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1주일] 좁은 문 (루카 13,22-30)

2016. 8. 21. 오전 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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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1주일] 좁은 문 (루카 13,22-30)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이사야 66,18-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8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19 나는 그들 가운데에 표징을 세우고, 그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을 타르시스와 풋, 활 잘 쏘는 루드, 투발과 야완 등 뭇 민족들에게 보내고, 나에 대하여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내 영광을 본 적도 없는 먼 섬들에 보내리니, 그들은 민족들에게 나의 영광을 알리리라.
20 마치 이스라엘 자손들이 깨끗한 그릇에 제물을 담아 주님의 집으로 가져오듯이, 그들도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 동포들을 주님에게 올리는 제물로, 말과 수레와 마차와 노새와 낙타에 태워, 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1 그러면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사제로, 더러는 레위인으로 삼으리라.”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니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라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말한다.(히브리 12,5-7.11-13)
형제 여러분,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8월25일 *연중 제21주일(R) - 양승국스테파노 신부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이 적겠냐는 물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며,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루카 13,22-30)
그때에 22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셨다.
23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24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5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26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27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28 너희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너희만 밖으로 쫓겨나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29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30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8월 22일 연중 제21주일


<좁은 문>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 즉 하느님 나라의 문입니다(마태 7,14).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은 문’입니다(마태 7,13).

하느님 나라의 문이 ‘좁은 문’이 된 것은 자격 심사가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고, 자격을 얻은 사람만 들어갈 수 있어서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누구든지 자격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꼭 ‘좁은 문’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서에 ‘좁은 문’과 ‘넓은 문’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저쪽 세상에 두 개의 문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좁은 문’ 안쪽으로 들어간 사람들 외에는 모두 ‘문 밖에’ 있기 때문에(묵시 22,15) 문은 하나뿐이고, 안쪽과 바깥쪽으로 구분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사람이 많지만, 희망한다고 해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못 들어가는 사람은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격을 얻지 못한 것은 얻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고 해도 들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이 됩니다.
(희망은 하지만, 그 희망을 이루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사람.)


‘많은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그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모릅니다.
또 들어간 사람보다 못 들어간 사람이 더 많을지, 그 반대가 될지, 그것도 모릅니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면, 자격을 얻기만 하면 모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인류 전체가 다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많고,
죽어서 천당에 가기를 바라면서도 노력하지는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조금 노력해 보다가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 마음대로 자기는 자격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고...


‘좁은 문’이라는 말에서 사법시험이 연상됩니다.
시험 자체도 어렵고, 합격자보다 탈락자가 훨씬 더 많기 때문에 확실히 좁은 문인데, 많은 사람이 그 문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에도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합격한 뒤에 훌륭한 법조인이 된 사람이 많지만,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전관예우를 받으면서 부당한 수임료를 받고, 탈세와 부정축재 등을 하는 경우, 그것은 세속적으로는 좁은 문을 통과했지만, 내세에서 멸망으로 이끄는 넓은 문으로 가는 경우입니다.
(그 자신이 스스로 하느님 나라의 좁은 문을 외면하는 경우입니다.)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경쟁률을 생각하면, 또 그것을 차지하는 일의 어려움을 생각하면, 그것도 확실히 좁은 문입니다.
권력을 차지한 뒤에 정치를 잘한 사람도 분명 있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에게 권세를 부리고 사람들을 억압하기만 한 사람도 있습니다(루카 22,25).
그런 사람은 세속의 좁은 문은 통과했지만, 하느님 나라의 좁은 문은 외면한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일생 동안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문이 참으로 가치 있는 ‘좁은 문’인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일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일인가?
모든 사람의 ‘공동선’을 위한 일인가?
아니면 자기 혼자만의 이익을 위한 일인가?
혹시 지금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생을 다 산 뒤에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라고 후회할 일은 아닌가?

눈앞의 일만 보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최종 종착점을 미리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 인생의 종착점은 ‘임종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심판대에 설 때’입니다.


구약성경 ‘코헬렛’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젊은이야, 네 젊은 시절에 즐기고 젊음의 날에 네 마음이 너를 기쁘게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네 마음이 원하는 길을 걷고 네 눈이 이끄는 대로 가거라.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너를 심판으로 부르심을 알아라.
네 마음에서 근심을 떨쳐 버리고 네 몸에서 고통을 흘려버려라.
젊음도 청춘도 허무일 뿐이다.
젊음의 날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코헬 11,9-12,1).”

이 말을 겉으로만 보면,
“살고 싶은 대로 마음껏 살아라.” 라고 말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심판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생각하라고 했으니 “마음대로 살지 마라.” 라는 충고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실컷 즐기면서 살다가는 허무한 인생으로 끝날 것입니다.
인생이 허무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좁은 문’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실제로 그 문이 좁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문을 향해서 가는 ‘삶’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면, 하고 싶은 일을 참아야 할 때가 많고, 가지고 싶은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가 많고, 지기 싫은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일들을 싫어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문을 ‘아주 좁은 문’이라고만 생각하게 됩니다.



좁은 문(2013.8.25 연중 제21주일)벤쿠버 한인성당



- "좁은 문" -

연중 제21주일 - 이사66,18-21 히브12,5-7.11-13 루카13,22-30


 좁은 문의 시대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 아니면 둘 아이를 낳는 시대이기에 사람으로 태어나기도 여지없이 좁은 문입니다.

얼마 전 성인처럼 살다가 세상을 떠난 정요한 수도형제도 일곱 형제 중 여섯 번째 이니 오늘날 같아선 세상에 나오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제 경우도 네 째이니 세상 나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너무 좁은 문 때문에 태어나지 못하는 아까운 사람들이 참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 자식의 회사 합격 이야기를 기쁨에 넘쳐 전하는 자매들을 만난 일이 생각납니다. “120여명이 지원해 마지막 면접에서 2명만 합격하는데 제 아들이 합격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3년 만에 이룬 경사입니다. 그 전에 제 조카가 한 명만 뽑는 시험에서 63명이 지원한속에서 최종 합격했던 일도 생각이 났고,

또 그 후 어느 자매님 아들이 200명이 넘는 중에서 한 명 뽑는 데 합격했다는 일도 생각이 났습니다. 겉으로야 기쁨을 함께 했지만 즉시 떠오른 합격하지 못한 무수한 젊은이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젊은이들의 일자리 잡기가 정말 하늘의 별따기 같이 좁은 문입니다. 바로 이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좁은 문의 현실을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답게 좁은 문의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은 좁은 문의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십시오. 현실을 원망해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문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눈높이만 낮춰 열린 눈으로 바라보면 바로 지금 여기 가까이 있습니다. 물론 좁은 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지만 들어가는 사람이 아주 적은 좁은 문입니다.

문이 닫혔을 때 두드리면 너무 늦습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모른다.”복음의 집주인이 가리키는바 주님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들의 애소(哀訴)입니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반응이 냉랭하기 짝이 없습니다.“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주님과의 피상적 관계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희생 없는 말만의 사랑을 살았던 삶임이 분명합니다. 주님과 무관(無關)하게 넓은 문을 살았던 삶에 대한 응보입니다.

좁은 문의 끝에는 하느님이 계시지만 넓은 문의 끝, 허무와 환멸 한 가운데 악마가 있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 충실한 정주의 삶 자체가 좁은 문입니다. 알고 보면 누구나 좁은 문의 현실을 살아갑니다.

바로 주님은 좁은 문의 현실 가까이 현존하시며 우리를 돕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도 어찌 보면 상대적입니다. 진정 주님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 깊어질수록 좁은 문은 내적으로 점점 커지는 넓은 문이 됩니다.

요즘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는 역경지수(逆境指數)를 중요시 한다 합니다. 바로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는 역량을 최우선시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믿음과 사랑으로 좁은 문을 통과할수록 역경지수도 높아질 것입니다.


둘째, 삶의 온갖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시련 없는 삶은 가치 없는 삶입니다. 어렵다, 어렵다 하면 자신도 모르게 약해집니다.

어느 분의 질타에 공감했습니다. ‘힐링이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강하게 키워야 한다. 지금은 전쟁상태도 아니고 일하면 굶지 않고 살 수 있는데 무슨 어려움 타령이냐’는 요지의 말입니다.

이래서 삶을 영적전쟁이라 합니다. 시련과의 싸움인 영적전쟁이요, 끝까지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 평화의 전사가 되어 온갖 시련을 견뎌내며 살아가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 하십니다. 사랑의 채찍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지겠지만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슬픔의 깊이는 기쁨의 높이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에서 오는 모든 시련들을 하느님의 훈육으로 받아들일 때 상처가 아닌 내적성장과 성숙의 계기가 됩니다.

일주 전 정요한 수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시련을 겪고 있는 여기 수도형제들은 서로 주님 안에서 슬픔을 나누는 형제애(兄弟愛), 전우애(戰友愛) 자체가 최고의 위로임을 깨닫습니다.

정요한 수사가 주장, 주도하여 세운 수도원 정문의 주님의 십자가와 수도원 십자로 중앙의 주님의 부활상이 정요한 수사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영광을 예고한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기쁨이요 나눌수록 작아지는 슬픔임을 실감합니다. 사실 십자가의 시련들을 피할 수도 없거니와 피하면 더 큰 십자가의 시련이 기다립니다. 시련을 견뎌낼 수 있는 더 큰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은사를 주십사 기도하는 것이 제일입니다.


셋째, 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맨 몸으로가 아닌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좌절과 절망으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 길을 달려가는 겁니다. 넘어지면 즉시 다시 일어나 주님을 향해 바른 길을 달려가는 겁니다.

바로 이게 십자가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바른 길은 한자로 하면 정도(正道)입니다. ‘바름(正)’을 잃어 혼돈의 세상입니다.

불교의 팔정도 교의가 생각납니다. 불교의 실천원리는 사성제와 팔정도입니다. 이 중 팔정도는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 수행의 올바른 여덟 가지 길로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 등 여덟 가지를 꼽고 있으며 이를 팔성도(八聖道)라 칭하기도 합니다.

비단 불교뿐 아니라 참되게 살아가려는 모든 이가 배워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교육의 요체도 바로 ‘바르게’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른 견해, 바른 말, 바른 일, 바른 명령, 바른 생각, 바른 정주, 바른 사유, 바른 정진, 이게 사람됨의 모두란 생각도 듭니다.

주님을 따라 항구히 바른 길을 달려갈 때 저절로 성취되는 팔정도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경지를 분도 성인의 그의 규칙 서문 말미에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져 말 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RB머리:49).

오늘 주님은 혼돈과 좁은 문의 시대를 살아가야할 우리에게 참으로 적절한 가르침을 주십니다.1.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십시오. 2.삶의 온갖 시련을 훈육으로 견디어 내십시오. 3.바른 길을 달려가십시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대로 이런 삶을 통해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요, 이런 이들을 통해 많은 이들을 ‘주님의 거룩한 산 예루살렘’ 교회로 나오게 됩니다.

다음 루카의 예언 역시 이런 이들을 통해 실현됩니다.‘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이미 예언이 실현되어 주님은 이렇게 살아 온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나라 잔칫상 미사를 통해 온갖 필요한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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