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그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1801년 신유박해 때 집안이 몰락하였다.
김대건은 열여섯 살인 1836년 사제가 되고자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1844년 부제품을 받은 그는 선교 사제의 입국을 돕고자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의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 신부는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 사제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려다가 1846년 6월에 체포되어 여러 차례 문초를 받고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 5월 6일 서울에서 한국 순교자 103위를 시성하면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정하상 바오로와 함께 한국의 대표 성인으로 삼았다.
즈카르야는 주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긴 요아스 임금과 백성을 꾸짖다가 성전에서 살해당한다.(역대하 24,18-22)
그 무렵 요아스 임금과 유다의 대신들은 18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로마 5,1-5)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3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4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사도들에게 말씀하신다.(마태 10,17-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제1독서 (이사66,10-14ㄷ)
"보라, 내가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시내처럼 끌어들이리라.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듯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라." (12-13)
이사야서 66장 12절은 주 하느님께서 회복된 예루살렘에
강물같은 평화를 넘치게 하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본문에서 '예루살렘에'에 해당하는 '엘레하'(elleha; to her)는
대상을 나타내는 '엘'(el)이란 전치사와 여성 3인칭 단수 목적격 접미어가
합성된 형태로 되어 있다.
그 예루살렘에 평화가 넘치게 하시는 분은 '내' 즉 본문의 화자인 주님이시다.
이러한 사실이 '히느니 노테'(hinni noteh; behold I will extend)를 통해 강조되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보라, 내가 펼치고 있다' 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은 펼치고 있는 주 하느님께서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구문이다.
특히 '노테'(noteh; I will extend)는 '펼치다', '뻗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나타'(natah)의 능동태 분사로서, 임박한 미래 혹은 현재 진행의 의미를 나타낸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펼치시는 것은 강물같은 평화이다.
이 평화 즉 '샬롬'(shallom)은 부족함이 전혀 없이 온전히 채우는 것을 의미하는
동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충족함', '평화'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본문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는 '샬롬'(shallom)은 물질적인 측면에서
예루살렘의 번영이라는 차원을 넘어 영적인 측면에서 하느님과 회복된 관계로 인해
하느님께서 시온(예루살렘)에 허락하시는 평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인류 구속 사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를 예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장차 모든 성도들이 주님께서 메시야의 인류 구속 사업을 통해
거저 주시는 은혜로 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을 보여준다.
'민족들의 영화를 넘쳐 흐르는 시내처럼'
본문의 예언은 이사야사 61장 7절의 후반절과 일맥상통하는 예언이다.
여기서 '시내처럼'에 해당하는 '케나할'(kenahal; like a stream)의
어근 '나할'(nahal)은 원래 우기 때에만 흐르다가 건기 때가 되면
완전히 말라 버리는 와디(wadi)를 의미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러한 하천이 언제나 넘쳐흐르는 상태가 될 것이라고 예언된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방 여러 민족들의 영광을
끊임없이 넘쳐 흐르는 시내처럼 주신다는 것은
회복된 예루살렘에 이방 여러 민족들의 재물들이
끊임없이 공급되게 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은 예루살렘 귀환 이후에는 부분적으로만 성취된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를 통해 이것은 점점 더 성취되고 있다.
'너희는 젖을 빨고 팔에 안겨 다니며,
무릎 위에서 귀염을 받으리라.'
본문은 이사야서 60장 16절과 일맥상통한 예언으로서,
문자적으로 '너희들이 옆으로 안겨서 젖을 빨 것이며,
무릎에서 즐겁게 놀 것이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주님의 백성이 주님 대전에 불순종하고 이방 민족들을 의지하여
구원을 얻으려고 애썼을 때에는 오히려 이방 민족들의 약탈을 당하고 유린을 당했다.
하지만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게 되면,
하느님께서는 과거 그들을 수탈하게 했던 이방 민족들로 하여금
그들을 섬기도록 역사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들의 도움을 얻어 성장할 뿐만 아니라,
그 무릎에서 뛰놀 것이라는 예언은 민족들이 이제 더 이상
위협적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을 암시한다.
'귀염을 받으리라'에 해당하는 '테샤오샤우'(theshaoshau; be dandled)의
원형 '샤아으'(shaah)는 이사야서 11장 8절에서 회복된 메시야 왕국에서의
평화의 상태를 예언하는 단어, 즉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미는 모습을 그리는 단어로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모습을 강조한다.
회복된 메시야 왕국에서는 독사가 젖먹이 어린 아이에게
더 이상 위협적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과거 위협적인 존재였던 민족들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을
'샤아으'(shaah)라는 단어가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로하리라'
이사야서 66장 13절에서 '위로하다'라는 의미의 동사
'나함'(naham; comfort)이 세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어에서 3이라는 숫자는 7이라는 숫자와 더불어 완전함을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위로하다'는 단어가 거듭 세 번이나 사용된 것은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주실 위로는 충분하고도 완전한
위로라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이사야서 후반부인 40장부터 66장까지에서
모두 12구절에서 14회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빈도는 전반부와 중반부라고
할 수 있는 1장 부터 39장까지에서 모두 3구절에서
3회밖에 사용되지 않은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것은 이사야서 후반부가 전반부와 다르게 이스라엘의 회복을
보다 더 강조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본절에서 주님의 위로는 어머니가 제 자식을 위로하는 것에 비유된다.
여기서 '자식을'에 해당하는 '케이쉬'(keish)의 어근 '이쉬'(ish)는
어린 아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장성한 한 남자를 지칭하는 단어이다(창세2,23).
어머니가 어린 젖먹이를 위로하는 것은 다분히 신체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장성한 아들을 위로하는 것은 영적이며 정신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그런 차원에서 주님의 위로하심이 이와 같다는 것은
장차 예루살렘의 거주민들에 대한 위로가
영적이며 정신적 측면의 위로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위상을 회복하여
그 안에 거주하는 자들은 더불어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따라 세례를 받고 낯설기만 한 신앙에 입문한 김대건은 15세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중국 대륙을 지나 마카오로 가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사제가 된 나이는 만 24세였습니다. 한국 교회의 첫 번째 사제로 초기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한국 교회사의 굳건한 기둥이 되고 계시지만, 실로 미력한 나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순교하기 전 감옥에 갇혀서도 사제요 지도자답게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재앙을 겁내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 것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데 뒷걸음치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려고 이 광활하고 거친 세상에 나설 때, 때로는 의회에 넘겨지기도 하고, 회당에서 채찍질을 당할 때도 있을 거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고통의 순간에 나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 뿌리에서부터 지켜 주시는 그분께 의지합니다.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도, 가장 큰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는 우리 내면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드러나게 되고, 또한 내가 가장 크게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비롯한 모든 순교자가 고문과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자신의 삶과 신앙의 뿌리가 무엇이고 어디에서 왔는지 훌륭히 보여 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우리에게 알려 주실 것입니다.”

<박해>송영진 모세 신부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마태 10,17).”
이 말씀은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지 않도록 사람들을 조심하여라.”가 아니고,
“사람들이
박해를 하더라도 신앙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라.”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을 못하게 막는 것이 박해의 목적이기 때문에
박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막는 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뜻도 됩니다.
(“박해로
육신의 생명은 잃어도, 영원한 생명은 잃지 않도록 하여라.”)
순교는 육신의 생명을 잃는 대신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입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18).”
박해는 신앙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재판 때의 변론을 통해서 증언할 수도 있지만,
죽더라도 신앙을 지키는 모습 자체가 증언이 됩니다.
순교는 육신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증명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9-20).”
이 말씀은 인간적인 힘으로 박해를 극복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느님께(성령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넓게 생각해서 “박해 자체를 걱정하지 마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종교박해는 사실상
하느님(예수님)과 박해자들의 싸움입니다.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 편에 서는 일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예수님)께서 신앙인들을 도와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로 그것을 믿어야 하고, 믿는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를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궁리하지 마라.”
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라는 뜻이 됩니다.
순교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을 지키는 일입니다.
(배교자들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신앙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세속적인 방식으로 박해를 물리치려고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박해자들의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맞선다든지...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가르침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는
박해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일러 주신다는 뜻이 아니고,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인도를 제대로 받으려면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는,
신앙생활은 예수님(성령)의 힘을 받아서 하는 생활이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일입니다.
당신이 뽑으신 사람들이니 당연히 지켜 주실 것입니다.
(박해 때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1-22).”
아마도 가정 안에서의 박해가 가장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그 경우에 대해서,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라는 말씀을 떠올릴 사람도 있을 텐데,
이 말씀은 실제로
가족을 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가족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니 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라는 말씀이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참고 견디면서 식구들을
감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박해를 하더라도 가족은 적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자들은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잃은 양’입니다.
그들을 회개시켜서 ‘되찾은 양’으로 변화시켜야 하고,
구원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이 기도는 박해자들도 구원받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죽을 때까지 신앙을 지킨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죽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까지는,
신앙생활은 늘 박해를 각오해야 하는(감내해야 하는) 생활이 될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참고 견뎌야 합니다.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복음 (루카10,1-2.17-20)
그때에 일흔 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17~20)
루카 복음 10장 1~16절은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파견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지는 10장 17~20절은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교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기뻐하며'에 해당하는 '메타 카라스'(meta charas; with joy)는
'기쁨과 함께'라는 말인데, '메타'(meta)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기쁨에 넘쳐 있었던 구체적 이유가 다음에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신 것(루카9,1)과 마찬가지로,
일흔두 제자에게도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이것은 이들이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를 쫓아냈다고 보고한 사실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루카 복음 사가는 제자들을 파견한 당사자를 '주님께서는'(루카10,1)이라고 기록하여
제자들이 행하는 모든 권세와 권한이 예수님께로부터 기인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17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여기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퀴리에'; kyrie)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이 마귀들의 복종을 받아낸 것은 그들 스스로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의 이름 때문에'로 번역된 '엔 토 오노마티 수'(en to onomati su;
in your name)가 잘 말해준다.
'엔 토 오노마티 수'(en to onomati su)는 직역하면 '당신의 이름 안에서'이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에서 이름, 즉 '오노마'(onoma)는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본질적 속성이나 실체 및 그 실체의 권위를 의미한다
(요한5,43; 10,25; 사도10,48).
따라서 루카 복음 10장 17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
즉 구마의 이적이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모든 권세의 원천은 예수님이시며, 제자들은 단시 그 권세를 받아
행하는 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복종합니다'에 해당하는 '휘포탓세타이'(hypotassetai; are subject;
submit)는 '굴복시키다', '복종시키다'는 뜻을 지닌 '휘포탓소'(hypotasso)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복종하고 있습니다', '굴복하고 있습니다'는 뜻이다.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과거인데, 제자들이 현재 시제 동사로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구마 행위를 한 것이 너무나 놀랍고 뜻밖이어서, 예수님 앞에
보고하고 있을 때에도 그 일이 눈앞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0장 18절에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보았다'라고 번역된 '에테오룬'(etheorun; I saw; I behold)의
원형 '테오레오'(theoreo)는 깊은 흥미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사물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사령관으로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시고
아주 세밀하게 영계의 모습을 지켜보신 것이다.
이 동사가 계속적이거나 반복적인 경험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일흔두 제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때,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묵시록 12장 7절~10절, 13절과 요한 복음 12장 31절에도 나오지만,
여기서 일흔두 제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구마 이적은 종말론적으로
사탄이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 주는 명백한 표적임과 동시에,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능력과 효과를 나타낸다(루카11,18~22; 마르3,27).
그리고 루카 복음 10장 19절에 나오는 '뱀과 전갈'은 둘 다 치명적인
독을 가진 짐승들인데, 이것들은 사탄의 세력들을 상징할 때 주로 사용된다
(창세3,1~15; 시편91,13; 2코린11,3; 묵시9,3.5.10).
따라서 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것은 루카 복음 10장 18절과 같은 맥락에서
일흔두 제자에게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끝으로, 루카 복음 10장 20절의 '~이 아니고 ~으로'에 해당하는 '메~데'
(me~ de; not ~but)라는 문장 구조인 전형적인 히브리어 격언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본문을 살펴본다.
루카 복음 10장 20절의 말씀은 마귀들이 복종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묵시20, 12.15)에 기록되어
구원받게 된 것에 비하면 구마 이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마귀를 쫓아낸다고해서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 수표가 되는 것도 아니다(루카7,22.23).
구마 이적의 능력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부가적 특권인 것이다.
그리고 '기록된'으로 번역된 '엥게그랍타이'(enggegraptai;
are written)는 '등록하다', '기록하다'라는 뜻을 지닌
'엥그라포'(enggrapho)의 완료 수동태이다.
이 단어가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이미'
하늘 나라의 생명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된 점을 통해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가
바로 선택과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하늘 나라의 봉사자로 불리운 자들은
항상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되고,
겸손되이 모든 권세와 능력과 은사의 원천이신 주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