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일]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 (요한4,5-42)

2017. 3. 19. 오전 4: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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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일]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 (요한4,5-42)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하자,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로 바위를 쳐 물이 나오게 하신다. (탈출 17,3-7)
그 무렵 백성은 3 목이 말라, 모세에게 불평하며 말하였다.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왔소? 우리와 우리 자식들과 가축들을 목말라 죽게 하려고 그랬소?” 4 모세가 주님께 부르짖었다. “이 백성에게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저에게 돌을 던질 것 같습니다.”
5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원로들 가운데 몇 사람을 데리고 백성보다 앞서 나아가거라. 나일 강을 친 너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거라. 6 이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 있겠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보는 앞에서 그대로 하였다. 7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비하였다 해서,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 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며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긴다고 한다. (로마 5,1-2.5-8)
형제 여러분, 1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2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5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 2014년 3월 23일 사순 제3주일

예수님께서는 물을 길으러 나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4,5-42)
그때에 5 예수님께서는 야곱이 자기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서 가까운 시카르라는 사마리아의 한 고을에 이르셨다. 6 그곳에는 야곱의 우물이 있었다. 길을 걷느라 지치신 예수님께서는 그 우물가에 앉으셨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7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9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10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11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12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13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14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15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16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7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18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19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20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
21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22 너희는 알지도 못하는 분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께 예배를 드린다. 구원은 유다인들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23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 24 하느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5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2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27 바로 그때에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을 찾고 계십니까?”, 또는 “저 여자와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다. 28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29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 30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31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
32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에게는 너희가 모르는 먹을 양식이 있다.” 하시자, 33 제자들은 서로 “누가 스승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리기라도 하였다는 말인가?” 하고 말하였다.
3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35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36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37 과연 ‘씨 뿌리는 이가 다르고 수확하는 이가 다르다.’는 말이 옳다. 38 나는 너희가 애쓰지 않은 것을 수확하라고 너희를 보냈다. 사실 수고는 다른 이들이 하였는데, 너희가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39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40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41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 42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탈출17,3-7)

"이제 내가 저기 호렙의 바위 위에서 네 앞에 서 있겠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 ~~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시비하였다 해서, 그리고 그들이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하면서  주님을 시험하였다 해서, 그곳의 이름을 마싸와 므리바라 하였다. (6-7)

'이제 내가 ~ 네 앞에 서 있겠다'에 해당하는 '히느니 오메드 레파네카'(hinni omed lephaneka)에서 '이제 내가'로 번역된 '히느니'(hinni)일종의 감탄사로 '나를 보라'라는 뜻이지만, 대개는 '보라 내가'(Behold, I)로 번역된다. 이것은 상황의 급박성을 나타내어 '바로 지금 여기'에서 어떤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것을 강조하는 히브리어의 독특한 표현이다.

또한 '서 있겠다'에 해당하는 '오메드'(omed; will stand)'서다'(창세24,30), '머물다', '살다'(창세9.28)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마드'(amad)능동 분사형으로 '서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네 앞에'에 해당하는 '레파네카'(lephaneka)는 '얼굴'을 뜻하는  명사 '파님'(phanim)에 전치사 '레'(le)와  대명사 접미어가 결합한 형태'네 앞에', '너의 면전에', '너를 대하여'(before you)라는 뜻이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아마드'(amad)'~앞에'라는 뜻의  '리프네'(liphne)함께 사용될 때는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

요셉이 파라오 앞에(창세41,46), 다윗이 사울 앞에(1사무16,21), 아비삭과 밧세바가 다윗 앞에(1열왕1,2. 28), 느부자르아단이 네부카드네자르 앞에(예레52,12) 선 것을 묘사할 때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곧 신하로서의 복종과 존경과 섬길 각오의 자세를 가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앞에(예레9,5; 에제44,15) 선다는 것 역시 자신이 주님의 종임을 겸허히 인정하는 것이며, 더불어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헌신과 충성과 복종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금 전능하신 창조주 주 하느님께서 '모세 앞에 서 계실'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헌신과 복종을 표시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주 하느님께서 언제나 모세의 든든한 후원자로서, 늘 변치 않고 도와 주실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모세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모든 염려와 두려움을 일시에 벗어 버리게 하는 큰 확신을 갖게 했을 것이다.

'네가 그 바위를 치면 그곳에서 물이 터져 나와, 백성이 그것을 마시게 될 것이다.'

탈출기 17장 6절에는 '바위'라는 단어가 2번 나온다. 그런데 2번 다 정관사 '하'(ha)가 붙어 있다. '그 바위를'에 해당하는 '밧추르'(batsur)'바위'를 의미하는 '추르'(tsur) 앞에 정관사 '하'(ha)'~을'에 해당하는 전치사 '뻬'(be)가 결합된 것이다. 이처럼 정관사가 거듭 사용되는 것은 당시 그 바위(반석)가 모세가 잘 알고 있었던 바위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하느님께서 또다시 완고하고 사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바위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여 그들의 갈증을 해소시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구약은 신약의 예표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친 그 바위에서만 물을 얻었듯이, 오직 생수(生水)를 내는 바위(반석)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적 갈증이 해소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1코린10,4)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적 갈증에 허덕이는 인생들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주님께서는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55,1)고 하셨으며,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하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도 '오십시오'라고 말하여라. 목마른 사람은 오너라.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묵시22,17)로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처럼 온 천지 만물이 창조주요 모든 인생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적 갈증을 호소하는 모든 이들에게 생수를 값없이 풍성하게 베푸신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요한7,37)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가. 계시지 않는가'

'계시는가'에 해당하는 '하예쉬'(hayesh)'있다'(창세18,24; 24,23)라는 뜻을 지닌 '예쉬'(yesh)에 일반 의문문을 이끄는 의문사 '하'(ha)가 결합된 형태이고, '계시지 않는가'에 해당하는 '아인'(ain)'없다'(1사무9,4)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예쉬'와 '아인'은 이처럼 서로 상반되는 뜻을 지닌 단어로서 사물이나 사람의 존재 유무(有無)를 나타낸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 해당하는 '뻬키르뻬누'(beqirbenu; among us)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또는 도시나 공동체의 내부를 나타내어 '속'(창세18,12; 예레4,14),'~중'(가운데)(창세18,24; 24,3) 등으로 해석하는 '케레브'(qereb)'~안에'라는 전치사 '뻬'(be)대명사 접미어사 결합한 형태이다.

따라서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존재하고 계신지 아니 계신지'확인하려고 그들이 시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마름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했다는 말이다(탈출17,2참조).

이처럼 인간은 참으로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이다. 조금만 어려움이 닥치고 힘이 들면 이전에 자신을 은혜와 축복으로 인도하신 하느님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마싸와 므리바'

'마싸'에 해당하는 '맛싸'(massah; Massah)'시험하다'(창세22,1; 1열왕10,1)라는 뜻을 지닌 동사 '나싸'(nassah)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시험'이라는 뜻이고, '므리바'에 해당하는 '메리바'(meribah; Meribah)는 '싸우다'(탈출21,18; 신명33,7), '다투다'(창세26,20)라는 뜻을 지닌 동사 '리브'(rib)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다툼' 또는 '싸움'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지명들이 모두 그 곳에서 벌어진 사건에 근거하여 명명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지명의 이름을 지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더불어 다투고, 그리고 하느님을 시험했음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지명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대들던 이스라엘 선조들의 불신앙적인 모습을 대대 후손들에게 전함으로써 이것을 후대의 교훈으로 삼기 위한 것이다(시편95,8-9).




<갈증>

3월 19일의 복음 말씀은 요한복음 4장 5절-42절,'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하시다.'입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는 남편이 아닌' 그런 사람입니다(요한 4,18). 아마도 분명히 그 여인은  자신의 복잡한 인생에서 비롯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고(요한 4,15), 인생의 많은 의문에 대한 답을 알려 줄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요한 4,25).

(인생이 복잡해서 갈증에 시달리게 된 것인지, 아니면 어떤 갈증에서 벗어나려고 하다가 그렇게 인생이 복잡해진 것인지, 우리는 복음 말씀의 내용만으로는 확실한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은 은총을 받은 일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라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인생의 갈증을 느낀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그 갈증을 해소하려고 노력하는데, 어떤 사람은 권력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재물을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명예를 추구하고, 어떤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고...

그러나 그런 것들은 사람들에게 더 큰 갈증을 줄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바다 한 가운데에서 목이 마르다고 해서 바닷물을 마시면 더 큰 갈증에 시달리는 것과 같은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책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예 속세를 떠나서 도를 닦는 등의 수행을 하고...그러나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자기가 무엇을 찾는지 모른다면, 또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면,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식은 쌓을 수 있겠지만 갈증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도를 닦고 수행을 한다고 해도 목적지를 모른다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여기까지 말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모든 답은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을 하려나보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길은 내가 찾는 길이 아니다. 그 진리와 생명도 내가 찾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답은 예수님에게 있다."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상투적인 선전으로 들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로 물어야 할 것은 "지금 무엇을 희망하고 있는가? 그래서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가?"입니다. 우선 먼저 '희망'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가?"에 따라서('목적지가 어디인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이것은 자신의 갈증의 원인을 찾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정답은 '영원한 생명'인데(요한 4,14), '생명'도 중요하지만 '영원한'이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허무한 것을 추구하면 계속 허무해질 뿐이고, 갈증만 더 커집니다. 영원한 것을 추구하면 언젠가는 그 '영원'에 도달할 것이고, 갈증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이라고 해도, 만일에 출세를 하기 위해서, 또는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또는 무병장수를 누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런 사람은 여전히 갈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더 큰 갈증에 시달린다면, 그것은 그런 것들만 바라는 사람들 탓이지 예수님 탓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예수님을 떠나버립니다(요한 6,66). 주시지 않는 것을 달라고 요구했다가 안 주신다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물어야 할 것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도 아니고, "더 많이 도를 닦아야 한다."도 아닙니다. 정답은 "더 많이 사랑해야 한다."입니다. 이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라 '아가페'입니다.

세종대왕은 예수님도 몰랐고, 복음을 들은 적도 없고,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도 몰랐지만, 백성을 위해서 훈민정음을 창제하신 그분의 사랑은 거룩하고 위대한 아가페였습니다. 우리가 세종대왕 덕분에 성경을(하느님의 말씀을) 편안하게 한글로 읽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해도 그분은 그리스도교의 어떤 위대한 성인 학자보다 더 위대한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라는 말을 거꾸로 생각하면 "사랑은 하느님이다."가 됩니다. 그래서 사랑 없는 신앙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1코린 13장). 사랑이 있는 그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그곳이 천국이고 오아시스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그곳은 지옥이고, 갈증만 있는 사막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오늘 복음에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여인의 반응은 차가웠지요.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영적인 물에 대해 차근차근 말씀하시자 여인은 마음을 조금 엽니다.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대화가 조금 진전되자,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전환을 모색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이 말씀에 여인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눈을 조금 뜨게 된 여인은 자신이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벽에 부딪히고는 자신들은 어디에서 예배드려야 하는지 질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장소보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님을 공경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깨달은 여인은 물동이마저 버립니다. 자신 안에 샘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여인은 자기의 내면으로부터 용서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는 그 안에서 자신의 부족함, 죄악마저 스스로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평소에는 다른 이들의 결점, 조그만 티끌만을 보다가 마지막에야 자신의 커다란 들보를 발견하지요. 처음부터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헌신의 표본인 마리아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림

- 윤경재 요셉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4,13~15)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민족의 혼혈인으로서 자기 나름의 사마리아 오경을 가지고 하느님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과 솔로몬이 세웠고 또 헤로데가 세운 것이라며 그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쳤던 그리짐 산이야말로 참된 성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BC120년경에 서로 전쟁까지 치렀습니다. 그 후부터 둘 사이는 철천지원수가 되었고 예수님 시대 때는 유대인들에게 사마리아라는 명칭은 지독한 욕이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 노예보다 더 못한 최하 계급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루카복음서 953~54절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께 숙소를 제공하지 않고 거절하자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불살라 버리자고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 시대 여성의 지위는 아주 열악했습니다. 함부로 문밖출입 하는 것도 금지되었으며 혼자서 밭일을 나가거나 우물가에 나가는 것도 제한되었습니다. 모르는 남자와 대화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평생 남성의 소유물 취급을 받았습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속했습니다. 여자의 말은 믿을 만한 증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 중에도 유다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여럿 나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여자와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라고 알려주었을 때 이 여인의 첫 번째 반응이 지금 우리 생각과는 아주 다릅니다. 놀랍게도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입니다. 즉 그녀는 그동안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는 고백입니다. 이 말은 우물가에 여인들이 모여서 빨래를 하며 왁자지껄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는 우리네 정서와는 사뭇 다릅니다. 우물까지 거리가 멀어서 나오기 힘이 들었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남들이 경원시하는 눈초리가 싫었다는 말입니다.


한동안 저는 이 여인의 말을 스쳐지나가듯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바로 다음 구절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는 장면이 약간 단절되고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고, 예수께서 뜬금없이 남편 이야기를 꺼내시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오는 것조차 부담을 느꼈다는 것이 이해되자 모든 의문점이 풀렸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말씀과 행동은 하늘의 반을 지탱하는 여성의 지위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이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동등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 역사상 첫 번째 페미니스트 역할을 수행하셨습니다. 여성이 남성의 소유가 아니며 독립된 인격체로 대접받아 마땅하다는 걸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남편마저 없어 삼중으로 천하게 대접받던 사마리아 여인을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천하게 대접받던 여인도 예수님의 이끄심에 따라 주님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고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어느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샘이 솟는 자신의 몸이 성전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도 그리짐 산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한3,5)  

요한복음서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합니다. 정결해지고 새로 태어남을 뜻합니다. 이제 삼중으로 천하게 취급받았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생명수를 마시고 새로 태어났습니다. 더는 남성의 소유물이 아니며,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욕지거리에서 자유로워졌고, 여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자기임(authenticity)’을 찾은 것입니다. 자신 안에 물이 솟는 샘을 파고 참된 여성성을 통해 주님께 나아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탈무드에는 우리가 죽어서 하느님 어전에 나가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너는 살아서 진정한 너로 살았느냐?”

진정한 자기임(authenticity)’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립될 때,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발견될 것입니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남들과 비교당하지 않으며 독립적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성성과 남성성을 바탕으로 진정한 인간성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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