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참된 행복 (마태오 5,1-12ㄴ)

2017. 1. 29. 오전 7: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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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참된 행복 (마태오 5,1-12ㄴ)

스바니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분노의 날에 이스라엘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할 것이라고 한다. (스바니야  2,3; 3,12-13)
3 주님을 찾아라, 그분의 법규를 실천하는 이 땅의 모든 겸손한 이들아! 의로움을 찾아라. 겸손함을 찾아라. 그러면 주님의 분노의 날에 너희가 화를 피할 수 있으리라.
3,12 나는 네 한가운데에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기리니, 그들은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리라. 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 그들 입에서는 사기 치는 혀를 보지 못하리라. 정녕 그들은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풀을 뜯고 몸을 누이리라.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라며,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시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다고 한다. (1코린토  1,26-31)
26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27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8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29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31 그래서 성경에도 “자랑하려는 자는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시어, “행복하여라!” 하고 여덟 가지 참된 행복을 선언하신다. (마태오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연중 제4주일 복음 (마태5,1-12)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11~12)

마태오 복음 5장 11~12절은 10절에 나오는 여덟번 째 행복의 보충 내용이기도 하지만,더 나아가서는 3절~10절까지의 전체 팔복(八福)의 보충 내용으로서의 성격이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로움 때문에'에 해당하는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 (heneken dikaiosynes; for righteousness)와 비교할 때, '~때문에', '~을 위하여'라는 뜻을 지니는 '헤네켄'(heneken; for)동일하고, 다만 '의로움'(디카이오쉬네스;dikaiosynes)이 '나'(에무; emou; me)로 바뀌어진 것만 차이가 있다.

사실 마태오 복음 5장 6절과 10절에 나오는 '의로움'에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righteousness)윤리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적인 의로움이다. 죄인을 심판하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公義)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은 6절보다 종교적인 측면이 더 강한 의로움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삶은 바로 '의로움', '의'(義)의 전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5장 3~10절까지 나오는 팔복(八福)의 서술에서는 모두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토이'(autoi; they)3인칭 남성 복수 주격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는 '너희'에 해당하는 '휘마스'(hymas; you)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온다. 이렇게 인칭이 바뀐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객관적인 진리를 이제는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태오 복음의 일차적 독자였던 초대 교회 시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주어질 하느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결코 좌절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는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신성모독자로 취급되어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또한 로마 지배 세력으로부터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반국가사범이란 죄목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며, 일반 믿지 않는 대중들로부터는 자신들의 믿음 생활 때문에 질시받고 부도덕한 자들로 매도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마태오 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삼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애통해할 수 밖에 없기에, 이제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두 번 거듭 명령형 사용해서 이러한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카이레테'(chairete; rejoice)의 원형 '카이로'(chairo)'기뻐하다', '안녕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에 겨운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갈리아스테'(agalliasthe; be gla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영화롭게 하다', '높이다'는 뜻이 있는 '아갈로'(agallo)'뛰다', '솟아나다'는 뜻이 있는 '할로마이'(hallomai)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을 뜻한다.

특히 이 두 단어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인 것 지금 극한 고난의 상황에 있어도 그 기쁨이 넘쳐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는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토스'(misthos; reward)'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박해를 이겨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당신의 기준에 다라 각자에게 적절한 상을 주신다(마태20,1~16; 루카17,7~10).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상이 크다'는 약속에서 '크다'에 해당하는 '폴리스'(polys; great)는 크기가 크다(large)는 뜻이 아니라 양이 아주 많은 (much) 것을 뜻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상의 어떤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갖가지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이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믿는 이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박해받았던 사실을 회상케 하며,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도 '나 때문에'(마태5,11) 즉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하느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듯이, 이제는 제자들이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연중 제4주일(가해) - 행복의 길

<가난>


산상 설교에 있는 ‘참 행복 선언’은,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하는 ‘방법론’도 아니고,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고 정의를 내리는 말씀도 아닙니다.
‘참 행복 선언’은 충실한 신앙인들을 축복하고 위로해 주시는 말씀이고,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이고,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라고 격려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기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번역은, 사실은 잘못된 번역입니다.
이 말은 “영으로(또는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말은,
몸은 가난해도 마음은 풍요로운 사람들을 뜻합니다.
(‘마음이 가난한’이라고 번역하면, 몸도 가난하고 마음도 가난한,
즉 ‘몸도 마음도 가난에 찌든’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여기서 “행복하여라.” 라는 말씀은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복을 받아라.” 라는 뜻이 됩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몸은 비록 가난 때문에 힘들고 고달프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늘나라를 추구하는 충실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 그 행복에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으니 지금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을 미리 앞당겨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만 있다면, 그래서 기뻐할 수 있다면,
지금의 불행에서 오는 절망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가난이 행복의 원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교회 때에 사도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도 열심히 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3).”
일곱 봉사자를 뽑을 때 사도들이 했던 이 말은,
겉으로만 보면 ‘말씀 봉사’를 강조하는 말로 보이지만, 그게 아니라,
‘말씀 봉사’와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똑같이 잘하기 위해서
전담 봉사자를 뽑자는 제안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회개하고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을 때,
사도단은 바오로를 사도로 받아들이면서 이방인 선교를 바오로에게 맡겼는데,
그때 사도들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함께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야고보와 케파와(베드로와) 요한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을 인정하고,
친교의 표시로 나와 바르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가고
그들은 할례 받은 이들에게 가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기로 하였고,
나는 바로 그 일을 열심히 해 왔습니다(갈라 2,9-10).”


1) 우리는 “나보다 가난하고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적극적으로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자비와 신의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십일조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바로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야만 했다(마태 23,23).”
사랑과 자비의 실천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사실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과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 마음은 지옥처럼 황폐해질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옥에 가두는 것과 같습니다.
또 만일에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지옥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천국의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얻게 될 기쁨을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통해서 지금 이 땅에서 미리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과 자비는
이 세상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2) 우리는 자신의 가난한 처지에 대해서 체념하지 말고,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영혼 구원은 생각하지 않고 물질적인 부유함만 추구하는 것은 악이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성실하게 노동하는 것은 선입니다.
(노동을 할 기회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 것을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면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죄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무질서하게 살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으며,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수고와 고생을 하며
밤낮으로 일하였습니다. ......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 하니, 여러분 가운데에 무질서하게 살아가면서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7-12).”


송영진 모세 신부


복음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부르짖으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빠다킹신부 묵상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행복은 세속적인 기준에 따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가난한 사람, 슬픈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하고 질문하게 됩니다. 이른바 착한 사람들, 의롭고 자비로운 사람들이 더 많은 피해를 보고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행복을 채워 주시면, 그 많은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 속에서도 참된 행복이 마음속에 솟아오른다는 것입니다. 참된 행복을 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십니다. 산상 설교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 행복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산상 설교의 참된 행복은 현실의 역동성 안에 드러나는 것이지, 미래에 막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행복의 조건을 ‘지금 여기서’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행복을 말합니다. 지상에서 가난한 마음, 겸손의 영을 지니는 사람이 하늘 나라의 기쁨을 누리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의 밑바닥에서 들리는 ‘하느님의 위로’를 삶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유함과 의로움과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안에서 주어지는 예수님의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의 삶 속에 불멸의 평화가 가득 찹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다가 어려움이나 박해를 당할 때, 우리는 불사불멸의 즐거움, 영원한 상급의 전조를 체험합니다. 예수님의 ‘진복팔단’이 내 안에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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