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4주일] 임마누엘 (마태오 1,18-24)
오늘은 대림 제4주일, 대림초 네 자루에 모두 불을 밝힙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해 온 우리 마음도 촛불처럼 환하게 빛납니다. 길을 떠나, 유다 산악 지방의 한 고을을 찾아간 마리아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이라고 한 엘리사벳의 외침이, 우리에게도 기쁨이 되도록 성모님의 굳센 믿음을 본받읍시다.
이사야는 다윗 왕실에게 주님께서 몸소 표징을 보여 주시어,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사야 7,10-14)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어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말한다. ( 로마 1,1-7)
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의 복음을 위하여 선택을 받은 바오로가 이 편지를 씁니다. 2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미리 성경에 약속해 놓으신 것으로, 3 당신 아드님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에서 부르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7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로서 하느님께 사랑받는 로마의 모든 신자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요셉에게 천사는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전한다. (마태오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부르심과 응답>송영진 모세 신부
루카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단순히 ‘마리아’에게 보내신 것이 아니라,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
에게 보내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루카 1,27).
이것은 하느님께서 마리아만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요셉도 함께 선택하셨음을 나타냅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함께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마태 1,19).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 사람,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요셉이 루카복음에 나오는 시메온 같은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루카 2,25-26).”
요셉도 시메온처럼 의롭고 독실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냥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이 예수님의 아버지로 선택된 것은,
그의 희망과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선택하신 것은,
그에게 그럴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 강림’은 요셉이 생각했던 방식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메시아 탄생에 관한 예언들이 있지만,
메시아께서 그런 식으로 오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요셉이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게 된 일이 먼저이고,
천사가 나타나서 그 일을 설명해 준 일은 그 다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그런 순서로 일을 하셨을까?
(잉태 전에 마리아에게 먼저 설명해 준 것처럼
요셉에게도 미리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우리가 하느님의 생각을 알 수는 없지만,
이것은 마리아의 ‘동정 잉태’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게 된 요셉은,
무척 놀라고 당황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은(마태 1,19),
오랫동안 기도한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셉이 감추려고 한 것은 마리아의 잉태가 아니라 파혼입니다.
이것은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었습니다.
파혼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마리아를 요셉의 약혼녀로만 생각하게 될 것이고,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파혼을 실행하기 전에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요셉이 천사를 천사로 바로 알아보았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고,
천사가 하는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로 알아들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바로 순종했다는 것도 놀라운 일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아버지가 될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언제 어떻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든지 간에
즉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다는 말에 연결됩니다.
요셉은 평소에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았던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바로 응답하고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놀라고 당황하고 두려워하다가 부르심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억지로 응답했을 것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억지 응답은 응답이 아닙니다.)
‘준비’ 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
이 말씀은 종말과 재림에 관한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 강림은 요셉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생각할 수도 없었던 방식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도 요셉은 평소에 늘 준비하고 있었던 의인이었기 때문에
그 일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부르심에 응답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요셉의 응답과 순종은 한 번으로 그친 일이 아니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신앙인의 응답은 ‘날마다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날마다’ 흔들림 없이, 충실하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가야 응답이 완성됩니다.
대답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거짓 응답이 됩니다.
가다가 중간에 포기하면 처음부터 가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요셉은 그런 점에서도 모든 신앙인의 모범이 되는 분입니다.
그는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성가정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예수님을 따라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우리가 그렇게 ‘충실하게 응답하는 삶’을 살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항상 도와주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천사가 나타난 일을 ‘하느님께서 요셉을 도와주신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의로운 사람 요셉 이야기입니다.
먼저 천사가 요셉에게 약혼자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였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요셉의 처지에서는 얼마나 믿기 어려운 일이었습니까?
이와 비슷한 일이 나에게 일어난다면 쉽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를 받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기에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지요. 그 결과 이 땅에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신뢰한다는 것은 큰 힘을 발휘하게 합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때로 만나지 않습니까?
하느님이 원망스러울 때마저 있습니다. 그럴수록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말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속에 계신 것으로 보여도 끝내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잘 극복한 사람은 세상을 새롭게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시각에서 고통과 행복의 의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눈앞의 것만 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세상을 살며 힘들어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만 있다면, 그동안 볼 수 없던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희망을 새롭게 품게 될 것입니다. 요셉이 그러하였지요. 오늘은 주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에 관하여 묵상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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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뚫고 오시어 변형시키시는 신비 ♣
오늘 제 1독서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남왕국 유다는 강대국 아시리아와 그에 맞선 동맹군 사이의 전쟁 중에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721년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유다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하즈 왕은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이사 7,11)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구원의 손길을 청하라는 것이었으나 그는 청하지 않습니다(7,12).
아하즈 왕은 그렇게 하느님의 손길을 거부해버렸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경륜은 인간역사의 틀과 일정한 장소나 시간, 특정한 사건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역사를 품어 변형시키는 궁극적인 힘입니다. 인간의 불의와 고통이 드러나는 그 역사를 관통하여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구원경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순간마다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오늘 복음의 요셉의 역할과 태도를 되새기며 혼란스럽고 불안한 삶의 한복판에서 나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분명한 선택을 해야겠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하는 오늘 복음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요셉의 역할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의로움은 율법을 철저히 준수함으로써 드러나는 의로움과는 차원이 달랐지요. 그는 약혼녀 마리아가 같이 살기도 전에 잉태한 것을 알고는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마태 1,18-19).
그런데 요셉은 주님의 천사에게서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하느님의 구원경륜과 관계를 맺는 요셉의 방식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로움에 의탁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나 불의 앞에서 자기 기준과 가치관에 따라 항변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는 것이 요셉의 방법이었습니다. 구원경륜과 관계를 맺는데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개입하시도록 여백을 드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추구한다면서 얼마나 자주 나의 뜻을 내세우는지 모릅니다.
요셉이 지녔던 또 다른 의로움의 자세는 하느님의 음성을 따르는 받아들임입니다. 이 세상의 현실, 인간역사를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바꾸는 것은 의로움이신 하느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습니다. 요셉은 그렇게 당시 사회질서와 율법에 비추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을 묵인한 것이 아니라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뜻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의 의로움은 단순한 불의의 거절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동참을 통해서 실행되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강생의 신비는 그렇게 고상한 신비스러움이나 추상적인 관념 안에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처럼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여 자신을 사랑의 신비의 일부로 내놓을 때 가능한 것이지요.
오늘도 성 요셉처럼 하느님의 의로움에 의탁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받아들이며, 사랑으로 다른 이들과 이 사회의 구체적인 고통에 동참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 역사를 뚫고 오시어 생명과 참 기쁨으로 변형시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