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사회 교리 주간)](마태 3,1-12)

인간 존중과 인권 신장은 복음의 요구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으로 지내 오고 있다. 현 시대의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깨우치려는 것이다.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한국 교회가 정한 인권 주일이고 사회 교리 주간입니다. 인류를 구원하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또한 사회를 보는 올바른 눈을 가지게 하는 사회 교리를 배우고 익혀 시대의 징표를 예민하게 읽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그날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고 이사야는 예언한다.(이사야 11,1-10)
그날 1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2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3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그는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지 않고, 자기 귀에 들리는 대로 심판하지 않으리라. 4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5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6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7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8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9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1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로마서 15,4-9)
형제 여러분, 4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5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6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8 나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조상들이 받은 약속을 확인하시고, 9 다른 민족들은 자비하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러기에 제가 민족들 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 이름에 찬미 노래 바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를 외치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베풀면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을 예고한다.(마태 3,1-12)
1 그 무렵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회개> 송영진 모세 신부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1-2)”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세례자 요한이 한 말을 보면,
메시아께서 하실 ‘구원’과 ‘심판’ 가운데에서
‘심판’ 쪽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심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로,
또 “회개하여라.”는 “심판받지 않으려면 회개하여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에 초점을 맞춰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라는 말은 구원에 대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회개’도 단순히 심판을 피하기 위한 소극적인 일로 그치면 안 되고,
구원을 받기 위한 적극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
소극적인 신앙생활과 회개는 사실상 형식적인 신앙생활과 회개가 되어버립니다.
“쭉정이가 아니기만 하면 된다.”,
즉 “지옥에만 안 가면 된다.” 라는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소극적인 태도이고, 그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고
세례자 요한이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을 꾸짖은 것은(마태 3,7-8),
그들이 심판을 피하기만 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즉 형식적으로만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회개하지는 않고, 회개했다는 형식만 취하려고 했다는 것.)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은 ‘삶 전체’를 변화시키라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사람들이 요한에게 물었습니다(루카 3,10).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구체적인 방법을 물은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3,11).”
이 말은 “불우이웃 돕기를 실천하여라.” 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 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태 23,25-26).”
겉으로만 회개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삶 전체’가 변화되어야 진정한 회개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고해성사만 보면 회개한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는 형식이 아니라 ‘삶’으로써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 모습입니다.
평소에 참으로 회개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판공성사 제도와 상관없이 자주 고해성사를 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삶 전체’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지은 죄가 많아서 자주 고해성사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더 깨끗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고해성사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죄가 없다고 착각하거나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판공성사 제도 때문에 억지로 고해성사를 볼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회개했다는 표시만 얻으려는 것입니다.
(판공성사 제도 덕분에 사람들이 고해성사를 보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는데,
사실 판공성사는 회개와 고백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도가 아닙니다.
원래는 사제 수가 너무 부족했던 옛날에,
고해성사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즉 참으로 회개하는 신자들을 위해서 마련된 제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믿는다는 말만 하는 것은
참된 믿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믿음은 ‘온 삶’으로써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물론 자기의 믿음을 말로 고백하고 증언하는 일도 중요합니다(마태 10,32).
그러나 그 고백과 증언이 참된 것이 되려면 ‘삶’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삶’은 그렇지 않은데 말로만 믿음을 고백하고 증언한다면
그것은 거짓 고백이고, 거짓 증언입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알곡’이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쭉정이가 아니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는 알곡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이 말씀은, “뜨겁지 않은 것은 모두 차가운 것으로 취급하겠다.” 라는 뜻인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으로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로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뜨거운 삶과 차가운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회개하라는 요한의 외침이 선뜻 들어오지 않습니다. 살아가며 크게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습니다. 험한 세상을 살아가느라 힘들기만 하지요.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보상은커녕 고통을 안겨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회개해야 합니까?
요한이 원하는 회개는 하느님께서 안 계신 것처럼 살던 사람이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인간적 시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겠다는 결심이 회개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여도 끝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외침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고통 속에서도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심이 필요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의 주관자는 하느님뿐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우리에게 까닭 모를 어려움마저 겪게 하신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려고 고통을 겪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처럼 이유 없는 고통까지도 주님 뜻으로 받아들이고, 끝내 이를 잘 극복한 분들은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고통과 행복의 의미를 하느님의 시각에서 새롭게 생각하지요. 오늘 세례자 요한의 외침대로 주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나와 하느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