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9주일]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루카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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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는 아말렉족과 싸우고 모세는 언덕 꼭대기로 올라가는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자, 사람들이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어 아말렉을 무찌른다.(탈출 17,8-13)
그 무렵 8 아말렉족이 몰려와 르피딤에서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였다.
9 그러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너는 우리를 위하여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거라. 내일 내가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언덕 꼭대기에 서 있겠다.” 10 여호수아는 모세가 말한 대로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후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11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
12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 그의 발 아래 놓고 그를 그 위에 앉혔다. 그런 다음 아론과 후르가 한 사람은 이쪽에서, 다른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니, 그의 손이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다. 13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시편 121(120),1-2.3-4.5-6.7-8(◎ 2 참조)
◎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 눈을 들어 산을 보노라. 나의 구원 어디서 오리오? 나의 구원 주님에게서 오리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다. ◎
○ 그분은 너의 발걸음 비틀거리지 않게 하시리라. 너를 지키시는 그분은 졸지도 않으시리라. 보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 졸지도 않으시리라. 잠들지도 않으시리라. ◎
○ 주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주님은 너의 그늘, 너의 오른쪽에 계신다. 낮에는 해도, 밤에는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
○ 주님은 모든 악에서 너를 지키신다. 그분은 너의 목숨 지켜 주신다. 나거나 들거나 주님은 너를 지키신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라며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말씀을 선포하라고 한다.(2티모 3,14─4,2)
사랑하는 그대여, 14 그대는 그대가 배워서 확실히 믿는 것을 지키십시오. 그대는 누구에게서 배웠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15 또한 어려서부터 성경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 지혜를 그대에게 줄 수 있습니다.
16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17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갖 선행을 할 능력을 갖춘 유능한 사람이 되게 해 줍니다.
4,1 나는 하느님 앞에서, 또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그리고 그분의 나타나심과 다스리심을 걸고 그대에게 엄숙히 지시합니다. 2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며, 재판관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조르는 과부의 비유를 드신다. (루카 18,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2 “어떤 고을에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 3 또 그 고을에는 과부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줄곧 그 재판관에게 가서, ‘저와 저의 적대자 사이에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고 졸랐다.
4 재판관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마침내 속으로 말하였다. ‘나는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5 저 과부가 나를 이토록 귀찮게 하니 그에게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어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끝까지 찾아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6 주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하는 말을 새겨들어라. 7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
연중 제29주일 제1독서 (탈출17,8-13)
"여호수아는 모세가 말한 대로 아말렉과 싸우고,모세와 아론과 후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그들은 돌을 가져다 그의 발 아래 놓고 그를 그 위에 앉혔다. 그런 다음 아론과 후르가 한 사람은 이쪽에서,다른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니,그의 손이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다."(10-12)
'여호수아는 모세가 말한 대로'
원문은 '와야아스 예호슈아 카아세르 아마르 로 모세'(wayaas yehoshua kaasher amar lo mosheh)이다. 직역하면 '그리고 여호수아는 모세가 그에게 말한 대로 행하였다' 이다.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여기서 '와야아스'(wayaas)는 '행하다','하다'(탈출5,9),'만들다'(창세8,6)라는 뜻을 가진 동사 '아사'(asah)의 미완료형에 접속사 '와우'(wau; and; 그리고)가 결합하여 '그리고 그가 행하였다'는 완료의 뜻으로 해석되는 와우(그리고; 접속사and)계속법이 쓰이고 있다.
이처럼 원문은 와우(and; 그리고)계속법을 사용하여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을 듣고서 곧바로 그의 말대로 행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카아셰르'(kaasher; as)는 관계사 '아셰르'(asher)에 '~와 같이', '~처럼','~대로'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케'(ke)가 결합된 것으로서, '~한 것 같이', '~대로'라는 의미를 지니는 합성어로서, 여호수아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대로 준행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런데 아말렉과의 이 전투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처음 치르게 된 전쟁이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있었기에 사실상 전투를 치를 만한 능력이나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
따라서 인간적인 계산으로 하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산의 가능성이 희박한 싸움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을 따라 즉각 그대로 행한 것은 여호수아의 주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용기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모세와 아론과 후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모세는 언덕에 자기 혼자만 올라가지 않고, 아론과 후르라는 두 명의 협력자와 함께 올라갔다. 전쟁이라는 중차대한 국가적 안위의 문제를 놓고서 동역과 합심의 지혜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최후의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함께 겟세마니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마태26,37-40; 마태18,19참조).
한편, '존귀함' 혹은 '고귀함'이라는 뜻을 지닌 '후르'(hur)는 유다 지파 칼렙의 아들이며 (1역대2,19) 또한 유명한 성막 제조 기술자 브찰엘의 조부이다(탈출31,2).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
여기서 '모세가 손을 들면'에 해당하는 원문은 '웨하야 카아셰르 야림 모세 야도'(wehaya kaasher yarim mosheh yado)이다. 직역하면 '그리고 모세가 그의 손을 들 때 그것이 발생했다'(And it came to pass when Moses held up his hand)이다.
여기서 '카아셰르'(kaasher)는 탈출기 17장 10절의 '~대로'라는 뜻의 '카아셰르'와 같은 복합어이지만, 여기서는 '웨하야'(wehaya)와 함께 특별한 용법으로 쓰이고 있다.
새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웨하야'는 '있다'(창세1,2; 1사무14,25), '존재하다', '있다'(욥기1,1)등과 같이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하야'(haya)의 완료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한 형태인데, 이것은 본문처럼 전치사 '케'(ke)나 '뻬'(be)가 따라올 때는 '~할 때에 어떠한 일이 발생했다' (미완료시제로 해석될 때에는 '발생할 것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관용구를 이룬다.
이때 관용구는 뒤에 발생할 내용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무엇인가 중요한 일이 발생했음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모세가 그의 손을 들었을 때 어떤 특별하고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야림'(yarim; held up)은 기본적으로 '(드)높다'(2사무22,47; 시편46,11)라는 뜻을 가진 '룸'(rum)의 사역 능동형으로 '높게 하다' 즉 '들다'(창세14,22)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본문은 '모세가 그의 손을 높이 들었다'는 뜻이며, 여기서 모세가 손을 든 것은 기도의 행위로 해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는 기도의 표현으로 손을 들어 간구하는 것이 종종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역대6,13.14.29; 시편28,2; 1티모2,8).
그러므로 모세가 손을 들 때 이스라엘이 이겼다는 것은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그 순간에는 이스라엘이 싸움에서 우세했다는 말로서, 그 싸움의 승패가 전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손을 내리면'에 해당하는 '웨카아셰르 야니아흐 야도' (wekaasher yaniah yado)에서, '내리다'는 뜻으로 번역된 '야니아흐'(yaniah)는 기본적으로 '쉬다'(탈출20,11)라는 뜻을 지닌 '누아흐'(nuah)의 사역 능동형으로 '쉬게 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어근은 '어떤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판관2,23), 이것은 본문의 '손을 내리다'라는 말이 '손을 들어 하느님께 기도하던 것을 멈추고 쉬었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아말렉족과의 전쟁은 하느님에 의해 승패가 좌우되는 싸움이었다. 따라서 모세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을 쉬게 되면, 자연히 이스라엘은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에페소서 6장 18절에서 사도 바오로도 말하고 있듯이, 기도야말로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무기이며, 하느님의 은혜와 능력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원문은 '위데 모셰 케베딤'(wide mosheh kebedim)인데, 직역하면 '그러나 모세의 손들이 무거워졌다'(But Moses' hands were heavy)이다. '무거워지다'로 번역된 '케베딤'(kabadim)은 '무겁다'(1열왕12,4; 2역대10,11)라는 뜻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카바드'(kabad)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여기서는 모세의 손이 천근 만근 무겁게 느껴졌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피곤해졌음을 의미하기보다는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손의 힘을 거의 상실했음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처럼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일지라도 인간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육체적 연약성은 어쩔 수가 없는 인간의 한계이다(마태26,41).
여기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영적 지도자를 중심으로 왜 서로 협력해야 하는지의 이유를 보게 된다.
'그들은 돌을 가져다 ~ 그를 그위에 앉혔다~~두 손을 받혀 주니'
여기에서 아론과 후르가 어떻게 모세를 도왔는지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지도자를 보좌하는 아론과 후르의 세심한 배려가 엿보인다.
아말렉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핵심은 기도하는 손이었다. 그 손이 피곤하여 내려옴으로써 전세(戰勢)가 이스라엘이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그 손이 내려오지 않도록 붙잡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론과 후르가 우선적으로 취한 행동은 그의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돌을 가져다 그위에 모세를 앉히는 것이었다.
아론과 후르는 눈앞에 벌어지는 아말렉과의 싸움에만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그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하느님의 도구이자 사자(使者)인 모세에게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며, 그의 육신적 한계와 연약함을 최대한 보필하고 있는 것이다(히브13,17참조).
'해가 질 때까지'
원문은 '아드 뽀 핫샤메쉬'(ad bo hasshamesh)인데, 직역하면 '그 해가 들어가기까지'이다. 여기서 '아드'(ad)는 '~까지'(until)라는 뜻의 전치사이며, '뽀'(bo)는 '들어가다'(창세7,7; 레위16,23)라는 뜻을 지닌 '뽀'(bo)의 부정사 연계형이다.
따라서 '해가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았다는 말로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기까지 하루 종일 하느님을 향해 기도를 쉬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연중 제29주일 복음 (루카18,1-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8)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가리킨다. 그런데 바로 그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말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믿음'은 지속적으로 항구하게 하느님께 간구하는 실천적인 믿음을 말한다. 앞의 불의한 재판관 비유에 등장하는 과부에게서 나타났던 것처럼, 이러한 곤경에 처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간구하는 믿음을 말한다.
그리고 '찾아볼 수 있겠느냐'에 해당하는 '아라 휴레세이'(ara heuresei; will he find)에서, '아라'(ara)는 부정적 대답이 기대되는 추론적 질문을 의미하고, '휴레세이'(heuresei)의 원형 '휴리스코'(heurisko)의 본래 뜻은 '만나다', '마주치다', '우연히 발견하다'이다.
따라서 '아라 휴레세이'(ara heuresei)에는 세상에서 밤낮으로 부르짖는 믿음을 발견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뜻이 들어있다.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때에 사람들의 마음은 완고하고 사악해져서, 하느님께서 당신이 간택한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너무나 분명한 사실조차도 거부하며, 그들의 마음에 의로움보다는 악(惡)이 가득차서 간구조차 하지 않을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하느님의 신실한 약속과 말씀을 의지하면서 믿음을 수호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루카 복음 17장에 나오는 노아와 롯의 시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송영진 모세 신부
“예수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으로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루카 18,1).”
기도는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필요할 때에만, 또는 아쉬울 때에만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생명선 같은 것입니다.
이 생명선은 필요할 때에만 연결해도 되는 선이 아닙니다.
언제나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낙심하지 말고’ 라는 말은,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금방 실망하지도 말고,
기도를 중단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에는 ‘우리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을 얻어내는 일이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나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일이 기도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소원을 빕니다.
그것은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조심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그 재판관의 모습이 하느님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유에
나오는 재판관은 하느님의 반대쪽에 있는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재판관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 재판관(루카 18,2)”
이 비유는, “인간
세상에서는 끈질기게 조르면 마지못해 들어주는 일이 많지만,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바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ㄴ).”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 미적거리시지 않고 지체 없이 그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은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입니다.
(만일에 미적거린다면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미적거리시지 않고 지체 없이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말과
우리가 밤낮으로 부르짖는다는 말은 모순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모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자마자 바로 들어 주신다면 밤낮으로 부르짖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 밤낮으로
부르짖어야 한다면 지체 없이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들이 보기에
하느님께서 미적거리시는 것처럼 보여도
미적거리시는 것이 아니다.
지체되는 것처럼 보여도 지체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지체 없이 들어 주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한다.
그 믿음 속에서 밤낮으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하느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때에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정한 때에 내가 정한 그것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또 가장 좋은 때가 언제인지는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그때가
언제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때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제대로 받으려면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잘 준비된 모습으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나타나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 소식을 알렸을 때,
즈카르야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아마도 분명히 즈카르야는 아들을 달라고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었을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기도를 중단했을 것입니다.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라는 그의 말은,
그가 아들에 대한 희망을 모두 버렸음을,
그래서 아들을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은
예수님의 탄생과 직결된 일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시기에 맞춘 일이라고 알고 있지만,
즈카르야는 그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 자신과 엘리사벳이 남들처럼 젊고 건강할 때가
아들이 태어나기에 가장 좋은 때였을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부부가 모두 늙은이가 되었을 때가 가장 좋은 때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천사가 전하는 말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의 경우에는 아직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아기 잉태는 상상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을 하느님께 청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분명히 성모 마리아는 천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남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한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희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성모 마리아가 원하지도 청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천사의 설명을 들은 다음에는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응답은, 마리아가 평소에 끊임없이 메시아 강생을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어떻든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때 메시아 탄생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을까?
우리는 하느님의 시간표를 모르지만, 그래도 그때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은
가장 좋은 때에 이루어진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셔서 인류를 구원하려는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미적거리시지 않고 지체 없이 하신 일이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과 통하는 기도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그분은 특별한 기도의 비법이나, 하느님과 소통하는 신비한 기술도 언급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실망하지 말고 쉼 없이 기도하라는 말씀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인간의 본성을 가장 깊이 이해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이 지닌 위대함은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는 능력이지만, 이 희망을 잃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꿰뚫어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약한 인간성을 먼저 자신 안에서 받아들이시고, 희망하는 인간의 전형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자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극한의 인내와 희망의 기도를 온 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내 몸을 가꾸는 일부터, 내 생활 습관을 바꾸고, 내 의식을 바꾸는 데 평생을 걸려도 이루지 못하는 게 다반사입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라는 바오로 사도의 격려는 복음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인내와 끈기가 필수적인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점차 참고 견디는 것을 바보스러운 우둔함이라고 여기고, 오직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따라 남을 판단하고, 쉽게 분노하며, 우울증과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사회의 흐름을 거슬러 희망하는 사람들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매달려 올바른 판결을 받아 낸 한 과부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십시오.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느끼고 희망하는 감각을 지니고 있습니까?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