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주일]버림과 따름 (마태 4,12-23)

2017. 1. 23. 오전 5:2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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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주일]버림과 따름  (마태 4,12-23)

이사야 예언자는,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친다고 한다. (이사야 8,23ㄷ─9,3)
23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9,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2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3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 사이에 바오로 편이니 케파 편이니 하고 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합심하여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권고한다. (1코린토 1,10-13.17)
10 형제 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모두 합심하여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오히려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하나가 되십시오.
11 나의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 분쟁이 일어났다는 것을 클로에 집안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12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케파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을 떠나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신다. 또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고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들을 고쳐 주신다. (마태 4,12-23)
12 예수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13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탈리 지방 호숫가에 있는 카파르나움으로 가시어 자리를 잡으셨다.
14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5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 바다로 가는 길, 요르단 건너편, 이민족들의 갈릴래아, 16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17 그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18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20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21 거기에서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아버지 제베대오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다. 22 그들은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3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연중 제3주일 제1독서 (이사8,23ㄷ-9,3)

"옛날에는 즈불룬 땅과 납탈리 땅이 천대를 받았으나, 앞으로는 바다로 가는 길과 요르단 건너편과 이민족들의 지역이 영화롭게 되리이다." (8,23ㄷ)

이사야서 7장과 8장에서는 남부 유다가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으로부터 침략을 당한 위급한 상황에서 주어진 예언의 말씀이 다루어졌다. 말하자면 당면한 난관을 해결하는 길이 하느님을 의지하는 데 있음을 밝히며 동시에 아시리아를 의지하는 남부 유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북부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이 패퇴하여 남부 유다는 보존될 것이 예언되었다.

이제 이어지는 이사야서 8장 23절 이하부터 9장 7절까지는 이러한 암울한 전쟁과 압제가 종식되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춰질 것이리라는 희망찬 내용이 예언된다.

이러한 새로운 내용을 열고 있는 본절은 원문에는 8장 23절ㄷ로 되어 있는데, 불가타(Vulgata) 라틴어 역본에서는 8장 23절부터 9장이 시작되어 대부분의 번역본들이 이것을 따르고 있다.

왜냐하면 암울한 내용이 예언되었던 이사야서 8장 19~22절의 내용과 달리 8장 23절부터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 메시지는 어둡고 고통스러운 장면에서 전환해서 하느님께서 은총의 큰 빛을 다시 비추실 것을 선언한다.

이러한 희망의 메시지는 이사야서 9장 6절까지 계속되어 한 단락을 이루고 있는데, 그 희망의 근거는 장차 육화하시어 어둠 속을 걷던 백성,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오실 천주 성자 메시아의 오심과 깊은 관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사야서 8장 23절ㄷ과 9장 1절은 신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과 관련지어 마태오 복음사가가 마태오 복음 4장 14~16절에서 인용된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가리켜 이사야 예언자가 700여년 전에 선포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증거한 것이다.

천대를 당하고 암흑의 땅에 살던 즈불룬과 납탈리 땅, 이민족들의 지역인 갈릴래아(마태4,15)에 큰 빛이 비추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역에 가장 먼저 가져오신 복음과 치유와 구원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이사야서 8장 23절과 9장 1절의 예언은 바빌론 포로 생활 이후의 남부 유다의 귀환 공동체에서 성취되었다고 볼수 있으며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8장 23절ㄷ에서 원문에는 '주님'에 해당하는 고유 명사가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천대를 받았으나'에 해당하는 원문은 '천대를 받게 하셨으나'인데, 문맥상 여기에 해당하는 동사 '헤칼'(heqal)의 주어는 남성 3인칭 단수로서 주 하느님 이신 것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천대를 당하게 하실 수도 있고 영화롭게 하실 수도 있는 분은주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헤칼'(heqal)의 원형 '칼랄'(qallal)은 어원상 감소하거나 줄어드는 것과(창세8,8) 철저하게 낮춤으로써 능욕하는 것을 의미한다(창세16,4).

여기 본문에서는 사역 능동 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제3자를 통해 능욕과 굴욕을 안기셨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제3자란 이사야 예언자 당시와 그 후 시대의 고대 근동의 강자인 아시리아와 이방 열강들을 지칭한다.

실제로 즈불룬과 납탈리 땅은 갈릴래아 지방 주변에 있는 이스라엘의 땅으로서 B.C.8세기 말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2열왕15,29). 아시리아 임금 티글랏 필에세르가 B.C.732년 경에 아람을 점령하면서 갈릴래아 부근 이스라엘 영토를 침공했으며, 그 땅의 사람들을 아시리아로 끌고가서 노예로 삼았다.

이 중의 즈불룬 땅은 갈릴래아 남쪽과 카르멜 산 주변 지역을 아우르는 지명으로서 판관시대 이후로 정치적 중요성이 크지 않았으며 매우 소외된 지역이었다.

그리고 납탈리 땅은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에서부터 헤르몬 산의 남쪽 경사면을  차지하고 있는 곳으로서 북부 이스라엘의 최북단 경계를 이루고 있었으며,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국경에 위치하여 외침이 잦았다.

따라서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쳐들어오는 침략자들로 인하여 고통과 슬픔의 나날들을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는 ~영화롭게 되리이다'

'앞으로는'에 해당하는 '하아하론'(haaharon)은 천대를 받게 하셨던 사건 후,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지칭한다. 그런데 그 미래에 성취될 일을 묘사하는 동사로 완료형 '히크삐드'(hikbid)가 사용되었다. 이 완료형은 '주님께서 ~천대를 받게 하셨으나'로 번역된 '헤칼'(heqal)과 동일한 시제이다.

그러나 이 '히크삐드'(hiqbid)는 과거에 끝난 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언적 완료로서 미래에 있을 일이지만, 그 성취가 너무나 확실한 것임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다.

마치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일어날 미래의 일이 때때로 이처럼 예언적 완료로 쓰이는데, 마태오 복음 4장 12~1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기간 중의 갈릴래아 지방의 복음 전파에서 구체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히크삐드'의 원형 '카바드'(habad)'무겁다'는 뜻도 지니지만(탈출5,9), 그 육중함에서 느껴지는 영광, 영화를 의미하기도 한다(창세34,19; 탈출14,18).

한편 '바다로 가는 길'(해변 길)에 해당하는 '떼레크 하이얌'(derek haiyam)이스라엘과 유다의 서쪽 해안 부근의 대로를 가리키는데, 구약 시대에 주변의 나라들과의 무역로 혹은 전쟁의 진격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이민족들의 지역'에 해당하는 '껠릴 학고임'(gellil haggoim)은  '그 여러 민족들의 갈릴래아'라는 의미인데, 갈릴래아 지역이 아시리아의 침공으로 아시리아의 민족 혼합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실상 다양한 민족의 혈통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바뀐 것을 암시한다.

이렇게 '바다로 가는 길''이민족들의 지역'이 여러 민족들의 침공과 유린으로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아시리아에 의해 크나큰 침략과 약탈을 당해 고통과 수모와 치욕의 땅으로 전락될 것이지만, 후에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의 주된 무대가 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버림과 따름

예수님께서 광야의 유혹을 물리치신 후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분의 전도시작과 제자를 부르시는 부분입니다. 그분의 공생활의 시작인 갈릴래아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오던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 졌습니다.

예수님은 외치십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늘나라 선포는 예수님의 가장 큰 일이며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를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어부 네사람을 부르시는 장면은 감동적입니다.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을 당신 가까이 두실지 오래도록 찾고 지켜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능력이 뛰어나거나 지식수준이 높거나, 좋은 가문등의 조건들은 보지 않으시고 당신께 순명할 이들을 고르시는것 같습니다. 그분 사랑의 부르심은 어느누구도 거절하지 못할 만큼 다정하고 힘이 있습니다.
제자들 또한 그분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물은 그들의 생계 수단이고 어쩌면 존재의 의미를 담고 있을 만큼 버릴 수 없는 삶 자체일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그물도 아버지도 떠납니다.
매순간 버림과 따름의 선택이 주어지고 무엇을 버릴 지, 무엇을 따를지 선택하는 중에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때론 잘못 선택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앞으로 가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미지의 순간. 버림과 따름과 아무것도 모른채 앞으로 가야할 때 오직 의지하고 바라보고 답을 얻어야 하는 분은 하느님. 우리의 주님이심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작성자 베네bene


08.01.27 - 마태오 4,12-23

행복한 삶의 3대 요소 -비전, 회개, 공동체-


오랜만에 가슴이 뻥 뚤리는 상쾌한 뉴스를 봤습니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더불어 보이는 실망스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이 보여주는 희망찬 뉴스를 소개합니다.

-중국에서 출발한 화물열차가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 런던 외곽에 18(현지시간)에 도착했다. 1일 중국 저강성의 이우를 출발해 7개국가의 국경을 넘고 해저 터널을 통과하는 12451km의 긴 여정이었다. 이번 열차 개통은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의 실현을 알리는 첫 사건이다

육상으로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잇고, 해상으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중국의 경제네트워크화 프로젝트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육,해상 실크로드 주변의 60개국을 포함하는 거대한 경제권을 구성한다는 전략이다. 과거 중화제국의 위상을 되찾아 중국의 꿈을 이루겠다는 원대한 포부의 실현화 작업이다.-

사설의 일부 내용입니다. 세계 평화의 비전을 보는 듯 참 밝고 고무적인 뉴스입니다. 대낮같이 밝은 세상이라지만 대부분은 어둠의 세상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인공두뇌학자 피에르 뒤피는 말합니다.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척하지만 갈수록 의미가 사라져 가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참 중요한 통찰입니다. 무의미의 어둠이 온 세상을 덮고 있는 듯합니다

얼마전 '산천어 축제'에 수도공동체 소풍을 다녀오면서도 긍정적 체험과 더불어 부정적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철학이 없다’, '가치관이 없다.' ‘천박하다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빠진 비인간화하는 돈 중심의 자본주의사회가 날로 생각 없는, 영혼 없는 텅 빈 사람으로 만들어 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돈 벌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부단히 '?'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자원낭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여 언제나 현재성을 띕니다. 마치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의 어둠의 공허(空虛)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복음 말씀 같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보입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가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얼마나 통쾌한 말씀인지요? 오늘 방금 흥겹게 부른 화답송 후렴과 일치합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로다. 내 구원이시로다.”

우리의 빛이자 구원이신 주님께서 무의미의 어둠을 환히 밝혀주시고 행복한 삶의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오늘 강론은 행복한 삶의 3대 요소에 대한 묵상 나눔입니다.

첫째, 회개입니다

제때, 주님 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깨어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회개를 통해 마음 꼿꼿정조(情操)입니다. 회개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예수님의 첫 일성이 예수님의 선포를 요약합니다. 우선적인 것이 회개입니다. 주님은 회개의 선포에 이어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를 제자로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가 그물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고, 이어 다른 두 형제 야고보와 요한이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습니다부르심과 따름으로 요약되는 회개입니다. 막연한 회개가 아니라 주님의 끊임없이 부르심에 따름으로 회개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도 결국은 회개에로 모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예수님의 전 삶을 요약합니다. 모든 사람을 회개에로 초대하는 활동들입니다. 빛이신 주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삶을 통해 무의미한 삶은 비로소 의미 충만한 삶이 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빛이자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비전입니다.

비전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입니다주님이, 하늘나라가 우리의 궁극의 비전입니다. 비전을 지님으로 뜻 꼿꼿지조(志操)입니다. 비전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러니 비전의 선물보다 더 좋은 선물도 없습니다. 신뢰와 더불어 비전을 줄 수 있는 지도자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합니다. 비전이, 꿈이,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비전이 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비전은, 꿈은 하늘나라였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늘나라가 우리의 궁극의 참 비전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비전입니다. 하늘나라 비전의 빛입니다. 하늘나라 비전을 잃을 때 어둠입니다. 무의미의 어둠입니다. 아무리 의식주가 보장되어도 하늘나라 비전이 없으면 기쁨도 행복도 없습니다. 안팎으로 무너집니다. 회개의 동력도 잃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깨어 있게 하는 것, 회개에로 이끄는 것이 하늘나라의 비전입니다. 하늘나라, 하느님, 예수님 모두 우리의 궁극의 영원한 비전을 상징하는 말마디입니다. 저절로 발견되는 비전이 아니라 끊임없이 찾을 때 발견되는 빛나는 하늘나라 비전입니다

하여 수도생활을 하느님을 찾는 삶이라 정의합니다. 어찌 수도자뿐이겠습니까끊임없이 우리의 영원한 비전인 하느님을, 하늘나라를 찾을 때 무기력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하늘나라를 갈망하여 찾을 때 발견되는 하늘나라 비전이요 회개의 열매입니다

셋째, 공동체입니다.

부르심과 따름으로 요약되는 회개는 결국 공동체로의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에 회개하여 예수님을 따라 나선 이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요 우리 교회공동체입니다. 회개의 궁극 목표도, 비전의 실현도 공동체를 통해 이뤄집니다.

공동생활의 축복입니다공동체 생활을 통해 '몸 꼿꼿' 체조(體操)입니다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공동체를 떠나선 기쁨도 행복도 없습니다. 공동체를 통해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상처도 받지만 더 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도 공동체입니다. 특히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받는 주님의 은총과 위로를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면 살 수 없듯이 공동체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애당초 공동체적 인간이기에 공동체를 떠나선 사람이 되는 길도, 구원의 길도 없습니다. 지금 여기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가 바로 하늘나라 공동체 교회입니다매일미사의 은총이 공동체를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며 성장하고 성숙하게 합니다.

오늘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의 분열을 개탄하면서 교회의 일치를 호소합니다. 분열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악마가 가장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분열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강한 이들이 많아도 분열되면 전혀 힘을 쓸 수가 없습니다

반면 아무리 부족하고 약해도 사랑으로 일치되면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주님이 부족한 힘을 보태 주시기 때문입니다. 코린토 교회의 분쟁 소식을 들은 바오로의 열화와 같은 회개에의 촉구입니다.

여러분이 저마다 나는 바오로 편이다.’ ‘나는 아폴로 편이다.’ ‘나는 그리스도 편이다.’ 하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갈라지셨다는 말입니까? 바오로가 여러분을 위하야 십자가에 못 박히기라도 하였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바오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까?”

주님을 중심으로 다시 일치를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의 명령입니다. 말재주로 전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이래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습니다. 교회공동체의 믿는 이들은 진보파나 보수파나, 좌파나 우파나 모두 궁극에는 주님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양파(兩派)를 아우르며 넘어설 수 있는 주님파입니다. 이래야 공동체의 일치요 비전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어둡고 삭막하고 혼란한 세상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주님이십니다. 무의미로 텅 빈 어둔 세상을 환히 밝히는 주님의 온유의 빛입니다. 주님은 오늘 연중 제3주일에 행복한 삶의 3대 요소를 알려 주셨습니다.

1.끊임없는 회개입니다

 부르심과 따름의 응답으로 완성되는 회개입니다.

2.끊임없이 영원한 비전인 하느님을, 하늘나라를 찾는 것입니다

 이보다 중요한 비전은 없습니다.

3.끊임없이 일치의 공동체를 이루려는 노력입니다.

 공동체의 분열보다 더 큰 해악은 없습니다.

회개, 비전, 공동체는 행복한 삶의 3대 요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빛나는 비전인 당신과 함께 공동체를 선물하심으로, 우리 모두를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아멘.

                  베네딕도요셉수도원. 프란치스코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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