. 하물며 영혼들의 구원을 다루는 종교에는 더할 나위 없는 윤리와 규범들이 필요하리라 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성지 예루살렘 올리브 동산에는 ‘주님의 기도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은 프랑스 정부 소유이고 카르멜 수녀회(봉쇄 수녀회)중 개혁 그룹에 속하는 맨발의 카르멜 수녀회에 위탁되어 있습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하시고 귀국길에 성지 이스라엘을 순례하였던 부산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최재선 요한 주교님이 주님의 기도 성당에 들렀을 때 여러 나라 말로 된 주님의 기도문이 있었는데 한글로 된 기도문이 없는 것을 보시고 귀국하신 후 바로 우리말 주님의 기도문을 기증하였습니다. 그 후 성지순례 중에 주님의 기도 성당을 방문하는 우리 순례자들에게 큰 기쁨을 주었을 것입니다.
부산교구 최재선 요한 주교님이 봉헌한 우리말 주님의 기도
그런데 지난 2008년 12월 6일, 순례 가이드로부터 한통의 확인 전화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주님의 기도문이 붙어 있는데 우리 가톨릭 기도문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확인 해 보니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이 붙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개신교용 주님의 기도문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며칠 후 주님의 기도 성당 카르멜 수녀원 원장과 담당자를 만났는데 수녀원측에서는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이 마모되어 교체가 필요한 시기에 개신교 목사가 요청을 하였고 또 교회일치 차원에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기에 개신교 주님의 기도문을 붙였다고 해명을 하였습니다.
참고로 봉쇄 수도원은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활동 수도회’와 달리 말 그대로 지정된 한 장소에서 초세기 은수자들이 광야에 나가 홀로 살았듯이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굳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상물정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위의 사진에서 확인되었듯이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은 교체를 필요로 할 정도로 파손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자기처럼 타일 위에 글을 써서 구워낸 것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른다고 마모된다든지 보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스캔들의 목사님은 교회일치를 받아들이지 않는 보수 교단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만...잘못 되었다고 느꼈을 때 바로 시정할 수 있는 겸손한 용기도 목회자에게 기대되는 중요한 덕목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경우에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카르멜 수녀원과 어느 목사님의 합작에 의해서 가톨릭 주님의 기도문이 짓밟히는 수모가 카르멜 수녀회 안에서 비록 분별력 없는 수녀에 의해서 일지라도, 수도자에 의해서 저질러졌다는 것은 카르멜회의 수치이기도 할 것입니다. 더구나 카르멜회의 영성이 싹튼 이스라엘 안에서 말입니다.
이후 콱 막힌 수녀원의 원장과 담당 수녀와의 만남 후 바로 부산교구에 사실을 알렸고, 부산교구에서는 공식적으로 주님의 기도 성당과 관련된 기관에 원상 복구를 바라는 공문을 발송 했습니다. 해당 기관은 예루살렘 총대주교(Fouad Twal, Patriarch of Jerusalem), 작은 형제회 성지관구장(Pizzaballa Pierbattista, Custody of HolyLand), 카르멜회 총장, 주님의 기도 성당을 관할하는 이스라엘 주재 프랑스 대사관과 해당 카르멜 수녀원(Sr. Marie Thérèse와 담당 Sr. Elsbeth)입니다.
이 후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와의 전쟁으로 직접적인 관할권을 가진 예루살렘 총대주교로부터 공식적인 답변은 시일이 조금 지난 2월 9일자로 있었고, 원래대로 복구 될 것이라는 답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세월이 흘러 9월 중순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원래대로 복구되기를 희망하며 기다렸지만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아 이러한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들이 직접 나서서 결자해지하기를 바라며 치부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개신교 목사와 주님의 기도문 수녀원 그리고 관리감독의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
당사자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이야기 하며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책임 소재를 따지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법 규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는 법의 규정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때때로 돈과 권력은 법의 규정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도 아무런 죄 없이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책임’을 진다는 것으로 비록 강제 규범은 아니지만 ‘양심’의 목소리에 호소하는 윤리 규범이 있습니다. 특별히 종교는 이 윤리 규범위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은 세상의 모든 규정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다름’은 하느님의 축복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인을 자칭하면서‘다름’은 악이고 그 악은 제거되어야 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참 많이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로 2000년 교회 선교 역사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기보다 선교라는 명목 하에 파괴와 억압이 자행되기도 하였습니다. 불행 중 다행히 가톨릭 교회는 2000년 대희년을 맞이하면서 지난 과거를 반성하고 참회하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아무리 결과가 ‘선’한 것일지라도 과정이 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선의를 위한 것일지라도 타인을 짓밟고 타인의 것을 말살하고 그 위에 서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성지에까지 와서 선교를 핑계 삼아 남을 짓밟고 찬탈하는 행위를 자행한 목사님께서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처음 그대로 돌려놓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라!’고 기도 하는 바로 그 자리가 목사님 당신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장소가 되지 않기를!
사랑의 행위는 감추려 해도 사랑의 향기가 되어 더욱 널리 퍼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늘나라에 영원한 상급을 쌓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악인의 행위도 잊혀지지 않고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되게 되어 있습니다.
최재선 요한 주교님께서 봉헌하셨던 한글판 주님의 기도문은 비록 세월을 간직한 낡은 기도문일지라도 세상을 향해 교회 문을 활짝 열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염원을 담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하였던 의미 있는 기도문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짓밟고, 남의 것을 파괴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예수님의 복음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시 읽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신다면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