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소금과 빛 (마태오 5,13-16)

2017. 2. 5. 오전 6: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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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 소금과 빛 (마태오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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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고 한다. (이사야 58,7-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10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바오로 사도는, 나의 말과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1코린토 2,1-5)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2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3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4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5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며,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라고 하신다. (마태오 5,13-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연중 제5주일 제1독서(이사58,7-10)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 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7~9)

율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회에서 단식은 1년에 1회였다. 유다력으로 7월 1일 속죄일(the Day of Atonement)로서 모든 백성이 화제(火祭)를 드리고, 아무 노동도 하지 않고 단식함으로써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 날이었다 (레위23,26-32).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율법의 규정 외에도 그들 스스로가 필요에 따라 자주 단식일을 정하여 단식하곤 하였다(판관20,26 ; 1사무7,6 ; 31,13 ; 즈가8,18-19 ; 에스4,16). 더욱이 예루살렘 성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한 이래로 그들은 무려 칠십년 동안이나 오월과 칠월에 날짜를 정해놓고 특별 단식을 했다(즈카7,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형식적인 단식은 기뻐하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 진실로 기뻐하시는 단식은 유다 백성이 전멸 위기에 처했을 때 에스테르를 위시하여 전 유다 백성이 행했던 단식(에스4,16), 이방 니느웨 백성들이 하느님의 심판의 선고를 듣고 했던 단식(요나3,5-10), 그리고 역시 하느님의 심판의 선고를 들은 아합이 스스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했던 단식(1열왕21,27-29)등과 같은 회개가 동반된 진실한 단식이었다. 

반면에 이사야 58장 3절에 제시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단식은 마치 이방인들의 자녀를 불살라드려 우상을 마음대로 움직이고 조종하려 했듯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고통스럽게 하여 하느님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한 의식적 행위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심령으로 통회하며 회개에 부합된 자세를 취하는 자를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이사57,15)을 깨닫지 못하였다. 

죄에 대한 쓰라린 뉘우침과 진실한 삶의 변화를 지향하고 수반함이 없이 하느님의 축복을 끌어내기 위한 단식이었기에, 하느님께서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책망하셨다.

이사야 58장 6~7절에 나타나 있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시는 단식에 대한 세부사항을 살펴보면, 밥을 굶거나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이것은 혹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속죄일에 하는 단식의 영원한 규정 (레위16,31; 23,26-32)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단식의 외적 규정을 바탕에 깔고 시작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밥을 굶어 자신의 육체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본문에 제시된 것처럼 자신보다 연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그들을 사랑으로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신다. 

단식을 하는 목적은 하느님의 자비심을 얻고 그의 자비를 구하기 위함인데, 자신은 정작 자신의 자비를 기대하는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억압하고 학대한다면, 이 얼마나 모순된 모습이며,그런 삶을 사는 자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사야 58장 6~7절에는 바른 단식을 하는 자가 지켜야 할 규범이 각각 네가지씩 나열되어 있다. 이사야서 58장 6절의 네가지 한 마디로 '자유'이며, 이사야서 58장 7절 네 가지'실천적 자비'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모두 이스라엘 자손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경험한 축복이라 할 수 있다 (탈출20,2; 신명8,2`4; 예레29,10; 이사53,1~12; 55,1~7). 

'불의한 결박'이란 주인 혹은 권세자가 종이나 백성들에게 부당하게 채운 족쇄나 결박 지칭한다. '멍에'(mota; 모타)소나 나귀의 목에 지운 멍에 혹은 소의 코뚜레 같은 것으로서 사람이 힘있는 짐승을 몰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게 하는 도구이다.

이사야는 이러한 비유적 표현을 통해 힘을 지닌 자가 힘 없는 자들, 곧 사회적 약자들의 자유를 속박하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 이하의 삶을 살게하는 비정한 행동을 취하는 것을 보다 생생하게 전한다. 그리고 비인간적인 일을 저지르는 자들과 비인간적인 학대를 당하는자들 사이에 서서 그것을 중단시키는 일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억압받는 이'에 해당하는 단어 '레추침'(retsutsim)의 원형 '라차츠'(ratsats)원래 강한 타격을 가하여 산산조각으로 박살내 버리는 것 의미한다. 권세자에게 압제와 학대를 당하고 삶의 모든 기반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불쌍한 사람들 말한다(판관10,8 ; 2역대16,10 ; 아모4,1). 

'자유롭게'에 해당하는 '호프쉼'(hopshim)이란 표현은 '펼치다','해방하다'등의 의미를 지닌 '하파쉬'(hapashi)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일반적으로 노예의 상태에서 해방된 상태 의미한다(탈출21,2).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구조적, 제도적 부조리로 얼룩져 있었고, 기득권자들이 사회적 약자들을 상대로 착취를 합리화하던 상황을 전제 하고 있다. 이들 사회적 약자들에게서 부조리한 멍에를 벗겨내며 육체적 자유뿐 아니라 경제적 자유를 부여하는 그것을 진정한 의미의 단식이라 지적하고 있다. 

이사야서 58절 7절에서는 단식의 참된 정신 가운데서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열거법을 사용해 강조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는 의식주라는 인간 생존을 위한 3대 필수 조건과 혈육(골육)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열거되고 있다. 

'굶주린 이' 영적인 의미 보다는 문자적 의미가 더 강하다. '굶주인 이' 해당하는 '라라에브'(laraeb)의 기본형 '라에브'(laeb)는  단지 한두끼 굶어 배고픈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  여러 끼니를 걸러 배가 고파 쓰릴 정도가 되었음을 나타낸다(야고2,16). 

'떠도는 이들' 단순히 집이 없어 떠도는 가난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국가와 집을 잃고 떠돌며 방황하는 가난한 사람들 또는 부당한 채권 독촉 따위로 집을 전당잡혀 빼앗기고 쫓겨나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포함한다. 

밤낮의 일교차가 심하고 간혹 사막의 모래 바람이 부는 집 밖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생명까지도 위태롭게 하는 일이므로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에게 숙소를 마련해 준다는 것은 그들의 생명을 건져준다는 의미까지 내포한다.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라는 말이 나온 배경을 알아야 한다. 고대사회에서는 돈이 없어서 옷을 사 입지 못하거나 또는 입고 있는 옷마저 빚을 갚지 못한 이유로 빼앗기는 일이 흔히 있었다(탈출22,26). 겉옷을 이불삼아 사는 사람이 그것을 빼앗기는 날에는 잠을 잘때 살을 에는 견딜 수 없는 추위를 근동 지방에서는 맞이해야 한다.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본문은 가족 및 친척이 어려움을 당했을 경우 그것을 모른체하고 도와주지 않는 것이 하느님 앞에 큰 죄악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이러한 일은 인간됨 자체를 포기한 것으로 당시에 흔히 자행되고 있었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마치 새벽의 태양빛이 온 땅에 자욱한 흑암을 순식간에 몰아내듯이 하느님의 축복이 사람들을 짓누르는 어둡고 고통스런 삶의 형편들을 뒤바꾸어주며 그야말로 광명한 삶, 복되고 은혜로운 충족한 삶이 되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여기서의 상처는 파괴된 인간관계나 무너진 성읍, 실제적인 질병을 의미할 수 있는데, 그것이 어떠한 형태의 것이든, 하느님께서는 신속히 그 모든 것을 권능으로 치유하시고 회복해 주신다.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진실하게 단식을 행하는 자의 영적 안전과 보호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마치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여 행진할 때에 하느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광야에서 그들을 호위해 주셨듯이 주님의 종의 대속적 고난을 통해서 얻어진 의로움으로 말미암아(이사53,11; 54,17) 어떠한 영적인 적들의 공격도 안전하게 막아낼 수 있는 영적 갑옷과 방패를 말한다. 

'주님의 영광'이란 하느님의 위대함과 장엄하심 포괄하는 표현이다. 참된 단식을 실천하는 자들을 약탈자의 공격으로부터 막으시고 안전하게 지켜 준다는 의미로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고 표현했다. 

'그러니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면' 해당하는 단어 '레샤우아으'의 원형 '슈아으'(shuah)는  구약성경에서 21회 사용된 단어로서 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그 어려움을 탈피하기위해 안타까운 심정으로 부르짖는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나 여기 있다'에 해당하는 '힌네니'(hineni)'보라! 나를' 이라는 의미인데,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백성이 고난 가운데서 부르짖을 때에 자신을 숨기지 아니하시고 기꺼이 자신을 내 보이시며 그에게 도움과 소망과 위로를 베푸신다는 뜻이다.




 연중 제5주일 복음(마태오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13) 

하느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을 밝히며 세상과 타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근본 역할에 대한 가르침이다. 

'너희는 소금이다'에 해당하는 '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hymeis este to hallas tes ges;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에서 '에스테'(este)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eimi)동사의 현재 직설법 2인칭 복수형이다. 

여기서 현재형이 사용된 것은 이 교훈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변경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되라'는 명령법이 쓰이지 않고, '~이다'라는 직설법이 사용된 것은 이 말씀을 들은 이후부터 세상의 소금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소금의 역할을 살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고, 이미 하느님의 통치권 안에 속한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된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세상의 소금이며, 소금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당위성과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소금에 해당하는 '할라스'(hallas; salt)는 성경이나 유대 문헌과 관련하여 다양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 

첫째,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물, 불, 곡식, 의복 등과 같이 삶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요구되는 필수품이다. 따라서 소금으로서의 삶을 사는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가 없는 세상은 영적 생명이 끊어진 세상이다.

둘째, 방부제의 역할을 한다. 생선과 고기를 보존하는 데 사용되는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없는 세상은 부패할 수 밖에 없고, 반대로 세상이 부패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째, 맛을 내는 역할을 한다. 세상의 빛이라는 빛의 시각적 효과와 더불어 맛의 미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다만 녹아서 맛을 내는 소금처럼,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삶도 겸손하게 자신을 숨기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향기와 맛을 드러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치료제의 역할을 한다. 유대 문헌에 보면 치통도 소금으로 고치고, 신생아도 소금으로 문질러 그 몸을 깨끗하게 했듯이 이 세상의 환부를 치료하는 역할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해야만 한다.

다섯째, 정결한 희생을 상징한다. 구약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은 방부제의 역할과 더불어 제물을 정결하게 하는 소금을 뿌렸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도 하느님께 바쳐지는 제물 위에 뿌려져서 타서 없어지는 소금처럼 정결한 희생 제물이 되어야 한다.   

한편, '세상의'에 해당하는 '테스 게스'(tes ges; of the earth)에서 '게스'(ges)는 하늘과 대조되는 입장에서의 '땅',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 혹은 '사람','인류'라는 복합적 의미를 지니는 '게'(ge)의 소유격이다. 따라서 '세상의 소금'이라는 표현은 '땅의 소금'이라는 의미가 된다. 

팔레스티나에서는 소금을 바닷물을 증발시켜 얻는 것이 아니라 주로 사해 지역의 늪 지역에서 채취하거나 땅에서 암염을 캐내어 사용했으므로, '테스 게스'는 땅에서 채취하는 팔레스티나 특유의 소금 생산 방법을 반영하는 표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서의 소금이라는 의미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선민 의식과 자기식의 의(義)와 거룩함을 주장하며, 이방인들을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불결한 자로 취급하며 멀리했던 유다인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진실한 제자들은 그들과 교류하며 자신을 희생하여 그들을 변화시키는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의 문장에서 서두에 나오는 '만약'(그러나)에 해당하는 '에안'(ean)은 여기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을 서술할 때 쓰이는 '호탄'(hotan)처럼,'~할 때면 언제나'(whenever) 혹은 '~하는 즉시'(as soon as)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그 즉시' 혹은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예외없이 언제나'라는 뜻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오늘날처럼 정제된 순도가 높은 소금이 아니라 땅에서 채취한 불순물이 많은 암염을 사용했는데, 잘못 보관하면 염분은 빠져나가 버리고 찌꺼기만 남아 짠 맛을 도무지 낼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처럼 염분이 사라져 버린 소금은 전혀 가치가 없게 되듯이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서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삶이 되어 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을 전달하고 있다. 

여기 본문에서 '짓밟힐'에 해당하는 '카타파테이스타이'(katapateisthai; and to be trodden; and trampled)는 부정사 현재 수동형이다. 여기서 수동형이 사용된 것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밟히게 됨을 보여 주고, 부정사 현재형이 사용된 것은 '항상 밟힌다'는 뜻이다.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에 있어서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쓰레기로 취급되어 길에 버려지기도 했으며, 가옥의 옥상에 뿌려 흙을 딱딱하게 굳도록 만들어 평평한 휴식 공간이 만들어지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어쨌든, 짠맛을 잃어버린 소금은 단 한번의 예외도 없이 항상 사람으로부터 짓밟힐 정도로 무가치하고 비참해지게 된다는 말이다.


2

세상의 빛과 소금

미국의 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 박사가 95세 이상 된 사람 50명에게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에 대하여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이 조사에 응한 사람 대부분이 다음과 같은 답을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날마다 반성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런 되새김 없이 무심코 흘려보낸 시간들, 그 시간들이 얼마나 아까운가를 새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 사실 지나온 하루를 돌아보며 자신을 반성하고 더 나은 내일을 계획하는 삶은 하루하루를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용기 있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눈앞의 이익을 찾아 양심을 버리고 불의와 타협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세상을 살면서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외면하며 산 날들이 인생의 막바지에 와서 뼈아픈 상처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은 후에도 무언가 남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목표를 세우고 꿈을 꾸며 힘들게 달려 왔지만 그게 다 물거품처럼 없어지고 마는 허망한 것들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진정 가치 있는 것들을 꿈꾸며 살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날마다 반성하는 삶”, “용기있는 삶”, “무언가 남는”, 즉 “참된 가치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이들의 대답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소금은 값싸고 흔한 것이지만 음식에 없어서는 안 되는 절대 필수물이 바로 소금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물도 부패를 막고, 맛을 내는 소금이 없으면 모두 다 외면해 버립니다. 세상에서 바로 이 소금의 역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빛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빛입니다. 빛이 있어야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볼 수 있고, 빛이 있어야 따뜻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둔 세상을 환히 밝히고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을 따뜻이 녹이는 역할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절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커다란 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상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을 날마다 반성하고 새로움을 향해 나아간다면, 어려움 가운데서도 기쁨의 씨를 뿌리고 선을 행할 용기를 갖는다면, 그리고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참된 진리를 추구한다면, 이러한 사람들은 이미 어떠한 말이나 행동이 없더라도 이미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__

- 고 준석 신부 -


연중 제5주일(마태오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모두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씀은, 넓은 뜻으로 생각해서 “소금이 고유한 특성을 잃으면”, 또는 “소금이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이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1)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조미료입니다. 신앙인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이 세상을 살맛나는 곳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어떤 불행과 고통 때문에 좌절해서 살아갈 힘을 잃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고, 그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 세상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법칙만 판치는 삭막한 지옥이 되는 것을 막고, 모두가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사는 천국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2)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막는 방부제입니다.
신앙인은 악에 맞서 싸우면서 선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타락과 부정부패를 막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가는 넓은 길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길이라면, 그 길을 거부하고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또 혼자서만 죄 안 짓고, 혼자서만 착하게 살다가, 혼자서만 구원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3) 잘 녹는 것도 소금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만일에 소금이 녹지 않는다면 소금은 제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은 예수님 안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야 합니다.(주님이신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예수님 없이는 세상의 맛을 내고 부패를 막는 소금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신앙인은 “‘나’는 없고, ‘주님’만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소금 역할을 할 때,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모두 세상의 빛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전쟁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뜻합니다. “감추어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감추지 마라.” 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라는 명령이 됩니다.
신앙인은 그 피난처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피난처’를 ‘안식처’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등불이 되어라. 그래서 모든 사람을 비추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라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등불로서 사는 것은 곧 신앙인답게 사는 것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착한 행실’이라는 말은, 착하게 사는 것을 포함해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다운 삶’을 뜻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고 섬기게 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신앙인의 ‘신앙인다운 삶’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등불입니다.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세속적으로 출세해서 물질적인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는 인생을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신앙인들 가운데에도 그렇게 착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출세하고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지 못한다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의 말씀] 6월 8일 연중 제10주간 화요일-마태오 5,13-16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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