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 주일]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태26,14─27,66)

2017. 4. 9. 오전 5: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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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9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태26,14─27,66)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교회는 나뭇가지 축복과 행렬을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는 한편, ‘수난기’를 통하여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신자들이 축복한 나뭇가지, 곧 성지(聖枝)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것은 4세기 무렵부터 거행되어 10세기 이후에 널리 전파되었다.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지만 주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확신한다. (이사야 50,4-7)
4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5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6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비우시고 낮추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시자, 하느님께서 그분을 드높이 올리셨다고 찬가를 부른다. (필리피 2,6-11)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6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7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8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11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들이 갈라졌다. (마태26,14─27,66)
○ 해설자 C 예수님 ●? 다른 한 사람 ? 다른 몇몇 사람 ◎ 군중.

○ <14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물었다.
● 15 “내가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 수석 사제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 18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 1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20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21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22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묻기 시작하였다.
●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 23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 25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물었다.
●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 26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 27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 “모두 이 잔을 마셔라. 28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29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 30 제자들은 찬미가를 부르고 나서 올리브 산으로 갔다. 31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성경에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 33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 34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 35 베드로가 다시 예수님께 말하였다.
●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하였다. 3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니라는 곳으로 가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여기에 앉아 있어라.”
○ 그러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37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셨다. 그분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 38 그때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 39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 4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41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 예수님께서, 42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 43 예수님께서 다시 와 보시니 제자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감겨 자고 있었다. 4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시고 다시 가시어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45 그리고 제자들에게 돌아와 말씀하셨다.
? “아직도 자고 있느냐? 아직도 쉬고 있느냐?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6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 47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바로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다. 그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보낸 큰 무리도 칼과 몽둥이를 들고 왔다. 48 그분을 팔아넘길 자는, “내가 입 맞추는 이가 바로 그 사람이니 그를 붙잡으시오.” 하고 그들에게 미리 신호를 일러두었다. 49 그는 곧바로 예수님께 다가가 말하였다.
● “스승님, 안녕하십니까?”
○ 그리고 예수님께 입을 맞추었다. 50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
○ 그때에 무리가 다가와 예수님께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51 그러자 예수님과 함께 있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52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54 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 5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 무리에게도 이렇게 이르셨다.
? “너희는 강도라도 잡을 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나왔단 말이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지만 너희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56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 그때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57 무리가 예수님을 붙잡아 카야파 대사제에게 끌고 갔다. 그곳에는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모여 있었다. 58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 예수님을 뒤따라 대사제의 저택까지 가서, 결말을 보려고 안뜰로 들어가 시종들과 함께 앉았다. 59 수석 사제들과 온 최고 의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거짓 증언을 찾았다. 60 거짓 증인들이 많이 나섰지만 하나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이 나서서 말하였다.
● 61 “이자가 ‘나는 하느님의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 62 대사제가 일어나 예수님께 물었다.
● “당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소? 이자들이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어찌 된 일이오?”
○ 63 예수님께서는 입을 다물고 계셨다. 대사제가 말하였다.
● “내가 명령하오. ‘살아 계신 하느님 앞에서 맹세를 하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인지 밝히시오.’”
○ 64 예수님께서 대사제에게 말씀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 65 그때에 대사제가 자기 겉옷을 찢고 이렇게 말하였다.
● “이자가 하느님을 모독하였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인이 더 필요합니까? 방금 여러분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66 여러분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 무리가 대답하였다.
◎ “그자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 67 그때에 무리는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분을 주먹으로 쳤다. 더러는 손찌검을 하면서 말하였다.
● 68 “메시아야, 알아맞혀 보아라. 너를 친 사람이 누구냐?”
○ 69 베드로는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하녀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 70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였다.
●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 71 베드로가 대문께로 나가자 다른 하녀가 그를 보고 거기에 있는 이들에게 말하였다.
● “이이는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 72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다시 부인하였다.
●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 73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말하였다.
● “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
○ 74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말하였다.
●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 곧 닭이 울었다. 75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27,1 아침이 되자 모든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한 끝에, 2 그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 총독에게 넘겼다. 3 그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4 말하였다.
●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말하였다.
●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 일이다.”
○ 5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6 수석 사제들은 그 은돈을 거두면서 말하였다.
● “이것은 피 값이니 성전 금고에 넣어서는 안 되겠소.”
○ 7 수석 사제들은 의논한 끝에 그 돈으로 옹기장이 밭을 사서 이방인들의 묘지로 쓰기로 하였다. 8 그래서 그 밭은 오늘날까지 ‘피밭’이라고 불린다. 9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 값어치가 매겨진 이의 몸값, 이스라엘 자손들이 값어치를 매긴 사람의 몸값을 받아 10 주님께서 나에게 분부하신 대로 옹기장이 밭 값으로 내놓았다.”> 11 예수님께서 총독 앞에 서셨다. 총독이 물었다.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오?”
○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 12 그러나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당신을 고소하는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13 그때에 빌라도가 예수님께 물었다.
● “저들이 갖가지로 당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 들리지 않소?”
○ 14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소의 말에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총독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15 축제 때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 하나를 총독이 풀어 주는 관례가 있었다. 16 마침 그때에 예수 바라빠라는 이름난 죄수가 있었다. 17 사람들이 모여들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 “내가 누구를 풀어 주기를 원하오? 예수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 18 빌라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자기에게 넘겼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는데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였다.
● “당신은 그 의인의 일에 관여하지 마세요. 지난밤 꿈에 내가 그 사람 때문에 큰 괴로움을 당했어요.”
○ 20 그동안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군중을 구슬려 바라빠를 풀어 주도록 요청하고 예수님은 없애 버리자고 하였다. 21 총독이 물었다.
● “두 사람 가운데에서 누구를 풀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오?”
○ 군중이 대답하였다.
◎ “바라빠요.”
○ 22 빌라도가 그들에게 물었다.
● “그러면 메시아라고 하는 이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 군중이 모두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23 빌라도가 다시 물었다.
●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 24 빌라도는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폭동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받아 군중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하였다.
● “나는 이 사람의 피에 책임이 없소. 이것은 여러분의 일이오.”
○ 25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 26 빌라도는 바라빠를 풀어 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게 한 다음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주었다. 27 그때에 총독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총독 관저로 데리고 가서 그분 둘레에 온 부대를 집합시킨 다음, 28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29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며 조롱하였다.
●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 30 또 군사들은 예수님께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분의 머리를 때렸다. 31 그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나서 외투를 벗기고 그분의 겉옷을 입혔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나갔다. 32 그들은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보고 강제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하였다. 33 이윽고 골고타 곧 ‘해골 터’라는 곳에 이르렀다. 34 그들이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를 예수님께 마시라고 건넸지만, 그분께서는 맛을 보시고서는 마시려고 하지 않으셨다. 35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서 제비를 뽑아 그분의 겉옷을 나누어 가진 다음, 36 거기에 앉아 예수님을 지켰다. 37 그들은 또 그분의 머리 위에 죄명을 붙여 놓았다. 거기에는 ‘이자는 유다인들의 임금 예수다.’라고 쓰여 있었다. 38 그때에 강도 두 사람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못 박혔다. 39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어 대며 예수님을 모독하면서 40 말하였다.
●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
○ 41 수석 사제들도 이런 식으로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과 함께 조롱하며 말하였다.
● 42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시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 43 하느님을 신뢰한다고 하니, 하느님께서 저자가 마음에 드시면 지금 구해 내 보시라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으니 말이야.”
○ 44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마찬가지로 그분께 비아냥거렸다. 45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46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47 그곳에 서 있던 자들 가운데 몇이 이 말씀을 듣고 말하였다.
● “이자가 엘리야를 부르네.”
○ 48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와 신 포도주에 듬뿍 적신 다음, 갈대에 꽂아 예수님께 마시게 하였다. 49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말하였다.
●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
○ 50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 무릎을 꿇고 잠시 묵상>
○ 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53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다음, 그들은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도성에 들어가 많은 이들에게 나타났다. 54 백인대장과 또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 <55 거기에는 많은 여자들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르며 시중들던 이들이다. 56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57 저녁때가 되자 아리마태아 출신의 부유한 사람으로서 요셉이라는 이가 왔는데, 그도 예수님의 제자였다. 58 이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내 달라고 청하자, 빌라도가 내주라고 명령하였다. 59 요셉은 시신을 받아 깨끗한 아마포로 감싼 다음, 60 바위를 깎아 만든 자기의 새 무덤에 모시고 나서, 무덤 입구에 큰 돌을 굴려 막아 놓고 갔다. 61 거기 무덤 맞은쪽에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앉아 있었다. 62 이튿날 곧 준비일 다음 날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가서 63 말하였다.
●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64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입니다.”
○ 65 빌라도가 대답하였다.
● “당신들에게 경비병들이 있지 않소. 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 66 수석 사제와 바리사이들은 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제1독서(이사50,4~7)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 (7) 

이사야서 50장 6절은 주님의 종이 당할 극심한 고난과 더불어 그 고난 가운데서도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다 이겨낸다는 사실을 예언한다. 그가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로 견뎌낸 것은 그 고통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통이요, 그 고통을 통해서 죄인들을 위한 속죄를 이루고 그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주님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주님의 의(義)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의 고난에 대한 예언은 주님의 종의 노래 가운데 마지막 노래인 이사야서 52장 13절~53장 12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예언되며, 그 고난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낸다. 

그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 아픔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굴욕과 치욕감을 깊이 느끼게 하는 고난이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옷을 벗긴 상태에서 채찍으로 과격을 당하고 수염을 뽑히며 얼굴에 침뱉음을 당하는 것인격을 철저히 무시하는 너무나도 크나큰 굴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신명25,9; 2사무10,4; 느헤 13,25; 예례7,29; 마태26,67; 요한18,22). 

그러나 주님의 종은 그 고난을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을 성취하는 통로로 여기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이를 묵묵히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본문에서 '나를 매질하는 자들에게' 해당하는 '레막킴'(lemakim)의 원형 '나카'(nakah)채찍으로 때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는 그가 맞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느님께 맞는 것으로 오해한다고 예언된다. 그러나 그는 무죄하면서 무시무시한 채찍질을 감내해야 했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전혀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등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실로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의 모진 채찍질을 묵묵히 참음으로써 이 예언을 성취하셨다(마태26,27; 27,26; 요한19,1).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에 암몬 임금 하눈은 그의 죽은 아버지께 조의를 표하고자 온  다윗의 신하들을 욕보이며 턱수염을 절반씩 깎아 버린 일이 있었다(2사무10,4).  이것은 극심한 모욕감을 일으키는 행위였다. 그래서 그 신하들은 다윗의 지시에 따라 턱수염이 다 자랄 때까지 예리코에 머물러 있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고대 사회에서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것, 즉 장식용이 아니라 남성의 인격을 상징하였다. 따라서 그것을 깎는다든지 뽑아 버리는 것은 그 사람을 인격적으로 완전히 깔아 뭉개버린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형벌(느헤13,25)로 여겨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님의 종은 이런 치욕적인 일, 이처럼 무고한 모독과 형벌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즉 자기 턱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뺨을 그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오른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는 가르침 (마태5,39)을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모욕'으로 번역된 '켈림무트'(kelimmuth)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맞는 것을 통해 주님의 종이 느끼는 인격적 상처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마태26,67).

또한 '수모' 번역된 '로크'(loq)는 구약에서 본문과 욥기 30장 10절 두 곳에서만 사용된 매우 희소한 단어인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 침뱉음 뜻하고, 얼굴에 침뱉음을 당한다는 것은 턱수염이 뽑히는 것보다 더 드문 일이고 더 굴욕적인 일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은 그 굴욕을 피하기 위해 저항하거나 얼굴을 가리우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무기력해서가 아니라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임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을 안다.'(7) 

앞의 이사야서 50장 4~6절에서는 주님의 인도하심에 의지한 주님의 종의 고난과 고난을 받는 중에도 전적으로 참고 순종한다는 사실을 노래하였다. 이제 이사야서 50장 5~9절 까지는 주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종이 승리할 것에 대한 전적인 확신을 노래한다.

먼저 이사야서 50장 7절은 그토록 견디기 힘든 치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종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밝힌다. 그것은 자기를 종으로 세우신 주 하느님께서 자신을 돕는다는 확신과 그 하느님께서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 것 때문이다. 

주님의 종은 극심한 수치와 모욕과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이 잘못해서 그런 취급을 당한다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종은 자기가 당하는 그 고난이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감당해야 할 사명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본절은 원문상 접속사 '와우'(wau; because; for 혹은 but)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본절의 내용이 앞절과 긴밀하게 관련되는 사실을 말해 준다.

주님의 종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 고난을 자기 혼자 당하는 것도 아니며, 그 고난 때문에 자신이 절망에 빠지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 본절을 '와우' 접속사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진정한 배후에는 자신의 정당성을 지지해 주시는 주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도와 주시니' 해당하는 '야아자르'(yaazar)의 원형 '아자르'(azar)는 이사야서 50장 4절에서 주님의 종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는 것을 언급할 때 사용된 표현과 동일하다.

주님의 종은 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올바른 지식으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며, 하느님을 통해 고난의 때에 도움을 받는다.

여기서 '아자르'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되어 주님께서 종의 사명 전반을 지지하며 도와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한편 이에 이어지는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구절은 인과(因果)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al ken; therefore)이란 표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신 결과, 그가 수치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서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의 의미를 앎으로써 고난과 모욕을 당하는 자신의 처지를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본문 역시 앞 문장과 같이 인과 관계를 나타내는 '알 켄'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주님께서 종을 도우시는 결과, 주님의 종이 자기 얼굴을 차돌같이 굳게 한다는 것 나타낸다. 

'만든다'에 해당하는 '사므티'(samthi)'두다','되게 하다'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동사'숨'(sum)능동 완료형 1인칭 단수로서 본문의 행동의 주체가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그는 자기 스스로 자기 얼굴을 차돌처럼 굳게 하였다는 것이다. 

'차돌'로 번역된 '할라미쉬'(hallamysh; flint)'아주 단단한 물건', '단단한 돌','부싯돌','바위' 뜻이 있는데, 여기서는 매우 단단한 돌 말한다(신명8,15; 시편114,8). 따라서 본문은 낯이 매우 두꺼운 것을 의미한다. 

우리 말에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낯이 두껍다고 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종이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고, 치욕스런 고난 가운데서도 자신의 처지를 전혀 치욕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을 이런 직유법을 사용해서 표현한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본문은 이중적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첫째주님의 종이 그런 치욕스런 상황 가운데서도 결단코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둘째그가 비록 죄인들이 당하는 수난을 당하고 있지만, 마지막 날에는 결코 심판에 처해지지 않고, 자신이 의로운 존재였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을 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수치를 당하다' 의미로 번역된 '에보쉬'(ebosh; shall be ashamed)중의성 때문이다. 이 단어의 원형'뽀쉬'(bosh)수치를 느낀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창세2,25) 최후 심판에서 단죄되어 치욕스런 상태로 떨어진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다(창세45,16).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신성 모독죄를 저질렀다는 고소를 당해 수난을 겪고 죽임을 당했다(마태26,65). 그러나 그들이 단죄한 그 신성 모독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요한1,1~3; 필리2,6)을 깨달았다면, 그들은 그를 신성 모독죄로 고소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단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는 위치로 끌어 올려 주셨다(필리2,10). 이 사실이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종의 확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느님 사랑의 표지, 자유의지


언젠가 제게 세례를 받은 형제님께서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저 세례 받은 것 취소하렵니다. 무효로 해주세요.”

세례성사는 우리에게 주님의 인호가 새겨지는 성사이기에 취소할 수도 또 무효로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취소해달라니 어떻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사제로 살아온 시간이 그래도 적지 않은 시간인데, 처음으로 겪게 된 일이기에 더욱 더 놀랍고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는 이 형제님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기 위해서 그런 것인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간단히 말해서 ‘실망’했기 때문이더군요. 무엇보다 자기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께 실망을 했고, 교우라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또 실망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망이 쌓이다보니 받은 세례를 취소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세례를 취소해달라고 했던 경우는 처음이었지만, 이 형제님처럼 실망을 하는 사람들은 꽤 되는 것 같습니다. 내 뜻을 들어주지 않는 하느님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 같은 하느님께 실망을 얼마나 많이 느낍니까? 또한 성직자와 수도자의 모습에 실망했다는 말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성당 다니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라는 실망을 표현하시는 분들도 많이 접합니다. 이렇게 실망하시는 분들은 결국 냉담으로 이어지더군요. 실망이 쌓이고 쌓여서 도저히 성당에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망을 해결하는 방법이 과연 이렇게 피하고 도망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망을 준 사람을 미워하고 단죄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이렇게 입성하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려나무를 들고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면서 환호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뜨거운 환호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말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실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하는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줄 힘 있는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실망하지 않으셨을까요? 그렇게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지만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크게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실망의 결과로 예수님을 제거하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실망의 결과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더 큰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실망했기에 미워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닌, 실망했음에도 사랑으로 감싸 안아주신 주님의 모습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지요.

실망했기에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실망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때에 비로소 주님을 온전히 닮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환호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 나오는 ‘은돈 서른 닢’은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팔아넘긴 몸값이었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을 노예의 몸값으로 쳐서 유다 이스카리옷에게 돈을 주었던 것입니다. 수난받는 하느님의 종이신 예수님께서는 가장 비천한 처지가 되셔서 죄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의 눈물입니다. 죄를 짓고 뉘우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신앙인의 눈물입니다.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입니다. 바라빠 대신 예수님을 처형하라는 군중의 모습도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고 기쁨의 나뭇가지를 흔들며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야 할 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른 체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등을 돌리면서 십자가의 아픔과 고독을 나누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쾌락을 위해 주님의 계명을 어기고 그분을 배반하는 행렬에 나서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인간을 향한 한없는 사랑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우리에게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한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리는 성주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물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은총의 눈물로 변화하여 우리를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그렇게 아파하시는 것이 나의 죄 때문임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면 그 고생은 헛고생이 되는 것입니다. 팔마가지를 흔들었던 사람들이 아닌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쳤던 사람들 중에 한 명이, 그리스도의 살에 차가운 못을 박아 넣었던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이, 더 나아가 그분을 작은 재물이나 쾌락을 위해 팔아넘겼던 유다가 바로 나였음을 눈물로 고백하지 않으면 그분의 고통은 나에게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지금도 전에 지었던 죄를 그대로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정말로 내 죄가 그분 얼굴에 침을 뱉고 그 살을 뚫고 그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말입니다. 진정으로 내가 그분을 아프게 했다고 믿는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다시는 그분에게 아픔을 드리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가까스로 돋아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 받은 자, 하느님께 매 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이사 53,2-6)



[생활 속의 복음]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마태 26,14─27,66)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교황령 「하느님 얼굴 찾기」에서 “모든 그리스도인과 봉헌된 이는 세례를 통하여 참 하느님을 찾는 이 순례를 시작하라는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 순례는 성령의 활동으로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기, 곧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는 길이 됩니다”라고 밝혀주셨습니다. 모름지기 사순 시기는 주님을 따라 순례를 배우는 때입니다.

1. 거역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이사 50,5 참조)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책은 소위 ‘감금증후군’ 때문에 ‘유령인간’으로 9년을 살았던 한 남자의 드라마틱한 이야기입니다. 혼수 상태의 식물인간처럼 지냈던 저자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로부터 느꼈던 ‘절망, 고통, 외로움’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담백하게 풀어냅니다. 그중에서도 간병에 지친 어머니의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에 가장 큰 절망을 느꼈다고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른바 ‘주님의 종의 노래’[42,1-4(5-9); 49,1-7(8-13); 50,4-9(10-11); 52,13-53,12] 중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종은 극심한 ‘모욕, 수모, 고통, 굴욕’ 속에서도 주님께서 도와주고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 앞에 닥친 운명을 거역하지도 않고 빠져나갈 길을 도모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그의 얼굴을 늘 주님께 향한 채로 자신에게 닥치는 악에 의연히 맞섭니다.

2.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한다(필리 2,8 참조)

얼마 전에 저희 본당 신자들과 함께 영화 ‘벤허(Ben-Hur)’를 보았습니다. 이미 몇 차례 봤지만, 이번에는 “내 목숨은, 내 의지로, 내가 기꺼이 내 주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라고 잘 알려진 부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지만, 당신 스스로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자기비허(自己卑虛, Kenosis)’야말로 우리들이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깨고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영적 여정을 열어줍니다.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같은 생각, 같은 사랑, 완전한 기쁨”(필리 2,2 참조)을 살게 됩니다.

3.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마태 26,39-44 참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교서 「구원에 이르는 고통」에서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시는 그리스도는 ‘고통의 진실을 통한 사랑의 진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히시면서, “이 고통을 통해서 그분은 속량을 성취하시는 것입니다”라고 깨우쳐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극심한 고통과 절망 중에서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 26,39.42.44 참조)라고 세 번씩이나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서 돌아서는 것’이야말로 ‘죄악(罪惡)의 뿌리’라는 것을 성찰케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당신처럼 ‘하느님의 뜻’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4. 이제 일어나 가자(마태 26,45-46 참조)

교황 칙서 「자비의 얼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비의 지평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완성될 위대한 사랑의 신비를 의식하시며 수난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우리에게 새겨줍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지내면서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장담하면서도, 사실은“주님 얼굴을 찾는”(시편 24,6) 길에서 동떨어진 우리 모습을 살펴야 합니다. 부디 우리 신앙의 절정인 파스카 성삼일의 은총으로 충만하시길 빕니다. 아멘.  


정연정 티모테오 신부(서울대교구 화곡본동본당 주임)

가톨릭평화신문      2017. 04. 09발행 [14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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