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보고서야 믿느냐? (요한 20,19-31)

2017. 4. 23. 오전 7:00:57

글자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보고서야 믿느냐? (요한 20,19-31)

테르브루그헨, 성 토마스의 의심, Hendrick TERBRUGGHEN, 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c. 1604, Oil on canvas, 108,8 x 136,5 cm, Rijksmuseum, Amsterdam, 네덜란드 암스테르담.jpg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다. 그 자리에서 교황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이다.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한다. (사도행전 2,42-47)
형제들은 42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43 그리고 사도들을 통하여 많은 이적과 표징이 일어나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44 신자들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리고 재산과 재물을 팔아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곤 하였다.
46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47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그리스도의 부활로 생생한 희망을 주셨으니, 얼마 동안은 시련을 겪겠지만 즐거워하라고 한다. (1베드로 1,3-9)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4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 상속 재산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5 여러분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는 구원을 얻도록,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힘으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6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7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9 여러분의 믿음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시고, 여드레 뒤에는 믿지 못하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다. (요한 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로마의 갈리스토 카다꼼바의 초대 교회 성찬에 대한 벽화>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축일 제1독서(사도2,42~47)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2,42)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전념하였다'에 해당하는 '프로스카르테룬테스'(proskarteruntes)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proskartereo)는 '힘입게 집착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으며, 미완료 과거 동사 '에산'(esan)과 서로 관련되어 쓰여서 계속하여 힘썼음이 강조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계속해서 전념하고 있었다(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는 뜻이다. 

원문에서 '에산 데 프로스카르테룬테스'(esan de proskarteruntes)가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제일 앞에 쓰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기도하는 일' 네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도행전 2장 42절부터 47절 까지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르는 강력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바로 사도들의 가르침이 중심이 된 공동체였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에 해당하는 '테 디다케 톤 아포스톨론' (te didache ton apostollon; to the teaching of the apostles)에서 '사도들'은 복수형이고,'가르침'(디다케)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된 수천 명의 제자들에게 열두 사도 모두가 가르쳤음을 보여 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도들의 가르침은 한 가지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개인적인 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적, 그분의 생애와 구원 사업, 즉 복음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로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내용(마태28,20)과 예수님의 생애를 기본으로 한다 (사도3,15; 4,10; 1코린15,1~4).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1테살4,1.2)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위에 입각한 것으로 이것은 교회를 교회이게 하고 교회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원문은 '카이 테 코이노니아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kai te koinonia te kllasei tu artu)인데, 초대 교회의 두번째 특징적인 모습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이어서 '성도들의 친교'(to the communal life)이다. 

초대 교회에서 '성도들의 친교'는 정신적인 친교일 뿐 아니라 물질적인 친교이기도 하다. '친교'에 해당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 fellowship)는 신약 성경에서 '사귀다'(2코린6,14)로 번역되거나 '헌금'의 의미로 '동정하다','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다'(로마15,26)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를 구성한 공동체의 성도들은 같은 믿음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교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서로 도왔던 것이다. 

'빵을 떼어 나누고' 

그 다음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은 '성찬'이다. 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고'에 해당하는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fractio panis; to the breaking of bread)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모이면 아가페 형식의 기본적인 식사를 하고, 그 다음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찬의 의식을 하였다. 

먼저 아가페 형식의 식사를 한 것은 공동체의 형제들 가운데 가난해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라는 표현은 성찬의 전례의식, 곧 성체성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마태26,26; 마르코14,22; 루카22,19; 1코린11,23.24).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의 전례 즉 성체성사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기도하는 일에' 

원문은 '카이 타이스 프로슈카이스'(kai tais proseuchais; and to the prayers)인데,초대 교회의 네번째 특징은 '기도'였다. 초대 교회가 역동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도의 권면에 따라(마태7,7; 26,41; 루카18,1; 요한16,24)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에 기도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풍부하다는 데서 잘 보여준다(사도4,24; 12,5.12; 21,5).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복음 (요한20,19-31)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요한 복음 1장 34절에서 세례자 요한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라고 한 외침이나, 요한 복음 1장 49절에서 나타나엘'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한 고백과 함께 요한 복음 2장 28절'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담겨진 신앙 고백이다.

특히 요한 복음 2장 28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계된 문맥에서 고백된 내용이므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요한 복음사가는 요한 복음 1장 1절에서 본서의 첫 시작'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고 하였고, 본서의 종결부요한 복음 20장 28절에 와서는 '저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

이것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개개인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요한 복음의 강조점을 드러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8절에서는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가 예수님께 대하여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이 하느님의 진정한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는 '~이시며''~이십니다'로 번역되는 영어의 Be 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관사 '호'(ho)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 천주성)이 더욱 강조된다.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이런 뉘앙스를 살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My Lord and my God)라고 번역했다.

토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보게 되자 창자국와 못자국을 직접 만져 볼 필요도 없이(요한20,28) 그의 모든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기보다는 놀라움에 찬 탄식과도 같은 것이었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 토마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놓았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9)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 없는 자'('아피스토스'; apistos)'믿는 자'('피스토스'; pistos)가 서로 대조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헤오라카스 ~ 페피스튜카스'; 'heorakas ~pepisteukas)'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 '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이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에서의 선택 당시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서의 일차 독자들인 초대 교회 신도들이나,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도 계속해서 던져지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들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 다다르지 못한, 수준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토마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루카24,10.11).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자들이다.

코린토 1서 15장 5절과 6절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오백 명이 넘는 형제들은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고서야 믿은 자들이다.

얼핏 보기에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더 복있는 사람들인 것 같지만, 요한 복음 20장 29절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의 승천 이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더 복된 사람들이다.

'믿음 없는 자'(apistos)보다는 보고서라도 믿은 자들이 더 복있는 사람들이지만, 이들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지 못했고, 또한 지금도 직접 볼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근거하여 이 부활의 진리를 믿는, 예수님 승천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더 복된 사람들인 것이다(로마10,9).


2014년 4월 24일 가해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를 위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첫 번째로 발현하신 부활 대축일 저녁에 그는 사도들의 은신처에 숨어 있지 않고 바깥소식을 탐문하려고 시내를 돌아다녔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직접 그분의 다섯 상처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이로 보아 그는 호기심이 많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토마스 사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만지고 옆구리 상처에도 손을 넣어 사랑의 표지를 느끼고 싶어 하였습니다.

자비로우신 예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채시고 토마스와 다른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토마스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감동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응답하며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예수님의 다섯 상처에서 흘러나옵니다. 거기서 죄의 용서와 영혼의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그 상처에 다가가는 모든 사람은 영적인 생명을 호흡합니다.

두 번째 아담이신 주님께서는 창조의 생명력보다 훨씬 강력한 부활의 생명력을 자녀들에게 부어 주십니다. 부활의 체험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사랑의 추억에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헌신 속에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요한 20,19~31)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주일복음강론

목록 전체보기 →
[부활 제4주일(생명 주일·성소 주일)] 착한 목자 (요한 10,1-10)17.05.07조회 75[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엠마오 (루카 24,13-35)17.04.30조회 79[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보고서야 믿느냐? (요한 20,19-31)17.04.23조회 59[예수 부활 대축일]성경 (요한 20,1-9)17.04.16조회 56[주님 수난 성지 주일]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마태26,14─27,66)17.04.09조회 84[사순 제5주일]라자로의 소생 (요한 11,1-45)17.04.02조회 59[사순 제4주일] 태생소경 치유 ( 요한 9,1-41)17.03.25조회 57[사순 제3주일]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 (요한4,5-42)17.03.19조회 107[사순 제2주일] 거룩한 변모 (마태 17,1-9)17.03.12조회 57[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 ( 마태 4,1-11)17.03.04조회 144[연중 제8주일]두 주인 (마태 6,24-34)17.02.26조회 56[연중 제7주일] 이웃 사랑 (마태 5,38-48)17.02.18조회 135[연중 제6주일] ‘예.’ 와 ‘아니요.’ (마태오 5,17-37)17.02.12조회 58[연중 제5주일] 소금과 빛 (마태오 5,13-16)17.02.05조회 60[연중 제4주일 (해외 원조 주일)]참된 행복 (마태오 5,1-12ㄴ)17.01.29조회 153[연중 제3주일]버림과 따름 (마태 4,12-23)17.01.23조회 58[연중 제2주일] 하느님의 어린양(요한 1,29-34)17.01.15조회 1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