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ㄴ-22)

2016. 6. 19. 오전 5: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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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2주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마태 18,19ㄴ-22)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는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었고, 2005년부터는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으로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하느님께서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라고 말한다.( 신명 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는 원한과 격분과 분노 등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고, 서로 용서하며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어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고 한다.(에페 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두세 사람이라도 마음을 모아 청하면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신다며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형제를 용서하라고 하신다.(마태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통일동산에 세워진 '참회와 속죄의 성당'  (2013.6.25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오후2시 봉헌식)  내부 제단 뒤 성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제1독서 (신명30,1-5)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낸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1~3) 

앞장인 신명기 29장에서는 계약을 위반한 자에게 닥칠 저주를 선포한 이후, 신명기 30장에서는 회복의 국면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황을 다룬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절 다시 번역하면 '내가 너희 앞에 둔 그 축복과 그 저주의 바로 이 모든 일들이 너희에게 찾아온다면'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앞장까지의 내용속에서 주로 다룬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의 선포였다. 

따라서 본문의 표현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먼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데까지 이르는 비참한 상황이 이루어지는 미래의 시점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때로는 하느님께 순종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전 국가적으로 하느님을 배반하여 저주를 당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모세의 설교 가운데 이미 등장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로 번역된 '하세보타 엘 레바베카' (hashebotha el ebabeka)에서 '하세보타''돌이키다' 란 뜻을 가진 '슈브'(shub)동사의 사역형 완료  2인칭으로서 '네가 다시 돌이키다' 라는 뜻이다.  

원문은 사역형을 사용해서 능동적으로 곰곰이 생각하여 기억해 내는 자세를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사용된 '슈브' 동사는  이스라엘이 하느님께로부터 돌이켜 배반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하지만 여기 언급된 마음의 돌이킴은 이러한 하느님께 대한 배반과 대조되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단어가 다음 절에서도 사용된 것을 볼 때에 본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회개에 따른 불신앙으로부터의 회복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으로 번역된 '힛디하카'(hidihaka)'몰아내다'란  뜻을 가진 '나다흐'(nadah)동사의 사역형에 2인칭 단수 목적격 접미어가 붙은 말로서 '그가 너를 내몰았다'라는 의미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몰아낸 것은 '콜 학고임'(kol hagoim)  '모든 민족들'이다. 여기에서 '민족들'(나라들)이 복수형으로 사용된 것은  장차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서 그들에게 포로됨의 고통과 갖은 핍박을 주게 될 이방 국가가 단 한나라에 그치지 않을 것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북왕국 이스라엘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아 멸망당하고, 그 땅에 거주하던 백성들이 흩어지게 되었으며(B.C.722년), 남왕국 유다 역시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3차에 걸쳐서 바빌론에포로로 잡혀가게 되어(B.C.605년/B.C.597년/B.C.586년)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돌아와서'로 번역된 '샤브타'(shabtha) '되돌아가다'뜻을 가진 '슈브'(shub)동사의 완료형 2인칭이다.  앞절에서도 설명했듯이 이 단어가 가리키는 것은  불신앙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단어 뒤에서 이 단어를 보완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쓰이는 '들으면'으로 번역된 '샤마타'(shamatha)는 문자적으로 '네가 듣다'(순종하다)이다.  이러한 표현은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며, 그 말씀을 듣는 데서부터 회개와 그에 따른 회복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분의 말씀을' 번역된 '베콜로'(beqollo)에서  일반적으로 '말씀'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명사 '따바르'(dabar) 대신에 말씀의 내용보다는 소리를 발하는 것 자체를 가리키는 '목소리'라는  뜻의 '콜'(qol)이라는 단어가 쓰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 말씀의 현장감과 생동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서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게 적용되는 살아 있는 말씀임을 알려준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에서 '하는 대로' 번역된 '케콜'(kekol)에서 '콜'(kol) '모든'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케콜''모든 것을 따라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문의 의미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것은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한 모든 것'이다.

신명기 29장 28절에 나온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그들이 들어야 할 것바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내 주신 율법의 모든 말씀 것이다. 또한 포로된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들어야 하는 말씀은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것'으로 나타냄으로써 미래의 세대들이 들어야 할 말씀과 오늘 전하는 말씀을 일치시키셨다. 

이것은 비록 많은 세월이 지난 그때라 할지라도 오늘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변함이 없을 것을 암시한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항구성을 나타내기 위해 '너희에게 명령하는'으로 번역된 '메차웨카'(metsaweka)에는 '명령하다'는 뜻을 가진 '차와'(tsawa)동사의 분사형이 쓰였다.

히브리어에서 분사형은 그 행동이 끊임없이 계속됨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로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우베콜 나프셰카' (bekol lebobka wubekol naphscheka)는 신명기 4장 29절과 6장 5절에도 언급된다. 

여기서 '뻬'(be)는 수단을 나타내는 전치사로서 '~을 가지고'란 뜻이다.  또한 각각의 '뻬'(be)에 붙어 있는 '모든'이란 뜻의 '콜'(kol)은  수단이 될 수 있는 대상의 최상 혹은 최대의 상태를 암시하는 말이다. 그리고 각각의 말 위에는 2인칭 남성 단수 접미어 '카'(ka)가 붙어 있다.

이것은 주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하여 동원하는 수단이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당사자의 것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다른 사람에 의해 주입된 생각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중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해야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번역하면 '너의 최선의 마음을 가지고, 너의 최선의 정신을 가지고'이다.

'마음'에 해당하는 '레바브'(lebab)사람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란 뜻이며, '마음을 다하고' 번역된 '뻬콜 레보브카' '너의 모든 중심을 다하여'라고 하는 것이 원어적 의미를 살린 번역이 된다(with all your heart).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마음'자신의 생각과 의지와 감정(知,意,情)이 모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서 한마디로 '(한사람의)인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부분이 없이 완전히 드러낸 상태에서 진실하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정신'으로 번역된 '나프셰카'의 원형 '네페쉬'(nepesh)는  일반적으로 '영혼'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는 단어이다.  '뻬콜 나프셰카' '너의 온 영혼을 다해'(with all your soul)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모습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자기 영혼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요한4,24). 

참고로 신명기 6장 5절의 '힘'으로 번역된 '메오데카'(meodeka)의  원형  '메오드'(meod)를 더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메오드' '넘치는 것'이란 뜻이다.  물론 이 단어를 '힘'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내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것'  또는 '넘치는 활동력'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관념적인 부분에 국한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 나의 모습과 행동 등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내 삶 속에 넘치도록 풍성하게 채워주신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을 보다 구체적으로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다. 종합하면 하느님을 사랑하되, '전심, 전영, 전력'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너희의 운명'으로 번역된 '셰부테카'(shebutheka)'포로로 잡히다'는 의미를 가진 '샤바'(shaba) 동사에서 유래한 '셰부트'(shebuth)에 2인칭 단수 소유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서 '너의 포로됨'(your captivity; your fortunes)이라는 뜻이다. 즉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포로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방 민족에 포로되어 있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계약(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복음 (마태18,19ㄴ-22)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원형 '아피에미'(aphiemi)'~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근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제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 seventy-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 seventy times)'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헵도메콘타키스  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과 '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남북통일은 언제 일어날까요??


<용서, 화해, 일치>송영진 모세 신부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9,22).”
예수님의 이 말씀은, ‘권고’가 아니라 ‘명령’입니다.
따라서 ‘용서’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1) 용서는 일차적으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쌓는 덕행입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또 나를 괴롭히는 증오심과 원한에서 벗어나는 일이 된다는 점에서도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1-32).”


용서하기를 거부하고 증오심과 원한만 키워간다면,
그런 ‘삶’ 자체가 지옥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과 평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도 용서해야 합니다.

“저쪽이 회개하면 그때 가서 용서하겠다.”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의 회개는 그의 문제이고, 용서하고 평화를 얻는 것은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평화를 다른 사람의 회개에 종속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2) 용서는 나 자신의 회개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일입니다.
내가 먼저 나의 죄를 인정하고, 내가 먼저 회개함으로써
참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한 일만 생각하고,
내가 그 형제를 용서하는 일만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너만 잘못했다.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교만한 태도입니다.)

내가 형제에게 잘못한 일을 생각해야 하고,
나도 형제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이란 서로 용서를 주고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누구는 용서만 하고, 누구는 용서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용서하는 일과
내가 회개하는 것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3)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간절하게 바라셨던 일입니다(요한 17,11.21).
하나가 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올바르게 믿고 섬기려면 용서를 실천해야 합니다.)
신앙인이면서도 용서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4) 그런데 사실 용서와 화해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개인 사이에서도 어려운 일이고,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는 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

이 말씀에서 중요한 말은 ‘마음을 모아’ 라는 말입니다.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한 목소리를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한 마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정해서 기도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신앙입니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로 모인 믿음과 마음입니다.
하나의 믿음과 하나의 마음으로 모으려면 우선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의심, 증오심, 원한 등을 버려야 합니다.

만일에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고 미워하면서
입으로만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친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그런 기도는 안 들어주실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마저도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고, 서로 미워하면서,
어떻게 마음을 모아서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치겠습니까?
어쩌면 그동안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동안 우리가 바친 기도가 제대로 된 기도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만 회개하고, 우리만 기도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저쪽은 아무런 호응도 하지 않고, 일치하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데...”
라고 생각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도 사람의 힘으로 안 될 때가 많은데,
정권을 변화시키는 일은 더욱더 사람의 힘으로는 어려울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안 되는 부분은 하느님께 맡겨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합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라는 말씀은,
용서가 결실을 맺기를 바란다면
많이 인내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올바른 기도는 올바른 믿음 속에서 바치는 기도이고,
올바른 믿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희망과 인내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글 연습] 남북통일 글짓기 예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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