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2주일] 끝자리 (루카14,1.7-14)
집회서의 저자는 높아질수록 자신을 낮추어야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는다며,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고 권고한다. (집회 3,17-18.20.28-29)
17 얘야, 네 일을 온유하게 처리하여라. 그러면 선물하는 사람보다 네가 더 사랑을 받으리라. 18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 20 정녕 주님의 권능은 크시고, 겸손한 이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28 거만한 자의 재난에는 약이 없으니, 악의 잡초가 그 안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29 현명한 마음은 격언을 되새긴다. 주의 깊은 귀는 지혜로운 이가 바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으로, 심판자이신 하느님과 새 계약의 중개자인 예수님께서 계신다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한다. (히브리 12,18-19.22-24ㄱ)
형제 여러분, 18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만져 볼 수 있고 불이 타오르고 짙은 어둠과 폭풍이 일며 19 또 나팔이 울리고 말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그 말소리를 들은 이들은 더 이상 자기들에게 말씀이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22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와 23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또 모든 사람의 심판자 하느님께서 계시고,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이 있고, 24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보시고,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며, 잔치를 베풀 때는 보답할 수 없는 이들을 초대하라고 하신다. (루카 14,1.7-14)
1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7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8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9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10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11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초대한 이에게도 말씀하셨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13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14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연중 제22주일 제2독서 (히브12,18-19.22-24ㄱ)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은 시온 산이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나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22~23ㄱ)
옛 계약을 가졌던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느님께 대하여 품고 있었던 공포감에 대하여 기록한 히브리서 12장 18~21절과는 달리, 히브리서 12장 22~24절에서는 성도에게 부여된 새 계약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가지는 새로운 관계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아간 곳'으로 번역된 '알라 프로셀렐뤼타테'(alla prosellelythate)는 히브리서 12장 18절과 첨예한 대조를 이룬다.
옛 계약 아래에 있는 성도들은 지상에 임재하신 하느님 대전에도 나아가지도 못했고 그 음성 듣는 것도 두려워했지만, 새 계약 아래 있는 성도들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 대전에도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에 대해 말한다. 그는 지금 자신의 독자들 중에 영육간에 지친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 배교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이미 목적지에 이르렀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탁월한 영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그 최후의 승리의 자리에서 뒤로 물러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마라톤 선수가 풀코스를 거의 다 달려와서 결승점이 보이는 트랙의 마지막 지점인 직선 코스에 접어들어 주저앉으려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자신의 독자들이 지금 이 직선 코스에 접어 들었다고 격려하면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영광을 기술해 주고 있다. 즉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다시 뒤로 돌아가거나 주저앉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과거 옛 계약 아래 있던 백성들은 그렇게 나아가고 싶어도 나아가지 못했던 반면에, 새 계약 아래있는 성도들은 하느님 대전에 너무나 손쉽게 나아갈 수 있다.
'시온산이고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이며 천상 예루살렘으로'
지상의 시나이산 그리고 지상의 예루살렘과 대조되는 하늘의 시온산, 하늘의 예루살렘에 대한 표현이다. 그곳은 계속해서 살아계시는 영원하신 하느님의 도성으로서, 사도 바오로가 증거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갈라4,26) 및 사도 요한이 본 '새 예루살렘'(묵시21,2)과 일치한다.
여기서 '도성'에 해당하는 '폴레이'(pollei)의 원형 '폴리스'(pollis)는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그리스의 자유 시민은 '폴리스'에 개인의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고, 행정과 통치에 관여하였다. '폴리스'는 아무에 의해서도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정치적 의지의 독립된 표현이었다.
그러나 구약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는 주로 히브리어 '이르'(yr)의 역어로 나타나며, 이 '이르'(yr)는 그리스의 '폴리스'와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에서는 모든 요새화된 고지가 '이르'로 지칭되었다.
즉 이것은 외적이 침입하지 못하는 안전한 곳이란 의미가 강조되는 단어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구약 시대에 '이르'로 지칭되었던 예루살렘은 특별한 곳으로 언급된다. 하느님께서 당신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요(2역대6,38), 하느님의 도성(시편46,5; 48,2), 대왕의 도읍이다(시편48,3).
그러나 이 찬란한 명성을 지닌 지상의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그림자였을 뿐이다. 새 계약 아래 있는 성도가 이른 곳은 그림자가 아닌 실체, 곧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늘의 예루살렘이다. 그곳은 하느님께서 지배하시는 곳이요, 새 계약 아래 있는 모든 성도는 그곳의 자랑스런 시민이 되었다(필리3,20).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
하늘의 도성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이 하느님 대전에서 그분을 모시고 있다. 여기서 '무수한'으로 번역된 '뮈리아신'(myriasin)의 원형 '뮈리아스'(myrias)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수(an innumerable multitude), 무제한적인 수(an unlimited nember)를 의미한다.
사도 요한은 그 숫자가 '수백만 수억만'라 했으며, 그렇게 어마어마한 숫자의 천사가 하늘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찬미하고 있다고 진술했다(묵시5,11.12) 그 많은 무리의 천사들이 날마다 찬양하는 광경을 통해 하늘 예루살렘의 축제의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다.
예언자 다니엘도 환시 가운데 천국을 보았는데, 그가 볼 때 하느님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다니엘7,10) 이라고 하였다.
천사들은 또한 구원을 상속받게 될 성도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이들이기도 하다(히브1,14).
'축제 집회'로 번역된 '파네귀레이'(panegyrei)의 원형 '파네귀리스'(panegyris)는 '모든'을 뜻하는 '파스'(pas)와 '집회'를 뜻하는 '아귀리스'(agyris)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명절의 모임'이나 '축제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고전 그리스 문헌에서는 사람들이 신들을 축하하기 위해 즐기는 축제일을 가리켜 쓰였다. 이 축일에는 국민 모두가 모여 신들을 축하하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한 그리스 개념에서가 아니라,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무수한 천사들의 축제 집회를 묘사했다고 본다.
'하늘에 등록된 맏아들들의 모임'
'맏아들들의 모임'에 해당하는 '엑클레시아 프로토토콘'(ekkllesia prototokon)은 하느님께서 택하신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이 두 단어는 모두 택한 백성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어휘이다.
먼저 '교회'를 뜻하는 '엑클레시아'는 '~에서 밖으로'를 뜻하는 전치사 '에크'(ek)와 '불러내다', '소환하다'를 뜻하는 동사 '칼레오'(kalle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구원받은 모든 이들을 지칭한다. 이것은 하느님의 왕국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말이다(마태16,18; 에페5,24~32; 콜로1,18).
또한 '맏아들들의'로 번역된 '프로토토콘'의 원형 '프로토토코스'(prototokos)는 '처음'을 뜻하는 '프로토스'(protos)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그 기본 의미는 '장자의', '처음 태어난'이다.
구약 희랍어 번역 성경 70인역(LXX)에서 문자적 의미(창세25,25; 탈출13,2)와 전이된 의미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후자의 경우는 은총을 받은 자들 또는 선택된 자들을 가리키는 영예의 칭호로 나타난다. 신약에서도 이 단어는 예수님께 대한 영예의 칭호로 나오며,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행동의 불변성을 명확하게 표현한다(로마8,29; 콜로1,15.18).
그리스도께서는 구원받은 모든 이들의 맏아들이시다(로마8,29). 이 말은 그가 하늘의 영광을 상속하는 모든 이들의 첫째가 되심을 뜻한다.
본절에서 이 단어는 복수형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맏아들로 본 것처럼(탈출4,22.23)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상속하는 모두를 맏아들(장자)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도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계승한 공동 상속자라고 가르친다(로마8,17). 이것은 성도가 일시적인 고난 때문에 주춤거리거나 달음질을 포기해서는 안되는 이유를 잘 가르쳐주고 있다.
연중 제22주일 복음 (루카14,1.7-14)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13~14)
루카 복음 14장 13절에서 '장애인들'과 '다리저는 이들'로 번역된 '아나페이루스'(anapeirus; the crippled; the maimed)와 '콜루스'(cholus; the lame)는 원래 둘 다 동일하게 '절름발이'를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두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먼저 '아나페로스'(anaperos)는 신체의 일부분이 잘려 나갔거나 그 기능이 완전히 정지된 '불구자'를 가리킨다면, '콜루스'(cholus)는 신체의 일부분의 기능이 불완전한 것을 가리킨다.
한글 새 성경은 이러한 장애의 정도의 차이를 '장애인들'과 '다리저는 이들'로 번역하여 구분했다.
이들은 신체 장애로 말미암아 가난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대접을 받아도 아무 것도 갚을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는 경제적인 무능력자들이었다. 오직 여기서만 나타나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를 대접하라는 명령은, 자비를 베풀 때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루카 복음서 전체에 나타나고 있는 여자와 어린이와 죄인 및 이방인을 비롯한 가난한 이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소외된 자들에 대한 루카의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복음 14장 14절의 의인들이 부활하는 시기는 직접적으로 '보답을 받을' ('갚음을 받을'; '안타포도테세타이'; antapodothesetai; will be recompensed; will be repaid) 시기를 가리키며, 또한 '행복할'('마카리오스 에세'; makarios ese; you will be blessed) 시기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시간적으로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부활 시기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비록 이 비유가 잔치를 베푼 자에게 주는 비유이지만, 본문의 말씀은 성도들의 모든 삶에 있어서 그 초점이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보답이 아니라 하느님의 보답을 받는 자가 될 것을 교훈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세에서 아무 것도 보답할 수 없는 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마치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마태6,20; 19,21).
그리고 여기서 '의인들'은 '악인들'과 대조되는 개념인데, 종말의 날에 부활하여 하느님의 축복과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자들을 가리킨다.
끝자리에 앉아라.>송영진 모세 신부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루카 14,8-9).”
이 말씀은, 세속에서의
처세술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윗자리’는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보다 더 높은
자리를 뜻합니다.
주인이 앉으라고 권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스스로 그런 자리에 앉는 것은 ‘교만’입니다.
성인 성녀들 가운데에는 자기
스스로 성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없습니다.
만일에 자기 입으로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성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교만한 사람은 결코 성인품에 오를 수 없습니다.
여기서 혼인 잔치는 하느님
나라를 뜻하고, 초대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는 남들보다 ‘더 귀한 이’도 없고, 남들보다 ‘더 천한
이’도 없습니다.
따라서 나중에 더 귀한 이가 와서 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하는 상황은 교만의 결과를 강조하기 위해서 설정된 상황으로
해석됩니다.
또 하느님 나라에는 더 높은
자리도 없고 더 낮은 자리도 없습니다.
따라서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는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0-11).”
여기서 ‘끝자리’는 앞에
나왔던 ‘끝자리’ 라는 말과는 다르게,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를 뜻합니다.
‘겸손’이란 하느님 앞에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 또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에 제대로 앉는 것입니다.
만일에 속마음으로는 자기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고 싶어서 일부러 낮은 자리에(끝자리에) 앉는다면, 그것은 ‘거짓 겸손’입니다.
‘거짓
겸손’은 ‘위선’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만일에, 윗자리로 올라앉으라는 말을 들으려고 일부러 낮은 자리에(끝자리에) 앉은
것이라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흔히 ‘거짓
겸손’이라는 함정에 빠집니다.
자기를 무조건 낮추기만 하면 다 겸손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속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겸손한 척
하면서 그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마음을 보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겸손하다는 칭찬을 듣고 싶어 하고, 들으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진짜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겸손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초대한 이가 와서 앞자리로
올라앉으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누구에게나 영광스러운 일이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교만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뜻인데,
그 나라에 들어가든지 못 들어가든지 간에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이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라고 말해도 안 되고, “나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고 말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 겸손하게 간청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의 모범이 되는
인물로 바오로 사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을 ‘칠삭둥이’ 라고 표현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는 칠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1코린 15,8-9).”
만일에 이 말이 속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겉으로만 자기의 겸손을
과시하려고 한 말이라면, 바오로 사도의 겸손은 ‘거짓 겸손’이고, 그는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이 진심으로 한
말이라고 믿고 있고, 그를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그는 자기가 사도로서 다른 이를 구원하는 일을 하고 있음을 잘 인식하고
있었지만, 사도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실격자가 될 수도 있음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필리
3,12).”
이 말은, “나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확정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런 말들은 그가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잘 나타내고, 우리에게 좋은 모범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초대받거든 끝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며, 겸손하게 행동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우리가 겸손해야만 하는 것은 나에게 건네시는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기 위함이며, 이웃을 통해 전해 주시는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 위함이지요.
겸손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을 잘 알고, 남을 인정해 주어야만 합니다.
나아가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도 버려야 하지요.
이어 예수님께서는 자신 안에 잠재된 사심과 계산적인 마음을 버리기를 촉구하십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행위의 순수성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누구에게 선물하고, 누구를 초대하는 그 자체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나도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게 되고, 상대방이 보답을 해 주지 않으면 서운해질 수도 있지요.
만일 이렇게 된다면 내가 베푼 선행의 순수성을 잃게 될 위험마저 있지 않습니까?
둘째, 예수님께서는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도록 촉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외적으로 가난한 것보다 더욱 심각한 현상은 마음이 피폐해 영혼이 가난한 것이지요. 하
느님과 이웃에 대해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풍요해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