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3주일(이민의 날)]엠마오 (루카 24,13-35)
한국 천주교회는 주교회의 2000년 춘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해외 원조 주일’의 바로 전 주일을 ‘이민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사도좌와 뜻을 같이하여 정한 이민의 날은 2005년부터 5월 1일(주일인 경우)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 오고 있다. 한국 교회는 이 이민의 날을 정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사목적인 관심을 더욱더 기울이기로 하였다.
오순절에 베드로 사도는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여러분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이라고 소리 높여 말한다. (사도행전 2,14.22ㄴ-33)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셨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다고 한다. (1 베드로 1,17-21)
사랑하는 여러분, 17 여러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시며,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신다. 식탁에서 빵을 떼어 주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본다.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부활 제3주일 제1독서(사도2,14.22ㄴ~3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23)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32)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33)
사도행전 2장 22절부터 32절까지는 계속되는 사도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사도 베드로가 시편 16장 8~11절에 나오는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란 복음의 핵심을 선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23)
'무법자들'(법없는 자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손을 빌려'라고 번역된 희랍어 '다이 케이로스'(dia cheiros)는 히브리어 '뻬야드'(beyad)에서 온 단어이다. '뻬야드'는 유다인들이 사용하는 관용구로서 '~의 방법을 사용하여' 혹은 '대리자를 사용하여'라는 뜻이다.
유다인들은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로마의 권력 즉 총독 빌라도의 권위에 의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사주했었다(로마2,14; 1코린9,21). 따라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로마인들에게 보다는 유다인들에게 있다.
한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일이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에 의한 것이라는 측면과 무법자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내용은,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이라는 구속사업이 하느님 계획의 실현과 인간의 사악함이 그 도구로 사용된 사실을 동시에 드러내 준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하느님의 필연적 계획이 결코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역설적 진리를 잘 보여 주고 있다. 하느님의 계획이 있었다고 하여 인간의 사악함이 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사악하다고 하여 하느님의 계획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32)
베드로가 본 설교에서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다윗의 예언이 아니라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다.
다윗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했다는 사실이나 부활 그 자체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예수님께서 바로 부활의 주님 이시고, 예수님께서 복음 그 자체이시다.
과거에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의미에 대해서 못알아듣고 예수님을 부인까지 했던 베드로가 이런 놀라운 깨달음과 확신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 진리를 전파하게 된 것은 실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이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 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주님의 성실한 증인(martyres; 순교라는 말이 여기서 나옴)임을 천명하고 있다.
여기서 '에스멘'(esmen)이라는 현재형 동사가 쓰인 것은 이 증인됨이 과거와 현재 뿐만아니라 영원토록 계속될 일임을 보여 준다.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33)
사도행전 2장 33절부터 3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부어 주셨음을 다윗의 예언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부분이며, 사도행전 2장 33절은 부활 이후의 승천에 관한 표현이다.
시편 110장 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다. 이것은 본문이 승천의 방향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에서는 '테 덱시아'(te dexia)가 도구, 수단의 여격이므로, 문법적으로 볼 때는 '오른손으로'번역하여 승천의 방법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 개념에서 오른손은 능력을 말한다.
즉 사도행전 2장 33절은 하느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당신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시고 또한 하늘로 올리신 것을 상징적인 표현 방법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탈출5,6; 89,14).
한편 '들어 올려지신'이라는 표현은 지상에서 천국으로의 장소적 이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 보다는 육신을 입으셨던 그리스도께서 부활과 승천을 통해 다시 영광스러워지셨다는 신분적 이동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필리2,9~11).
그리고 사도행전 2장 33절은 '약속된 성령'을 보내 주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해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요한14,16.26; 사도1,5), 약속대로 하느님의 영이신(사도2,17-18) 성령을 하느님께로부터 받아서 보내셨다(사도2,1~4).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으신 것은 당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성령을 받을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였다.
또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고 바로 그들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상을 통하여 나타나고 있음을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보여 주고 있다.
부활 제3주일 복음(루카24,35~48)
"내 손과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39)
여기서 '내', '나의'에 해당하는 '무'(mu; my)를 두 번 사용하여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신 의도가 명백해지는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유령으로 오해하는 제자들의 그릇된 생각을 수정하기를 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유령이 아니라 실제 육체를 가지신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당신의 손과 발을 확인함을 통해 깨닫게 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손과 발인가?
루카 복음사가는 여기에 대해 확실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요한 복음 20장 25~27절은 그 손과 발에 '못 자국'(못박힌 자국)이 있음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 당신 자신이 '몸'이 없는 유령이거나 혹은 '또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과거 그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고 기적을 베풀며, 결국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바로 그 예수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 주시고자 했던 것이다.
한편, 요한 복음 24장 39절에는 명령형 동사가 세 번 나오는데, 첫번째는 '보아라'에 해당하는 '이데테'(idete; Look at)이고, 두번째는 '만져'에 해당하는 '프셀라페사테'(pselaphesate; touch)이며, 세번째는 '보아라'에 해당하는 '이데테'(idete; see)이다. 이 세 동사는 모두 복수 2인칭 부정(不定) 과거 명령형으로서 매우 강한 의미를 지닌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거듭 세 번의 명령형을 사용하신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구체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는 '만져'로 번역된 '프셀라페사테'((pselaphesate)이다.
이것은 '손으로 만지다'를 뜻하는 원형 '프셀라파오'(pselaphao; touch; handle)의
명령형으로 사용된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실제 육체를 지녔음을 접촉을 통해 확인하라는 뜻이며, 육체적 부활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증명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 단어는 요한1서 1장 1절에서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성(人性)을 지녔음을 증명할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낙담하고 불안해하는 엠마오의 두 제자는 성경에 예언된 구세주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설명을 듣고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제자는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열정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묵상할수록 부활의 은총이 우리에게 흘러넘치게 됨을 깨닫습니다. 성경을 읽는 시간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무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필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스며들고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생활의 가치를 확인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하느님의 사랑을 뼛속 깊이 느꼈듯이,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그 사랑을 체험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여기’ 살아 계시며 우리를 만나고 계십니다.
부활의 은총은 ‘흠 없고 티 없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체험하려면 그리스도처럼 수난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육신이 죽음의 나라를 벗어난 것처럼 우리의 육신도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신앙인의 커다란 특징은 죽음과 친해지는 것입니다. 성덕에 올라간 성인일수록 죽기를 더 바란다고 합니다. 죽음이 곧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요 부활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부활 3주일(루카24,13-35)
희망을 잃었을 때 반영억 라파엘신부.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은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 뵙는 은총에 눈뜨기를 바랍니다. 사랑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 하십시오. 사랑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의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하시리라고”(루카1,68.71 ;2,38) 희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찬 행동을 보았던 제자들과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 임금님이라고 환호하였고 (루카19,37-38), 예수님께서 당장에 예루살렘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시작하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루카19,11).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메시아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고난을 받으시며 삶을 마감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에서 죄수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에 관한 모든 희망들과는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원수들에게 예속 당한다면 어떻게 그가 원수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제자들과 많은 사람은 영광을 쫓았으니 메시아의 죽음은 절망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소문은 절망에 절망을 더했습니다. 낙심과 불안이 커지니 슬픔만 커질 뿐입니다. 그래서 빨리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온 백성은 분명히 알아두시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주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2,36.)라고 선포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그 와중에 예수님께서는 무너진 가슴에 다시 희망의 싹을 틔워주기 위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눈이 가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으시고 함께 걸으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여정에서도 무거운 시련과 고통 안에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지만 내 눈이 가려 못보고 못 느낄 뿐입니다. 문제에만 매여 있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사실 돌아보면 은총인데 당장은 은총으로 느끼지 못하고 힘에 겨워합니다. 은총의 순간을 은총으로 느끼는 것은 뒷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습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있으면 희망을 잃었을 때, 그때야말로 기도할 때이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뜨기 까지는 갈 길이 멉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기적은 문제가 있는 곳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실망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가던 제자는 날이 저물어 동행하던 사람과 서로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을 때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하고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길을 가면 그만인데 구지‘함께 묵자’고 붙잡았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됨됨이가 드러납니다.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는 모습이 창세기 18,1-15의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만난 아브라함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결국 집에 들어가서 함께 식탁에 앉아 찬미를 드리고 빵을 떼는 순간에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나그네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실천인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 위에 내리게 하는 힘이고 우리 구원의 확실한 표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따라서“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때를 놓치면 그만큼 충분한 효과를 얻지 못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그 사람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개신교 신자에게도 전화를 많이 받게 되었는데 저에게 전교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은 대략 “오늘도 한 영혼이 지옥불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많으니 설교에서 바르게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예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만이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제가 미처 받지 못하면 메시지를 남기고 새벽에도 상관없이 전화를 합니다. 어느 날은 미안했던지 “요즘 사제님을 괴롭혀서 죄송합니다.” 하고는 또 시작하더라고요. 정말 지나친 열심도 문제입니다. 열심히 하는 것도 고상하게 열심 해야 합니다. 친절하게도 문의할 것이 있으면 연락하시라고 전화번호까지 알려 주었는데 신자분들에게 알려드릴까도 생각했었습니다. 새벽에, 한 밤중에 시도 때도 없이 문의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똑 같은 사람되지요!…
이웃의 요구를 잘 받아주어야 하는데 특히 개신교에서 열성을 보이는 이가 이렇게 나올 때 우리가 성모님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알려줘야 할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자기 어머니는 어떻게 모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마리아. 마리아하고 부르는 사람들이 목사님 부인에게는 사모님, 사모님 하잖아요!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성모님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천사를 통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을 겸손과 순명,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세주의 탄생을 가져오셨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철저히 따르셨던 어머님께 존경을 표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시는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합당한 공경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첫 표징을 보여 주셨는데 잔칫집에 술이 떨어진 것을 먼저 알아채신 분이 어머니셨습니다. 그리고 능력을 지니신 아들, 예수님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순명하시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의 말씀을 지나쳐 버리지 않으시고 마침내 물을 포도주로 만든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어머니의 역할이 이런 것입니다. 곤란한 처지에 있게 된 사정을 미리 알아채시어 그 사람과 공명하시고 그것을 주님을 통해 해결해 주시는 분입니다. 어머니의 전구는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철저히 아들의 삶에 동행하셨으며 십자가 밑에 서 계셨고 아들의 시신을 가슴에 품어야 했던 분이십니다. 요람에서 무덤에까지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직접 갈 수도 있지만 효과적으로 가기위해 어머니의 손을 빌어 예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치마폭이 예수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오직 예수님을 들어 높이셨습니다. 당신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신 것도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능하신 분이 큰일을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분 마음에는 늘 주님이 모두였습니다. 이런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제자들이 나그네를 집안에 모셔드려 대접하고 믿음의 눈이 뜨였듯이 우리가 성모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면 예수님을 어떻게 모셔야 할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깨우치게 됩니다. 성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결국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가는 것이고 결국은 주님의 능력을 만나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우리가 직접적으로 만나든 간접적으로 만나든 예수님을 만나길 바란다면 성모님을 잘 모셔야 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함께 하십니다. 실망과 좌절의 늪이라 생각될 때 더 간절히 기도하고 사랑하면 믿음의 눈을 뜨게 되어 비로서 주님과 함께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십시오. 이웃을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질문으로 정리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누가 말했을까요? ‘하루살이’가 말했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내일이 있어 행복합니다. 부활한 새 생명의 내일이 있어 기쁩니다. 부디 내일을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에 사랑을 더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항상 끼어드시는 분
말을 하다가 중간에서 끼어들면 기분이 나쁩니다. 또 왜 남의 말에 참견하느냐고 신경질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누가 끼어드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내가 미운 사람이거나 사사건건 참견하는 사람이 끼어들면 그건 정말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내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 나를 구하기 위해서 은근 슬쩍 끼어드는 사람은 정말 기분이 좋고 대환영입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정말 힘이 들 때, 표 안 나게 도와주면 정말 행복합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워 지쳐 떨어질 지경이 되었을 때, 외롭고 서러울 때, 걱정거리가 태산 같을 때, 아주 복잡한 문제를 도저히 풀 수 없을 때, 누군가에게 모두 기대고 편히 잠들고 싶을 때, 해결할 방법이 없을 때 누군가 끼어들어 나를 구해줄 사람을 간절히 바라기도 하고, 기대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은 인복(人福)이 많은데 나만 그런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억울해 하면서 살았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오늘 복음에서 그렇게 은근 슬쩍 끼어드는 분을 아주 정겨운 표현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날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괴로워하면서 돌아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끼어들기를 하시는 예수님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한 스타디온은 185m이니까 60스타디온이면 약 11,100m쯤 되는 거리 정도 될 것입니다. 약 30리가 되는 거리죠. 30리는 장정이 두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 성경에서 이 거리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거리를 걸어가는 동안에 주님과 같이 걸어간 그 거리가 얼마나 행복하고 인생 전부를 표현하는 것인가 생각하면 두 시간 반 거리가 얼마나 황홀하였는지 상상할 수 없는 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과의 동행,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함께 있고 싶은 분과의 동행은 언제 생각해도 가슴 벅찬 일입니다. 지금 그 거리라고 한다면 아마 걸어갈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차를 타고 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길이라고 한다면 더 먼 길이라고 하더라도 같이 걸어가려고 할 것이고 죽더라도 따라가야 하는 길입니다.
엠마오라는 마을은 지도에 나와 있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고, 옛 지명에 있다는 말도 있지만 이 거리를 걸어가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자세히 들려주시는 꿈과 같이 아름다운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같이 걷는 이 행복한 길을 우리는 항상 꿈꾸며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흠숭하고 사랑하며, 생명이요, 길이며, 희망이신 그분과 같이 걷는 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성경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부활을 상상이라도 하였다면, 또한 주님께서 자기들에게 나타날 것처럼 생각되어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열심히 토론하면서 가는 길에 예수님이 끼어듭니다. 말씀이신 그분이 항상 먼저 끼어드십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관심을 표현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먼저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그 분을 느끼지도 못하고 마음에 새기지도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나에게 오시는 주님은 항상 그렇게 아주 가까이서 우리와 동행하고 싶어 하십니다. 나는 언제나 외롭다고 합니다. 친구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말 상대도 없다고 불평합니다. 말 상대를 찾아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곁에 오신 주님은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을까요? 우리는 성령을 받았음에도 왜 주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사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 문제일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인간의 눈으로 식별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형언도를 받고, 피곤에 지치고 매 맞고, 가시관 쓰고, 상처투성이에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으로 뇌리에 박혀 있을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의 눈에서 편견과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시각을 달리해야 합니다. 그 시각을 부활 신앙의 시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을 함께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본당 신부님은 부활 주일에 그러셨습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믿으며 무조건 행복하십시오. 행복하게 사는 것이 부활을 사는 삶입니다.”